기어이 용사 엘리시아를 도발해 결투까지 끌어내는데 성공한 남자, 알렉은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대답했다.


"네가 말했듯이 저 호구는 세상 경험을 좀 할 필요가 있어. 내가 오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마. 그러면 세상을 구하겠다느니 허황된 망상을 하며 위선이나 떠는 짓을 그만두겠지."


정작 질문한 엘리시아의 동료이자 애인인 마법사 마르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뭐. 알았어."


"걱정 마라. 죽일 생각은 없어."


"푸핫!"


그 말에, 마르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렉이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그는 건성으로 사과를 건넸다.


"아, 미안 미안. 그래, 열심히 해 봐."


"...치료해 줄 준비나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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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이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엘리시아는 검조차 뽑지 않은 채 삐딱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하세요. 저 말고, 저기 병사들한테."


"내가 왜?"


"'힘도 없는 주제에 나서다 죽은 머저리들'...이란 말에, 문제를 못 느끼시나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제 목숨을 내다버린 놈들한테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만."


알렉은 그 와중에도, 엘리시아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무기도 뽑지 않고, 감정에 휘둘려서 설교부터 하는 꼴이라니. 주변에서 용사다 용사다 하고 띄워주니까 오만함이 정말 하늘을 찌르는 군. 실전에 투입된 지 반년 정도밖에 안 된 애송이다워.'


"아 진짜...화나게 하지 마세요. 마지막 기회를 드릴게요. 저한텐 사과할 필요 없고, 저기 계신 분들한테..."


"네가 나를 이기면, 생각해보지."


"...하. 좋아요, 그래. 정신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요."


한숨을 푹 쉬고,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선공은 양보하지."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보네요."


알렉은 이를 악물며 자신에게 돌진하는 엘리시아를 보며 잡생각을 했다.


'정직하기 짝이 없군. 실전 감각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용한 수준이야. 심지어 칼도 안 뽑았군.'


그리 생각하며, 그는 몸을 옆으로 틀어 돌격을 피한 뒤. 그녀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시도했다.


콰득.


엘리시아가, 보지도 않고 그의 팔을 잡아채기 전까진. 그의 팔을 붙잡은 그녀는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알렉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뭐?"


쾅!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힌 알렉은 눈꺼풀을 깜빡이며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힘조절을 한 건지, 크게 다치진 않았다. 엘리시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더 안 덤벼?"


어느새 반말을 하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알렉은 단도를 꺼내 휘둘렀다. 엘리시아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칼날을 피했다.


"빠르고 날카롭네. 근데, 그것 뿐이야."


연속적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며 엘리시아가 말했다. 도발을 무시하며, 알렉은 몰래 준비하던 마법을 발동했다.


"폭발-"


"정지."


그리고, 그 마법 역시 간단히 침묵 마법으로 파훼되었다.


"...또 꼼수. 당신 용병이 아니라 무슨 길거리 양아치야?"


마법이 막힐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그는 마탄이 장전된 권총을 꺼내 엘리시아의 몸을 노렸다.


'이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다만...죽지는 않겠지. 방심한 네 잘못이다.'


그는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반응할 타이밍을 놓친 건지, 엘리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 얼마나 대단한 위력이길래 그리 꽁꽁 숨겼나 해서 맞아줬더니만. 이딴 걸 비장의 한 수로 숨겨서 어디다 써먹게?"


물론, 탄환은 가벼운 가죽 갑옷조차도 뚫지 못했다. 드디어 평정이 깨진 알렉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엘리시아는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목걸이를 풀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저 년은?'


"당당하게 시비를 털길래 뭐 한 수 배울 건덕지라도 있나 싶어서 좀 지켜봤는데...도발에 넘어간 척 좀 해줬더니 순진하게 머리채부터 붙잡으려 들질 않나. 마법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싼 장비를 준비해 둔 것도 아니고. 너 대체 뭐야?"


"...목걸이, 없어도 괜찮겠나? 꽤 비싼 물건이라 들었는데. 적당히 얕보는 게 좋을 거다. 장비로 우세를 점하니까 네가 강한 것 같나?"


그 말대로, 엘리시아의 목걸이는 어마어마한 고급품이었다...만.


"뭐라는 거야. 이건 봉인군데. 뭐, 비싼 건 맞지만."


목걸이가 풀리자마자, 황금색 마력이 터져나오며 투기장 내부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는 검을 뽑아 들어올렸다.


"막아봐."


검을 수직으로 내리긋자, 거대한 검기가 직선으로 뻗어나왔다. 알렉은 흘려내 반격할 심산으로 비스듬하게 창을 꺼내들었지만, 무식하게 넓은 범위의 검기는 그를 베어내진 않았지만 멀리 날려버렸다. 가까스로 창을 바닥에 꽂아 균형을 유지한 그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허억...기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군. 타고난 재능 하나만 믿다간..."


"또 변명. 변명변명변명. 추하니까 그냥 입 좀 닫아. 쯧. 그리고 내가 너 죽인대? '정신 교육'을 하겠다고 말했잖아."


엘리시아는 다시 검을 집어넣고, 검집과 함께 어깨 너머로 던져버렸다.


"적당히 하..."


드디어 이성을 잃기 시작한 알렉이 소리치려는 찰나, 엘리시아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다가와 그의 턱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왠 양아치가 같잖은 설교질이야."


공중으로 떠오른 알렉의 몸은 그대로 배를 걷어찬 엘리시아의 발차기에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딫혔다.


"너 같은 놈들은 항상 똑같아. 현실은 바꿀 수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나 혼자만 살아남는게 정답이라고. 뭐, 그런 건 사실 각자의 인생 방식이니까 뭐라 할 생각은 없어. 근데 왜 자꾸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한테 나서서 설교질이냐고."


알렉은, 그 틈을 노려 먼지구름에서 튀어나와 창을 찔렀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왼쪽으로 꺾어 피하고는, 창대를 붙잡고 그대로 부러트렸다. 알렉이 발로 땅을 그어 모래를 튀기자, 엘리시아는 간단한 주문으로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반대 방향으로 날려버렸다. 


"너 혼자 세상 이치 다 깨달은 것 마냥 구는 건 내 알 바 아닌데...왜 자꾸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은? 도전할 생각은 없이 너보다 약한 적들만 골라서 썰어재끼니까 네가 진짜로 뭐라도 된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반년밖에 안 된 신참이라 몇 년 먼저 구른 선배 놀이라도 하고 싶었어?"


이젠 대놓고 쌍욕까지 박기 시작한 엘리시아에게 알렉이 권총을 겨누었다. 엘리시아는 권총을 붙잡아 악력으로 우그러뜨렸다.


"네가 이기적으로 살든 타인을 외면하든 신경 안 쓴다니까? 그럼 너도 나나 우리한테 신경끄지 왜 나서서 시비야?"


"...네가 모든 걸 다 구할 수 있을 것 같나? 현실을 직시해라."


"누가 내가 혼자 다 한대? 그럼 저기 앉아있는 내 동료랑, 애인이랑, 병사들은 뭐 병풍이냐? 왜, 내가 호구 맞다고 인정하니까 내가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병신으로 보여? 응? 내가 '헤헤 좋은 일을 하면 세상이 좋아질 거야!' 이딴 생각이나 하는 애새끼로 보이니? 네가 아는 거 나도 다 알고, 내 친구들도, 저기 앉은 병사들도 다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거지. 침묵하고 외면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현실에 부딫혀서 포기하고 도망이나 치는 너 같은 놈이랑 다르게."


그 말에 결국 울컥한 알렉이 독을 발라놓은 암기를 소매에서 뽑아 휘둘렀다. 엘리시아는 부러진 창대를 휘둘러 날을 쳐내곤 알렉의 손목을 꺾어 암기를 떨어뜨렸다. 알렉이 고통스럽게 손목을 부여잡는 동안, 엘리시아는 독 발린 칼날을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실수했군. 처음에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왜, 방심 안 했으면 네가 이겼을 거 같아? 내가 지금 맨손으로 너 패는 중이라는 건 알지?"


엘리시아는 가볍게 알렉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다치지 않게 걷어차지도 않고 말 그대로 힘으로 다리를 밀어내 넘어뜨렸다. 정말 괴물같은 힘이었다.


한편,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르크는 예상했다는 듯 미소지으며 턱을 괴었다.


"이기는 싸움만, 그마저도 희생이 필요해지면 가차없이 다른 사람 목숨을 갈아넣기만 하는 놈이 무슨 상황에서든 하나라도 더 구하려고 밥먹듯이 사지에 몸을 내던지는 녀석이랑 똑같을 리가 없잖아? 저 괴물같은 힘이랑 넘쳐나는 마력도 맨날 부족하다고, 더 빠르고 더 똑똑하고 더 강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녀석인데. 진짜 무슨 생각으로 엘리시아한테 덤빈 거야?"


엘리시아는 넘어진 알렉의 앞에 창대를 꽂아넣고는 등을 돌렸다. 알렉은,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닌 주제에...!"


엘리시아는 질렸다는 눈으로 그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특별하게 태어난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대신 목숨을 걸겠다고. 대신 세계를 구해주겠다잖아.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저기 계신 병사분들은, 너보다도 못한 재능으로 목숨을 걸었어. 너 진짜 추잡하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정신 교육은 포기할게. 밖에서 네가 이겼다고 정신승리를 하던 말던, 알아서 해."


엘리시아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투기장을 떠났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좀 풀렸어?"


"...생각해보니 사과시키는게 목적이었는데 분풀이만 했네. 반성해야겠다."


낄낄거리며 묻는 마르크의 질문에, 엘리시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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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찐 떡밥이 돌길래 생각난 소재. 사실 생각해보면 나만 잘먹고 잘살겠다고 이기는 싸움만 하는 놈보다 매번 가장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에 몸을 던지는 인간들이 능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대단한 건 상식이거등요...요즘 창작물에서 착한 캐릭터를 자꾸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바보로만 묘사하는게 거시기하기도 하고. 아니 상식적으로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사람들이 밑바닥을 더 보지 세상을 쓰레기야 하고 외면하는 인간이 더 보겠음? 위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선택했기 때문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함...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이순신 같은 사람도 있는걸. 세계를 구하는, 역사가 기억하고 음유시인이 오래도록 위대함을 노래할 용사면 그 정도는 되야지!


여하튼 이런 성숙하고 선한 용사물 좀 "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