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은 하루히 연작 중에서 우울 다음으로 감명깊게 본 작품이다.



 한숨은 우울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미쿠루와 하루히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줄거리는 1권처럼 단순하진 않다. 좀 더 복잡하다.

 본격적으로 연애소설다운 스토리가 되었다.

 

 오컬트 동아리 부장 스즈미야 하루히는 문화제를 앞두고 영화를 만들자고 한다. 하지만 하루히의 본심은 쿈과 미루쿠의 사이를 벌리는데만 있었다. 쿈의 시선이 자꾸만 미쿠루에게 가는 것이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제작을 명분으로 쿈과 미쿠루가 단 둘이 있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영화를 제작하는 목적은 둘이다.


 하루히가 영화를 만드는 목적.


첫번째, 아사히나 미쿠루와 코이즈미 이츠키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 둘을 엮어버린다. 그리하여 소외된 쿈을 독차지한다. 


두번째, 아사히나 미쿠루의 이미지를 개씹창으로 조진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가 미쿠루에게 ㅉㅉㅉ 하며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할거다! 나는 잘못없음. 저새끼가 먼저 쿈한테 꼬리치면서 나 자극했음. 나는 피해자니까 개년한테 복수할 명분이 있음. <-매우 폭력적인 사고방식


 물론 본심을 말하면 아무도 영화제작에 협조 안할테니 하루히는 이를 숨기고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쿈은 미쿠루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이 대본에 경악한다. 이게 사람새끼가 쓸 대본인가 하고. 결국 쿈은 영화제작 도중 더 이상 미쿠루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루히에게 화낸다. 미쿠루를 감싸는 쿈을 보고 하루히는 분노로 가득 찬다. 저년이 나쁜건데 왜 무해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거야 하고. 


 결국 하루히는 빡쳐서 '미쿠루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영화에 추가하겠다고 우긴다. 물론 우긴다고 그런 장면을 찍는데 부원들이 협조할 리 없다. 영화제작은 파토나고 하루히는 쿈에게 또 미움받았다고 시름시름 앓는다. 미쿠루 씨발년아... 


하지만 결국 쿈은 먼저 하루히를 용서하고 둘은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하루히는 쿈이 편집한 이 영화가 그럴싸하다고 느꼈는지 무척 기뻐하며 이 영화제를 문화제에 출품하자고 외친다. 아니 이딴 영상을 진심으로 내자고 주장하는건가. 쿈은 경악하며 한숨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래가 바로 쿈이 어떻게든 편집해냈다는 설정의 영화 오프닝 영상을, 애니메이션에서 재현한 것이다. 실제로 쿈이 편집한 것인지 아닌지는 한숨의 특성상 불명확하다. 쿈이 자꾸만 시야가 좁은 왜곡된 서술을 하기 때문에, 쿈이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지 반쯤 거짓말을 하고 있는건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뿐만 아니라 쿈이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상당부분이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



https://youtu.be/704jXqEcBeA?si=AJFINuSxYEISj-NR




영상에서 미쿠루를 향한 음침한 악의와, 미쿠루가 느꼈을 눈물나는 고통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것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 스토리다.


 1권에서 하루히는 미쿠루에게 쿈을 빼앗길 뻔 했다. 하지만 미쿠루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났다. 그래서 아직 남아있는 미쿠루와 하루히의 갈등, '악녀 미쿠루에게 복수하고 쿈을 되찾는다!'를 풀어나간 이야기가 바로 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인 것이다.


 한숨은 우울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서술자들을 이용해 진짜 스토리를 숨기고 있다.


 다만 한숨에서 '개연성 없는 부조리한 서술자' 역할을 하는 건 우주인도, 초능력자도, 미래인도 아니다. 바로 주인공인 쿈이다.


 하루히가 왜 저렇게 미쿠루를 싫어하는지, 왜 미쿠루와 이츠키를 억지로 붙이려 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우울에서 미쿠루가 쿈을 빼앗으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미쿠루와 이츠키를 붙여 커플을 성립시키고, 쿈을 고립시켜 독차지하려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하루히가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이유가 쿈 때문이라는 소리다. 이 모든 문제는 쿈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쿈은 절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루히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람이 자기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건 결국 하루히가 일으킨 이 사태를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쿈은 필사적으로 독자를 속인다.


 내가 하루히를 어떻게 해볼수있겠어?

 이것봐, 하루히가 영화를 찍을 때마다 오컬트 현상이 발생하고 있잖아.

 나는 휘말리는 입장이야. 이 오컬트 현상들을 수습하는 것만 해도 바쁘다고.


 그러니까 난 하루히를 신경쓸 여유가 없어, 독자 너도 이해하지?


 독자를 속이는 탁월한 솜씨는 여전하다.

 하지만 읽어나가다보면 깨닫게 된다. 이런식으로 쿈이 하루히를 무시해서는 절대로 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걸. 결국 하루히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쿈은 하루히를 직시하려 노력해야 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이걸 깨달으면 이 소설의 진짜 스토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서술자인 쿈이 의도적으로 핀트를 왜곡시키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읽어볼만하단 얘기다. 강제로 두번 읽게 만드는 소설 실화냐.


 한편 하루히가 만든 영화의 내용 또한 흥미롭다.

 하루히가 만든 영화 아사히나 미쿠루의 모험은, 미쿠루와 이츠키, 유키 세사람이 배우로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쿈도 하루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하루히가 정말로 쿈을 손에 넣고자 했다면, 그리고 미쿠루를 괴롭히고 싶었다면 자신이 직접 배우로 뛰었으면 그만이다. 자기가 직접 여주인공이 되고 쿈이 남자주인공이 되는 연애물을 찍고 미쿠루를 악녀로 등장시켰으면 그만이다. 미쿠루를 마운트 포지션으로 직접 깔아눕히고 얼굴을 후두려패는 편이 더 시원하고 통쾌한 복수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하루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낸 쿈과의 애정은 결국 영화에서 일어난 일. 덧없는 가짜에 불과하단걸 알기 때문이리라. 하루히와 쿈의 관계는 현실 속에 있는 것이지, 영화 속에는 없다는 걸 하루히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장면의 해석 또한 정 반대로 바뀌게 된다.


 한숨의 마지막 장면에서 쿈은 하루히에게 '이 영화는 픽션입니다'라는 문구를 넣자고 한다.

 하루히는 그 말에 그건 당연한거 아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루히는 영화가 허구라는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속의 내용을 허구로 만들고 싶은 건 쿈인 것이다. 쿈이 영화 속에서 미쿠루와 맺어진 이츠키를 질투하여 '이 영화는 가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쿈은 매우 비겁하다.

 하루히가 자신을 좋아하는걸 알지만 그걸 외면하고 독자까지 속이고 있고, 미쿠루와 하루히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하렘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하루히는 어떻게든 그 어중간하고 애매한 상태를 끝내고 싶은것 뿐이었던건 아닐까. 

 이렇게 한숨은 결말에서 이 소설의 연애갈등구도가 수라장임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연애소설이긴 하지만 귀여운 내용은 아니다.
 그래서 한숨에 등장하는 하루히가 가장 역겹고, 한숨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에피소드였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서술자가 하루히를 편견 섞인 눈으로 보도록 유도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숨은 우울에 맞먹는 강렬한 문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조리한 서술자를 활용하여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계속해서 하루히를 왜곡시키고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한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가장 소설적으로 탁월하다 느낀 건 우울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한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