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꽤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녔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사람과 교류한 지 1년이 넘으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더라. 그래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지난 12년 동안 신세를 졌던 시계탑을 처음으로 떠나기로 했다.


시계탑. 


엘리트 인력인 마법사들의 집단인 주제에 공학자를 환영하고, 다른 마탑이 본인들의 비전을 꽁꽁 숨기는 동안 논문이란 논문은 있는대로 발표하고 평범한 학자들과의 협업을 적극 추진하는 괴짜들의 마탑. 그중에서도 탑주인 그레이엄 할배는 다른 마탑주가 시계탑의 마법사들을 '천한 것들과 어울리는 마법사들의 수치'라 조롱하자 수많은 상류층 사람들의 앞에서 대놓고 혀를 내밀며 쌍으로 엿을 날리는 미치광이였다. 당시 나이가 무려 예순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하기사 그런 또라이들의 집단이다보니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였던 내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겠지. 난 분명 청소부 일을 시켜달라고 했는데, 다들 나 가르치는 것에 맛이 들렸는지 정작 걸레나 빗자루는 일주일도 못 잡아봤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들고 있던 건 책이나 공구, 실험 기구들이었다. 아, 가끔씩 쥐여주던 사탕도. 그레이엄 할배가 이 썩는다고 자주 못 먹게 했지만, 다들 몰래몰래 하나씩 주곤 했다.


"기동 준비 완료."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음과 함께, 커다란 인간형 기계 골렘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거대 기계는 남자의 로망이라고 떠들던 제롬 형의 작품이었다. 이름을 정하기도 전에, 재앙을 조사하러 이것 하나를 제외한 수많은 기계 골렘을 이끌고 탑을 떠나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들이면 위험한 곳에 사람이 안 들어가도 되니까. 내가 가야지. 조사 끝내고 개쩌는 논문거리 가져온다.'


철컥.


장전된 권총 두 자루를 홀스터에 집어넣고, 산탄총과 장총은 배낭에 집어넣었다. 1급 화염술사인 주제에 총기와 화약에 미쳐 살던 사렌과 사렌의 애인 진의 자랑거리인 마총 세트 '트리아가.' 둘은 미쳐날뛰기 시작한 마수들의 습격으로부터 시계탑 인근의 도시를 지키다 전사했다.


'금방 다녀올게. 혹시 모르니까, 트리아가는 네가 가지고 있어.'


그 밖에도 애나의 소형 화로, 루크의 기계마, 탈의 장거리 여행용 특제 마차...하여간 시계탑 아니랄까 봐 별 희한한 도구는 다 있어서, 떠나는 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긴급 귀환용 스크롤과 마법진도 있으니, 정 위험하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도 있겠지.


"...사용자 인식 중: 하인스. 그레이엄 지팡이 47호의 사용을 허가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워든 건, 그레이엄 할배의 개조 지팡이였다. 어지간한 중급 마법은 물론이고 상급 마법 10종류까지 탑재된, 약간의 마나와 마석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마법을 사용하게 해 주는 지팡이. 그레이엄 할배가 욕을 먹게 만든 주 원인이기도 했다. 개나소나 마법을 쓰게 해준다고.


'...마음이 안 놓이는구만. 자, 이 할애비 지팡이나 갖고 있어라. 난 46호까지만 들고 가면 되니까. 종종 연락하마. 그렇다고 마법 공부 게을리하지는 말고.'


연락은 할배가 떠난 지 정확히 반년만에 끊겼다.


훌쩍.


괜스레 눈물이 나와 눈가를 비볐다.


...진짜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나머지 물건들을 전부 마차 수레에 쑤셔박고, 나는 기계마들을 조종해 천천히 시계탑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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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시계탑을 떠난 지 사흘. 당연히 사람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태양빛이 약해지고,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하자 본래 더운 지방이었던 이곳은 급속하게 평균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설치해둔 화로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중인데도 입가에 김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이 정도면 나중에 북쪽으로 향하면 눈이 대체 얼마나 쌓였을지 상상이 안 간다.


"...그런데, 마수나 동물도 안 보이네."


수첩을 꺼내 날짜를 적고 오늘 관찰한 것들을 기록했다. 기록이라고 해 봤자 생명체 발견이나 기후 변화 정도가 끝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세하게 적으려고 노력 중이다. 기온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왔다면 어느 정도였는지. 생명체는 아직 못 찾았지만.


챙겨온 근방 지도를 펼쳐서 이동 경로를 확인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쭉 가면 일단 용사가 마왕과 격돌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레이엄 할배를 비롯한 시계탑 인원의 생사를 확인하려면 이쪽으로 가야만 한다. 


"저 탑이 보이는 정도면...아직 한참 남았네."


도시의 중심에 선 종탑이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아직 보급품이 넉넉하긴 하지만, 쓸만한 물건을 건질수도 있으니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낌새가 안 좋으면 냅다 도망가면 되고.


도시 내부로 들어갈 즈음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 안은 생각한 것보다도 황량했다. 살아있는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나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눈여겨볼 만한 것들은 없었다. 본래라면 무언가 가득 담겼을 상자도 누군가 이미 털어간 건지 내용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크륵?"


"?!"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조그만 마수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마수의 몸통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서걱.


총성과 절삭음이 거리에 울려퍼졌다. 갑자기 눈앞에 난입한,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에 나는 놀라 할 말도 잊고는 멍하니 그 사람을 쳐다보기만 했다. 상대방도 놀랐는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사람?"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텅 비어버려 남색에 가까워진 푸른 눈보다도 내 주의를 끈 건 화려하게 장식된 그녀의 검 손잡이었다. 먼 발치에서 딱 한 번 보았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용사의 성검이었으니까.


"...용사?"


그 말에 상대는 흠칫 어깨를 떨었지만,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해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비를 온몸으로 맞는 중이었다. 이대로 두는 건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물어볼 것도 잔뜩 있었으니 마차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어...들어오실래요? 여기, 따듯한데."


...내가 생각해도 병신같은 말이었지만 용사는 개의치 않아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기계마를 멈추고, 화로 위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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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르륵.


보온 주전자에 물을 조금 옮겨담아(남은 물은 그대로 수프를 끓이는 중이다) 차를 내렸다. 찻잔을 건네자 용사는 양 손으로 조심스레 잔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어, 음. 차 맛은 괜찮나요?"


"네."


시발.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지. 일 년이 넘도록 대화를 할 일이 없었다보니 말하는 법을 까먹은 기분이다. 물어볼 것은 산더미인데, 오히려 질문이 너무 많아서 그 중에서 뭘 먼저 물어볼 지 모르겠다.


"그...일단 용사님이시죠?"


"...네. 일단은. 그랬었죠."


"혹시 그...'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뇨. 죄송하지만 저도...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뭔가 숨기는 이야기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 본 나를 믿기 어려워하는것도 당연하고, 구태여 용사를 억지로 자극했다간 도망칠 시간도 없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에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혹시 시계탑에서 온 사람들을 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시던 길이셨나요? 만나려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제가 사람을 본 지 오래되서."


"...딱히 목적지는 없습니다. 저도 그냥, 살아있는 사람을 찾던 중이었어서."


"그런가요. 음, 저는 일단 동쪽으로 갈 생각인데. 혹시 내리고 싶으시면 원하시는 길에 내려드릴 수도..."


그 말에 그녀는 놀란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에 나는 더 놀라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가급적이면 동쪽은..."


"죄송해요. 제가 찾으려는 분들이 동쪽으로 갔어서. 저는 그 사람들을 찾으려고 이동하는 중이라서 그건 안 되겠네요."


내가 확고하게 거절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동행하겠습니다. 이런 꼴이지만...싸움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하다못해 고기방패라도 되어 드리겠습니다."


"어...네...?"


용사가 자신을 '고기방패'라고 칭하는 얼굴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그날의 당당하던 미소와는 한없이 먼, 어둡기 그지없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물론 왜 그렇게 울적한 표정이냐고 묻지는 않았다.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서우니까.


"...음, 저희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그럼. 전 하인스에요."


"저는...그냥 '너,' 아니면 '당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가능하면...'용사'라고는 부르지 말아주세요."


"어...이름도 부르면 안 되나요?"


"이름은 아쉽게도 잊어버렸습니다. 한동안은 용사로만 불렸고, 이후로는 절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보니."


그 말에 나는 잠시 마차 뒤편으로 가 책 더미를 뒤적거리다, 용사의 열렬한 팬이던 애나의 스크랩북을 찾아냈다. 페이지를 넘기자, 나는 용사가 대서특필된 신문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엘드레드 프라니아 카시타니아. 이게 이름이 맞나요?"


"...네. 그런 것 같네요. 다만 '프란'이라고 불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왜 굳이 엘드레드란 이름을 꺼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이름 가지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네 그럼 프란 씨.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하인스 씨."


그제야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은 그녀의 얼굴은 이 싸늘한 날씨에도 잠시나마 얼굴에 열기가 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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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생존자들간의 갈등'을 빼면 어떨까? 싶어서 나온 소재임. 아예 사람이 너무 없어져서 경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아무도 없는, 황폐해진 세계를 여행하는 주인공과 비밀이 가득한 용사의 조용하고 음울한 판타지 아포칼립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용사는 용사라고 불리기 싫어하고 자기 이름조차 잊어버렸는지, 용사 파티는 다 어디로 갔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는지, 살았다면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시계탑의 인물들은 어떻게 된 건지. 당연히 여행에 합류할 생존자를 조금 더 만들어도 됨. 환자가 없어진 의사, 마탑에 숨어있던 마법사, 혹은 평범한 농부나 요리사, 어쩌면 굶어죽기 직전인 어린아이나 감옥에서 탈출한 범죄자까지...모두가 흥미로운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음.


당연히 실의에 빠진 용사의 마음이 서서히 치유되면서 주인공에게 빠져들고 삭막한 세상과 대비되는 달달한 로맨스를 조금씩 첨가해도 좋음. 끝없는 절망이 퍼진 세계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희망이나 사랑도 검증된 국밥 소재지.


자, 이렇게까지 셋팅해줬으면 이걸 본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겠지? "써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