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정확하게는 행운이였'었'다가 맞을까


잔뜩 쌓인 설거짓거리를 치우면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쨍그랑!



나쁜 생각을 떠올린 것에 대한 대가일까, 아니면 단순 부주의였을까


별안간, 잘 옮기고 있던 컵 하나가 미끄러졌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이 큰 소리와 함께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원래의 용도로는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컵의 잔해를 보며 말했다.



"아.. 이거 시우가 아끼는 컵인데....."



동거 기념으로 봄에 만들었던 커플 머그컵.


커플 머그컵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내가 만든 걸 들고나오다 깨 먹는 바람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머그컵.


좌절하던 내 옆에서 하나 남은 거라도 애지중지하면서 아껴 쓰면 된다고 웃으며 말했던 머그컵


엇나가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처럼, 균열이 난 채로 내 발밑에 널브러져 있다.



'.... 일단 모아둬야겠다.'



성급하게 했던 탓일까


신문지를 가져와 조각을 주워 담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끝에 아롱아롱 맺혀있는 붉은 방울이 보였다.


이를 늦게 눈치챘던 건, 시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가 당장의 아픔보다 더 큰 걱정거리였기 때문일까



'그래도 얘기는 해둬야겠지.'


'얘기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해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우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끼익하며 문을 미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무슨 일인데."


나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을 이어갔다.


"실수로 자기꺼 컵을 깨뜨려 버려ㅅ...."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순간적으로 떨궈진 시야와 날카로운 소리,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이 질 나쁜 현실을 일깨웠다.


"...아?"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거라고 했잖아!!"


높아진 목소리와 나를 책망하는 말투


그 앞에 선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미안."


"아 시발, 지랄하지 말라고."


"미안해..."


"하... 이거 어떻게 할 건데."


"정말 미안.."


"아 됐다 그냥 새거 사지 뭐."


"미안...."


"..."


그래도 계속 사과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누그러진 목소리를 듣자 안도하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화해하는 의미로 섹스하는 거다?"


"...어?"


"그럼 나 먼저 씻고 올게."


라며 욕실로 향하는 시우를 보면서, 나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 나 지금 생리하고 있어서."


******


조각난 컵을 버리고 돌아와 약을 먹은 뒤, 들어간 방에서 나를 맞이하는 건 침대에 곤히 잠든 시우의 모습이였다.


나는 그 옆 화장대에서 연고를 꺼내 바르고, 조심스레 옆에 누웠다.


'아까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나..."


나의 거짓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가던 모습을 떠올리자 든 생각이었다.


"으음..."


그러다가 조금 불편했는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세상 무해하게 잠든 그의 무해한 표정


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품은 채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러면 부부.... 같으려나..."



그러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품으며 잠에 들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까.'



******


"저기 괜찮아요?"


"네?"


대학생 신입생 환영회 시절, 질 나쁜 남자 선배들이 계속 나에게 술을 권했고


잘 거절하지 못하던 나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었다.


그렇게 술에 취한 날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끌고 나가던 찰나에 나를 도와준 건 입학 동기였던 시우


행운처럼 다가온 첫 만남에 나는 대학 시절 동안 행....


******





"아..."


잠을 자던 도중 뒤척이며 멀어진 몸의 거리만큼 사라져 버린 온기와 안도감


그리고 그사이를 채운 싸늘한 바람이 건드리고 간 손끝과 뺨에서 다시금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 나를 다시 차디찬 현실로 끌어내렸다.



"아침...차려야겠지."



부엌에 도착한 나는 냉장고에서 아침거리를 꺼내 아침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꾸었던 꿈의 내용을 곱씹으며 어제 하지 못했던 생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첫 만남 이후로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됐을까'



서로의 성격이나 외모도 좋아했고, 좋아하는 취미도 비슷했고 여러 가지 일도 잘 맞는 우리였다.


이 행운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서, 졸업 후엔 바로 동거를 시작했고 왠지 이대로 평생 행복하게 함께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널 사랑해."



...하지만,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이지 않았는데.


상념이 길었던 탓일까, 별로 좋지 못한 탄내가 진동했고, 아침으로 준비한 김치볶음밥이 타버렸다는 사실을 뒤는게 알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지금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다. 밥은?"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했다.


"금방 다시 준비할...."


"어휴, 됐다 됐어."


그는 부엌에 맴도는 탄 내를 맡고 손사래 쳤고


내 지갑을 손에 쥐고 나에게 보란 듯이 흔들면서 말했다.


"컵 살 겸 밥도 밖에서 먹지 뭐. 나 잠깐 나갔다 온다. 지갑 빌릴게."


경마다.


핑계를 대고 지갑을 가지고 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내역을 확인해 보았더니 경마장에 있는 ATM 기기에서 인출


행운이 계속 따라줬는지, 돈이 부족해지는 경우는 없었지만


행운이 계속되면 불행도 따라오는 법, 언제든지 잃을 수 있는, 도박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경마다.


나는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지금 밖에 비바람이 세게 부는데, 원하는 거 있으면 내가 주문..."


"아니 됐어, 그냥 내가 보고 사련다. 내 방 더럽혀진 건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들어가진 말고."


자기 의견만 내세우면서 어떻게든 나가려는 모습에 나는 최후까지 남겨두었던 말을 꺼냈다.



"이번 달 생활비랑 치료비 빠듯..."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잠기는 도어락 소리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치만, 미움 받을까봐 강하게 나갈 수가 없는걸....'


'병에 걸렸어도, 내 곁에 계속 있어 주는게, 너뿐인걸...'



그렇다 해도, 내가 반했던, 상냥하던 그의 모습이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중얼거렸다.



"이젠... 헤어지는 게 나을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다잡았다.



"청소랑 빨래라도 해야겠다."



계속 우울해하면 찾아오려던 행운도 지나가는 법


나는 집안일을 하면서 잡념을 흘려보내려고 헀다.


그리고 문뜩 드는 생각


'방을 깨끗이 치워두면, 돌아와서 좋아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청소 도구를 들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


생각보다 깔끔한 방


왜 굳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양호한 방의 상태를 둘러보던 와중


문득, 늘 잠겨있던 책상의 서랍이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것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서랍을 여니, 있던 것은 최근까지 썼던 것으로 보이는 사용감 가득한 일기


조심스레 일기를 꺼내 든 나는 시우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그 흔적을 쫒아보고자 홀린 듯이 일기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


20XX년 X월 X일


내 여자 친구인 다솜이는 운이 말도 안 되게 나쁘다.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스스로 무너졌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만큼.


하지만,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밝고, 긍정적인 그녀의 그런 모습에 끌렸다.


게다가, 항상 잘 안되는 건 아닐거다. 불행한 만큼 행운도 찾아오지 않겠는가.



******

20XX년 X월 X일


벚꽃이 피는 계절, 오늘은 다솜이를 데리고 커플 머그컵을 만들러 데려갔다.


밖의 풍경을 담아 만들었고, 완성물을 보는 그녀의 행복한 미소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자기가 만든 컵을 가지고 먼저 나간 다솜이의 위로 화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머리에 맞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들고 있던 머그컵이 맞아 깨져버렸다.


문득 안 좋은 생각이 들었지만, 좌절한 그녀를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였기에, 금방 잊어버린 생각이기도 했다.



******

20XX년 X월 X일


한 손으로 쓰려니 불편하네 젠장


다솜이랑 볼링장에 갔더니 사고가 터졌다.


원래도 출중하던 실력이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좀 따라줬는지, 퍼펙트게임을 해냈고


신나 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던 찰나에, 기계에 문제가 생겼던 걸까.


얌전하게 리턴 덱으로 돌아와야 할 볼링공이 빠른 속도로 굴러오고 부딪혀서 튀어 올랐는데, 하필 그게 머리 방향일 게 뭐야


순간적으로 팔을 뻗었고, 팔이 부러졌다.


다른 팔에 매달려서 괜히 볼링장에 가자고 졸랐던 자기를 자책하며 울고 불던 다솜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다솜이가 다치진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단순히 지나가던 생각이 의심으로 피어오른 것 같은 날이었다.


******

20XX년 X월 X일


이윽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아무래도 운명은 이 여자의 불행한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다솜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에 개의치 않지만, 


자기 자신이 행운이라고 느끼는 만큼 부조리하게 불행이 찾아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마치, 인생의 행운과 불행이 일정 비율로 정해진 사람처럼 말이다.


다만,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더 큰 불행이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최근에 불행한 일을 많이 당했던 것 같은데, 


곧 다가올 기념일에 그녀가 알게 모르게 가장 가지고 싶어 하던 선물을 줘도 괜찮을 것 같다.



******

20XX년 X월 X일


다솜이가 병에 걸렸다.


완치 된 사례도 거의 없고, 치사율도 높고, 꾸준하게 비싼 약을 복용해야 증상이 악화가 되지 않은 병이란다.


내 탓이다. 


확률은 평등하다.


그리고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 사람이 죽을 확률은 확실하게 존재한다.


만약에


만약에...

.

.

.

.


******************************



그리고 이후, 써 내려진 변화와 가면의 기록


그런 행동의 자기혐오와 반성, 그리고 미안함의 역사


그 감정의 편린을 옅보게 된 나는 일기를 챙겨 그가 있을 곳으로 달려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번 달 분은 이걸로 충분하겠지."


ATM에서 뽑은 현찰을 생각하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계좌이체로 납부하면 들켜버릴 테니...'


그런 점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경마장이 있던 건 행운이었다.


내가 쓴 가면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줄 최고의 장치였으니


'돌아가는 길에 다솜이가 좋아하던 과자라도 조금은 사갈까.'


그 정도의 불행이면 이 정도는 운명이 눈 감아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신호등 앞 편의점에서 과자를 샀다. 


"ㅅ.....ㅇ......ㅑ....."


그렇게 편의점에서 나오던 길,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


들릴 리가 없는,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에 나는 주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발견한 신호등 건너편에서 헐떡이는 낯익은 얼굴


그 손에 들린 더 익숙한 공책





들켰구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우야!!"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든 얼빠진 표정의 시우가 건너편에서 날 보고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그런 그에게 나는 진심을 고백하기로 했다.


불행이 나를 괴롭혀도 너만 있다며 괜찮다는 그런 고백


이어서 외치려던 나는 시우의 바뀐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짐작한 표정 그리고 조금씩 움직이는 입술


들리진 않지만, 움직임으로 알 수 있는 그가 하는 말


"다...솜...아.....미....안......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세계


덕분에 그 말을 놓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던 건 행운이었을까


그리고 필연이었을까


불콰하게 취한 트럭 운전사가 강철로 된 몸체를 이끌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살덩이를 치고 지나가는 광경


그 순간 그의 몸이 반으로 접히며 꺾인 모습과 흩날리는 과자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흩뿌려진 선홍빛 색



모든 게 순식간의 일이었을 텐데, 그 모든 광경이 각인이 된 것처럼 내 몸에 박혔다.


붉은 벚꽃이 폈다.



******


잠만 자면, 그 광경이 떠오르던 탓에, 그토록 멀리하던 술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집에 틀어박혀 외부와 단절된 채로 근 한 달간 폐인처럼 생활했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시우의 흔적


그러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식탁 위에 위치한 비어버린 약통이다.


시우의 사후, 시우가 병원에서 받아온 약은 이미 동이 난 지 오래였다.


시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그 미약한 연결 고리를 잊지 않으려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병원은 약을 나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는 줄 수 없는 약이란다.


마지막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행운이 찾아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독자 경험은 긴데, 소설 써보는건 처음이라 좀 이상해도 봐주세용 굽신굽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