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지요. 


 당신은 한때 내 세상이었다는 것을. 내 세상에는 당신 뿐이었다는 것을. 당신이 구원한 이 한 목숨을 오로지 당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당신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는 것을.


 몰랐겠죠. 몰랐으니 날 떠났겠죠. 


나 또한 몰랐었습니다. 당신이 날 더 깊은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 한 번 날 끌어올린 것이라는 걸.


 그대여. 그대여! 


 그대는 어째서 그대인 것인가.


 나는 당신이 싫습니다. 너무나도 싫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어느 정도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이 손수 절 처박은 이 나락에서 기어올라가면, 당신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을 정도로 좋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요. 구원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신은 내게 단순한 구원을 준게 아니야. 날 다시 이 나락에 빠뜨릴 거였으면,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지 말았어야지. 그냥, 물고기만 툭 던져주고 다시 뺏으면 굶어 죽을 텐데.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 덕분에 난 아직도 살아있고, 당신이 있는 그 위를 바라보며, 오늘도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대여. 그 아름다운 얼굴로 날 비웃으며 날 이 곳에 처박은 그대여! 당신은 영원히 모르겠지요. 당신이 누군가를 비웃는 그 썩어빠진 얼굴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을. 


 이 곳에서 빠져나와,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당신과 다시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당신이 내 등에 비수를 꽂고 떠난 것과는 다르게, 난 당신을 깔아뭉갤겁니다. 


 당신을 깔아뭉개고, 당신을 탐할 겁니다. 


 당신이 좋습니다. 그대여, 그대여. 전 당신이 좋습니다. 호의가 아닌 애욕의 관점에서 당신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날 헌신짝처럼 내치고, 배신하고 등을 돌리고 떠나간 당신이, 저는 너무나도 좋습니다. 


 당신이 쾌락에 신음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제 밑에 깔려 얼굴을 붉히고 성내며 절 밀쳐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을 제 색으로 물들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씨를 뿌릴 수 없는 몸이라도, 당신이 싫어할 지라도, 당신의 마음에 들고 싶습니다. 당신을 깔아 뭉개고, 당신을 범하고, 당신을 굴복시켜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당신을 나락에 빠뜨리고 싶습니다. 


 그대여. 내 등에 비수를 꽂아넣고 떠나간 그대여. 


 그대의 나락은 내 허리 밑입니다. 


 이 편지를 읽을 때 쯤이라면... 당신의 수하 대부분이 사라지고, 당신의 거처엔 당신만이 남아 있겠죠. 


 기대하는게 좋을 겁니다.


 이 편지의 마무리를 볼 쯤에는, 당신이 머무르는 곳의 문앞에 제가 있을테니.

 

 ----


   "말도 안돼...."


 이건 꿈일거야. 분명. 꿈이어야만 해. 


 그 좆만한 애새끼가 왜. 그 바퀴벌레같은 새끼가, 또 기어올라오고 지랄인데.


 - 모든 구역이 함락되었습니다.


 현실을 부정해도, 내 영역은 완전히 무너졌다는 처참한 붉은 안내만이 내 눈 앞을 메우고. 내가 옛날에 희생시켜 올라온 그 버러지같은 년이 홀로 그 짓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분노에 차서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똑똑.


   "씨, 씨발... 들어오지 마."


 나는 단검을 빼들어 문을 향해 겨누었다. 5초도 지나지 않아, 문이 천천히 열리며, 그 애가 들어왔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나한테... 뭔 짓을 할 생각이야. 죽이려면 죽여. 좆같은 짓 하려고 하지 말고."


   "푸흐흐... 죽이긴, 누가 죽여요."


 그녀의 안광이 붉게 빛나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손에서 힘이 풀리며 단검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 찰그랑!


   "옳지. 날카로운 건 무서우니까 바닥에 떨어뜨리는 편이 옳아요."


 저 웃음소리가, 저 음침한 웃음소리가. 내가 처한 상황의 끔찍함을 배로 더해주고 있었다.


   "언니... 프히.. 프히히.... 저, 많이 노력했어요. 언니가 알려준대로, 그 길을 따라 강해졌고, 이제 언니 옆에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 됐어요."


 다리에서도 힘이 풀리며 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줘."


 저 기운은. 저 눈은. 지배자의 눈이었다. 세상을 뒤집을 힘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자신에 찬 눈빛.


 내가 괴물새끼를 키웠구나. 


   "거기서... 널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는데."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앞으로를 기대하시는것도 좋을 거에요."


 두려웠다. 내가 맞이할 미래가.


   "언니도, 한 1주일만 있으면 절 사랑하게 될 테니까."


   "..."


   "순애잖아요. 완전, 이거. 크후후... 푸흐히힛."


 그녀는 음흉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내 어깨를 손으로 밀치며, 날 눕히고 깔아뭉개면서.


   "사랑해요. 언니."


 그냥, 느낄 뿐이었다.


 내가 알던 나는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