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한국적 라노벨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생각을 써본거임

 좀 마이너 의견임.


 '한국적 라노벨'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 말이 처음 나온 당시에는 없었을거임.
 그걸 추구한 출판사들도 그게 뭔지 정확히 몰랐을거고.


 한국적 라노벨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야심찬 선언이지.


 이제부터 우리가 가는 방향이 '한국적 라노벨' 그 자체입니다.

 아직 그 개념은 없죠. 이제부터 그것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보는 한국에서 자생한 한국적 라노벨이라는 개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라노벨의 역사를 연 위대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역사에 동참할 영광스러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선언에 불과하지.


  '한국적 라노벨을 만들겠다'라는 말은 이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와 별로 다를게 없는 아주 당연한 말임. 한국에서 태어난 라노벨은 결국 '한국라노벨'이라는 특수한 성질에 도달하게 될거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걸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이것이 한국적 라노벨이다'라고 언젠가 말할 수 있게 되거든. 몇년 뒤에 반드시 한국라노벨은 이렇더라 하는 경향성 분석이 가능해질테니, 미리 선언해도 상관없는거지. 


 그러니 한국적 라노벨을 추구하는 출판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어.

 인위적으로 소설에 '한국적이다'라고 느낄만한 소재를 넣을 필요 없이 그냥 재밌는 소설을 출판하면 되는거지.


 그런데 그 선언에 주화입마당해버림. 그냥 가볍게 지나가야 할 가벼운 마케팅용 선언에 수많은 작가와 지망생들이 주화입마하여 어떻게든 한국적인 요소를 집어넣으려 애썼음. 솔직히 말해 소재로써의 한국스러움을 극대화하고 싶으면 '일본인이 주인공인 한국라노벨'을 뽑는게 더 나았을거임. 그러면 한국과 일본의 문화차이가 비교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적 요소가 극대화되었으니까.


 하지만 한국라노벨은 자꾸만 왜색을 빼버리려 해서 오히려 '한국적인게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에 붙잡히고 맘.

 두유 노 김치 하면서 일본인 캐릭터에게 김치를 처먹이고 일본인이 '한국인 이 씹새끼들은 왜 맨밥에 김치를 처먹이는거지? 나 이지메 당하는가?'하고  고뇌하는 장면을 뺀다면, 대체 소설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국적인게 뭐가 남나 싶어지는거지.


 그래서 결국 한국적인걸 찾기 위해 '전통'으로 회귀해버림.

 이게 10대 독자들한테는 진짜 안먹히는 선택이었지. 왜냐면 어느 시대의 청소년이건, 청소년들은 전통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유행' 이런 것들에 관심이 더 많은 얼리 어댑터들이 주류를 이루거든. 전통에서 새로움을 찾아내고 전통을 재해석하고 아름답게 느낄 정도로 마니악한 청소년은 진짜 극소수임. 적어도 10대 후반은 가야 그런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함.


 하지만 한국적 라노벨에 경도된 초기 한국라노벨이 '전통'이라는 소재를 포기하기는 매우 힘들었음. 왜냐면 그게 한국적인 요소를 낳는다는건 사실이거든. 전통을 소재로 사용하면 '전통적인 한국'과 '현대 한국'을 비교하는게 가능해짐. 이 과정에서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도출하는게 가능해지지. 대체역사물을 독자가 읽는 이유는 전통을 정확하기 알기 위해서가 아냐. 현대 한국인의 관점으로 과거 한국인의 한계를 보고, 그걸 비판하고 넘어서서 더 아름다운 미래에 도달하는 모양을 보기 위해 읽는거지. 하지만 한국라노벨은 전통을 쥐고도 본격적인 대체역사물에 도달하지 못했지. 


 여기에 더해서 이문화교류물이라는 장르도 포착하지 못했음.

 00년대 일본라노벨에서 이문화교류물은 상당히 메이저였던 장르지. 온갖 민족, 종족이 뒤섞여 등장해 어지러움을 자아내는 이문화교류물은 기존에 상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유형의 캐릭터를 만들어냄. 그것이 무한한 모에속성으로 확장되었고. '이문화에 대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빼버리고 이미 완성된 모에요소만을 그대로 떼와서 소설을 내니 한국만의 모에속성이 나올리가 없음. 일본라노벨의 인기요소 중 하나가 '다른나라의 동갑내기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사는구나'라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라는 것조차 포착하지 못한거같음.


 여기 더해서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한국 실정에 맞게 재해석하는데 실패함.

 한국라노벨이 등장한 건 10년대로, 과거에 비해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했음. 이런 수평적인 관계들이 학교에서 어떤 문제를 만들어내고, 학생들이 이로 인해 어떤 고뇌를 하고 있는지 이를 포착할 필요가 있었는데 00년대 일본라노벨의 교사-학생 관계를 그대로 이식해버림. 이러면 한국 학생들은 '이것은 내 이야기야!'라는 생생한 느낌을 받기 힘들지.


 이건 고전소설작가 귀여니가 작가 활동 후반기에 했던 실수와 똑같은 모양새야. 귀여니는 문장력은 형편없었지만 학생들의 생활과 언어습관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대히트를 쳤던 학원로맨스 소설가였지. 하지만 귀여니는 나이를 들고 그 어떤 히트작도 내지 못했어. 왜냐면 귀여니는 학원물을 쓰는 작가임에도 지금 학생들이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무슨 매체로 소통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고 연애의 형태, 감정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더 이상 탐구하지 않았거든. 계속 자기가 경험한 10대시절을 소설로 쓸 뿐이었지. 귀여니의 10대시절에 공감할 수 있는 10대 청소년은 이미 세상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데 말야.

 이러다보니 한국라노벨은 독자 연령대가 조금 높아져버림. 초등학생 중학생 독자는 적고 10대 후반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작품을 보게 된거지. 이래서 한국라노벨에서는 '성적인 아슬아슬한 요소'가 매우 중요해져버림. 고등학생이면 이미 성적으로는 성인과 마찬가지라서 야한 것에 대한 수요가 강하기에 이를 제공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럴거면 걍 19금을 내는 라인업을 하나 더 만드는게 더 독자 입장에서는 화끈하고 좋은거 아닌가? 왜 이렇게 애매하게 10대 후반만 공략하려 하지? 하는 느낌도 좀 들긴 하더라. 하지만 이건 출판사도 어쩔 수 없었을거임. '라노벨 출판사'라는 정체성이 독이 되어버렸거든. 라노벨은 10대를 위한 소설이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한 바람에, 라노벨 출판사가 성인물을 뽑기 시작하면 '10대 버린거냐' 소리 듣기 딱 좋은거야. 이 때문에 성인독자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못하고, 한국라노벨 읽던 고교생 독자들은 성인되자마자 쿨하게 떠나가버리고, 이렇게 독자층이 계속 줄어들어갔다고 봄. 그러다 사라진거지.


 결론을 정리하자면


 1. 한국적 라노벨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라노벨 생산자층의 입장을 대표한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

 2. 하지만 라노벨 생산자층은 그 선언에 사로잡혀, 한국 청소년이 공감할 문학을 생산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3. 이미 완성된 수준에 있는 일본라노벨 퀄리티, 그걸 뛰어넘는 한국 라노벨을 처음부터 뽑으려 했기에 실패했다. 한국 라노벨은 먼저 일본 라노벨 시장에서 시도된 장르적 시행착오를 빠르게 답습하여 한국라노벨 생산자층 역량을 성숙시켰어야 했다. 

 4. 라노벨이 청소년을 위한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못 벗어나서 성인장르로써의 라노벨 시장을 개척할 기회도 잃어버렸다.


 이렇게 자승자박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진 문학이 바로 '한국적 라노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