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12일

세 번 만에 태어났다.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던 아빠는 오지 않았다. 친구에게 '아이가 태어났으니 잠깐 가게를 봐 줘' 라고 하고, 다른 친구와 술을 먹으러 갔다.

엄마는 나를 혼자서 낳았다.


2000년 8월

엄마가 집을 나갔다. 


2000년 11월

아빠가 엄마를 끌고 집에 들어왔다.


2002년 3월

아빠와 수족관에 갔다.

아빠와의 유일한 행복한 기억.


2006년 5월

나는 개구쟁이였다. 행복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밝은 아이였다.


2008년 3월

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는 6학년생 누나가 목에 초콜릿이나 사탕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줬다.

포장지가 알록달록하게 빛나는게, 너무 예뻤다.

입학식이 끝난 후, 가족끼리 다같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맛있게 짜장면을 먹는데, 다 먹은 아빠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던게 기억이 난다.


2010년 3월

친구들과 여기저기 골목길을 쏘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2010년 7월

다시 엄마가 집을 나갔다.

나, 엄마, 아빠, 할머니 이렇게 네명이서 같은 집에 살았는데

엄마는 남이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는걸 싫어했고

할머니는 틈만나면 집 청소를 해댔다.


엄마는 몇번이나 몇번이나

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안했다.

결국 대판 싸웠고 기절하는 척 연기하며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통에

아빠는 자신의 엄마가 그러는 꼴을 견디지 못했고 엄마를 때렸다.

집을 나간 엄마는 다시 끌려왔다.


2012년 4월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같은 반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운동장에서 먼지가 나도록 맞으며 얼굴 반쪽이 전부 모래알과 돌에 긁혀 짓뭉개졌다.

오른쪽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 투성이가 되었다.

이 즈음에 아빠는, 엄마와 아빠가 자는 안방에 CCTV를 달아 그걸 거실 TV에서 볼 수 있게 한걸 내게 자랑스레 이야기하며 보여주었다.

며칠 뒤에 나는 TV로 엄마와 아빠가 섹스하는걸 보았다.


2012년 6월

전학을 갔다.

그러나 왕따는 끝나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 더럽다는 이유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고 주모자를 포함하여 학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흔히 말하는 바이러스 놀이를 했다. 아이들에게 닿기만 해도 소리지르거나 울었다.

처음으로 수업을 빠져나가 옥상에 앉아있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들켰고 심리 치료 비슷한걸 시작했다.


2013년

계속 왕따를 당했다.


2014년

중학교로 올라가서도 왕따는 끝나지 않았다. 같은 동네 아이들이었기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자연스럽게 왕따가 되었다.


2015년 4월

급식 시간에는 주로 화장실에 있었다.

몸무게가 12키로나 빠졌다.

수업 내내 자는척했다. 공부는 손을 놓았다.

나를 챙겨주던 반장이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오랜만에 허기진 배를 가지고 밥을 먹으러 가자, 다른 친구가 '저새끼 왜 데려왔어' 라며 내 면전에 대고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 뒤로 나는 두번다시 학교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다.


2015년 5월

엄마가 갑자기 나를 차에 태웠다.

너는 무슨 일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라면서 할머니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노래방에서 도우미와 떡을 쳤다고 한다. 심지어 번호도 교환해서 카톡을 주고 받은걸 엄마가 봤다고 한다.

나는 이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걸려서 가출했다.

학원도 많이 다녔다.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면 너무도 피곤했다. 몇번이고 죽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옥상에 가서 뛰어내리려고 한 것도, 학원을 째고 집에 와서 목을 닦고 칼을 손에 쥐고 목에 대고 있던 것도

아무도 모른다. 


2015년 6월

둘은 이혼했다.

나는 이때쯤부터 정신병이 생겼다. 인터넷 속 씹덕 사이트에서 무수히 많은 거짓말과 병신같은 짓을 하며 사람들을 괴롭혔다.

밤새 핸드폰을 하고 자위를 한 뒤 학교에 가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엄마는 돈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빠가 운영하던 학원도 망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에게 세 번 째로 버려졌다. 엄마와 아빠는 숫자 3과 연관이 많은 것 같다. 내 앞에 둘이서 낙태한 아이도 두명이나 있으니.

나는 그렇게 엄마가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빠와 할머니와 함께 반지하에 버려졌다.


2016년 3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있어보이는 척 친구들에게 담배를 피운다고 허세를 부리다 드디어 왕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외로웠다.


2017년 5월

아빠가 또 나를 때렸다.

요즘 맞지 않는 날이 많이 없다.


2017년 6월

아빠가 넌지시 물었다.

할머니랑 둘이서 잘 지낼 수 있냐고. 아는 학원에서 소개가 왔는데, 거기서 일 하면 한달에 1200 정도는 벌 수 있을거라고 했다.

근데 자기는 가기 싫대서 내가 꼭 가서 돈 많이 벌어와달라고 했다.

아빠는 또 날 때렸다. 아빠는 MBC에서 보조업무를 하며 일한다. 영화 감독이었던 때를 잊지 못한다.


2019년 1월

성인이 되고 아빠와 술 한잔 하는데

니 애미가 니 애미가 하면서 엄마 욕을 하길래 아빠를 드디어 때렸다.

쫓아나오며 안경 벗으라는걸 한대 더 때려주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길래 도망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와 함께 살았다.


2019년 2월

엄마, 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넷이 살았다.

간호 조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이때 처음으로 몸무게 100kg를 돌파했다.


2020년 6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고등학교때 친구들도 많이 정리했다. 이제 주변에 남은건 진짜 친구들 밖에 없다.

드디어 봄이 오나 보다. 빨리 군대를 갔다 와서 병원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

하루에 12시간씩 실습을 뛰고, 불법으로 월급 100만원을 받지만 행복하다.


2020년 11월

군대에 입대했다.


2021년 9월

역시 나는 병신인것 같다. 군 생활도 도저히 맞지 않는다.

매일같이 혼나고 부대 분위기를 병신같이 만든다.

죽고 싶어서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으려다 참았다. 간호조무사는 이런 이력이 있으면 일하지 못하니까.

자살 시도로 상병 전역을 하면 사람들이 왜 그랬냐고 물어볼테고, 취직이 어려울테니까.


2022년 3월

아빠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 죽는다.

그 첫마디가 쓰여진 편지에 나는 금연하던것도 실패하고 휴가를 떠났다.

아빠는 암이라고 한다. 후두암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매일같이 소주를 3병 이상씩 마셨고, 담배도 하루에 두갑 이상씩 피웠으며

수차례 금연하고 금주하라고 했지만 말을 들어먹질 않던 양반이니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빠는 그 사실을 몰랐었나보다.

오랜만에 본 아빠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늙어 있었으며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있었다.

간병해주었다.


2022년 5월

전역했다.

그리고 아빠를 간병했다.

그때 왜 그랬냐고 말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인지, 죽어도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아빠를 간병했다.

아빠는 수술을 받았다.

죽는것이 무섭다고, 수술 이후 5년 생존률을 들먹이며 병신처럼 살 바에는 그냥 죽는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나는 자식으로써 대체 어떻게 죽으라는 말을 하겠냐며 울며불며 수술 받으라고 했다.

아빠는 알았다고 했다.


2022년 6월 8일

송해 선생님이 별세하신 날에

내 아빠는 죽었다.

화장실에서 똥을 싸다가 죽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는데, 대체 왜.

아빠를 불태워 다시 죽였다. 용인 천주교 추모공원에 아빠를 묻었다.

엄마는 아빠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내가 모든 것을 도맡아 했다.

서류 정리부터 장례식 상주, 간병까지. 유산 정리도.

아빠가 죽기 전에 서울 LH 영구임대 아파트 받아놓은곳에 살았다.

나도 여기를 상속받아 살라며, 서울 한복판에 집세 10만원인 집 없다고 이야기했다.

아빠는 빚이 천만원 있었고, 폐차비 포함 계좌를 전부 정리하면 600만원이 되었다.

군 적금을 엄마에게 생활비로 쓰라고 주지 않았더라면 한번에 갚을 수 있었을텐데, 외할머니에게 빌려서 갚자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고, 23살, 무직 백수 고졸 빚 1000만원으로 인생을 시작했다.


2023년

나는 죽은 아빠의 집에 산다.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단 하루도 그러지 않은 날이 없다.

엄마에게 600만원을 송금했는데 그걸 엄마가 생활비로 다 썼다고 한다.

우편이 왔다. 빚 천만원을 일시불로 갚아야 할 기한이 다가온다고 한다.

엄마에게 전화하니 나한테 돈달라고 하는 소리냐며 끊으라고 화를 냈다.

인터넷에 죽는 방법을 검색했다.

나는 그렇게 고아가 되었다.


2024년 4월 23일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약도 효과가 없다.

야간 편의점 알바를 주 3일 나간다. 기초생활 수급자를 유지해야 영구 임대 주택 아파트에 살 수가 있기에

내가 한 달에 벌 수 있는 돈은 120만원 가량이다. 그마저도 생일인 5월이 지나면 90만원으로 줄어든다.

이제 정말 직장을 구해야 한다.

근데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의사가 그랬다. 자기가 의사 생활 하면서 본 환자들 중에 나만큼 힘든 사연을 가지고 온 사람이 손에 꼽는다고 한다.

도박, 술, 강박. 이 3가지 빼고 전부 사회적 시선, 불안, 우울 등... 안좋은 것들의 수치가 높다고 한다.

남들이 뛰거나 하다못해 걷고 있을때 너는 기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매일 침대에 눕기 전에 죽음을 바란다. 자고 일어났을때 세상이 멸망해있었으면 하고 소원을 빈다.

로또에도 의지한다. 이번엔 당첨될거야, 이번엔... 이라며 한 주를 버려온 지 1년이 지났다.

집은 배달 음식 쓰레기로 허리춤까지 차올랐고, 베란다는 아무렇게나 버린 쓰레기 봉지들로 꽉꽉 들어차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글을 쓴다.


이건 어느 소설가의 이야기.

나는 어느 소설가.

이건 나의 이야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