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용사라 불렸던 여인은, 작은 단검에서 오러를 끌어냈습니다. 평범한 강도에 비해 너무나도 거대한 힘에 노출된 나머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떨렸지만, 그건 그녀가 원하던 바였습니다. 이걸 단숨에 심장에 꽂아넣고, 오러를 견디지 못한 단검이 안에서 폭발하면 제 아무리 강대한 용사의 육체라고 한들 확실하게 죽을 수 있겠죠.


박살이 난 건물을 사이에서는, 어떤 초능력자가 쏟아져 내리는 비를 맞으며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이 나간 듯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검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 겨누었습니다. 손가락 끝에 모여드는 심상치 않은 붉은 에너지는, 고통을 느낄 새조차 없이 그의 머리와 생명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키겠죠.


천장이 무너져 내려 위가 뻥 뚫린 어느 신전에서는, 다 부서져가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기도를 올리는 성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한나절동안 기도를 올리고는 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들어올린 성배에는, 과거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학자가 만든 극독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걸 들이키면 제 아무리 언데드조차 경악하는 재생력을 지닌 그녀라도 시간은 조금 걸릴지언정 삶을 끝마칠 수는 있을겁니다.


그리고 텅 비었지만 그런대로 멀쩡한 우주선의 함교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들 사이에 파묻힌 함장은, 다 마셔버린 보드카 병을 몇 번 흔들다 내던져 버렸습니다. 부서진 병의 조각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그는, 제복 안주머니에서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대구경 리볼버를 꺼내들었습니다. 귀한 것이니 관상용으로만 끼워 두라고 선물받은 단 하나의 총알을 장전한 그는 망설임 없이 총구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생애 마지막 안주거리가 된 골동품 총알은 그의 숨을 끊어놓기에 충분할 겁니다.


인생 한번 참 좆같다고, 세상도 언어도 모습도 다른 네 명은 같은 생각을 하며 자살을 기도하려 했습니다...만.


눈앞이 번쩍이더니 어떤 함장의 눈앞에서 난데없는 사자대면을 하게 된 나머지, 자살을 실행할 겨를도 없이 얼빠진 한 마디만을 서로 다른 언어로 동시에 내뱉었습니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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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원치 않은 건 아니지만 예기치는 못한 단체 모임을 갖게 된 네 명은, 뻘쭘하게 각자의 자살 도구(?)들을 거두었습니다. 날카로운 오러가 치솟던 단검은 오러를 잃자 날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검지에 모였던 에너지는 흔적도 없이 흩어졌습니다. 독이 든 성배와 낡은 권총은 얌전히 바닥에 놓였습니다.


"어...안녕하세요?"


최근에는 항상 이를 갈며 험악한 얼굴만 하고 다녔지만 그래도 본래는 나름 예의바르고 활발한 아가씨였던 전직 용사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초능력자와 함장의 눈에는 왠 코스프레를 한 금발의 미녀가 인사를 건넨다는 굉장히 기이한 상황이라 둘은 그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성녀는 성직자답게 합장을 하며 마주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주신 하레테리아의 종, 타시아입니다."


"어, 음. 전 유선우에요. 별다른 수식어는 없지만..."


여전히 현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인사를 받았으니 예의를 지키기 위해 초능력자가 말했습니다. 혼자만 침묵을 고수하기에는 뭐해진 함장 또한 몸 속 나노머신을 조작해 취기를 떨쳐내고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인류연합군 4군단 기함, '테라'의 함장 조지 윈스턴입니다."


"전 유리스 체르트에요. 용사...라고 말하면 무슨 직업인지 아시나요?"


"......"


다들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고 나자, 다시 한 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사실 서로 사는 세계부터가 달랐던 네 명을 냅다 같은 공간에 던져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를 기대하는 게 잘못이겠습니다만.


그들은 이곳에 모은 '누군가들' 에게는 별로 상관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이들이 대화나 나누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이야기를 나누는 데 미안하지만, 가줘야 할 곳이 있다.'


각자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네 명 전부가 기겁을 하며 일어섰습니다. 오러에 휘감긴 성검을 집어든 용사, 빛나는 교단의 문양을 쥔 성녀, 주변에 방어막을 두르고 오른손에는 화염, 왼손에는 냉기를 그러모으는 초능력자, 그리고 신경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켜 한동안 잠들어 있던 함선의 내부 무장들을 가동한 함장 모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맞서 싸워줘야 할 적들이 있다. 한시가 급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나누도록 하지.'


"맞서 싸우라니 갑자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걱정 마라. 일단 가서 그들을 만나면 우리가 말리려 해도 싸우려 들 테니.'


자기 할 말만 하는 '목소리'에 화를 낼 겨를도 없이, 네 명 모두가 빛에 휩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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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번이나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보내진 네 명은 같은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졌습니다.


전직 용사, 유리스는 고함소리와 무기가 부딫치는 소리가 가득한 전장 한복판에.


성녀, 타시아는 다 무너져가는 건물들밖에 없는 한 때는 마을이었던 황야에.


초능력자, 유선우는 도망치는 민간인들과 그 사이사이로 움직이는 병사들로 혼잡한 도시에.


함장, 조지 윈스턴은 주변에 사람 하나 없는 산맥 위에 우주선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서로의 세계가 멸망하는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답게, 네 명 모두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히 주변 상황을 둘러보고 행동 방침을 정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과연 자연에서 저런 것이 탄생할 수 있나 의문이 들 정도의 기괴하고 흉측한 모습을 한 괴물 무리를 목격한 순간, 그들 전부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습니다.


용사의 성검에서는 맹렬하고 흉폭한 검기가 터져나와 전장을 가로질렀습니다.


성녀의 징표에서 쏘아진 강렬한 광선에 주변 건물의 잔해와 자갈이 녹아내렸습니다.


초능력자가 휘두른 팔에서 방출된 무형의 거대한 충격파에 괴물과 함께 땅이 가라앉았습니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발사된 수많은 미사일이 명중하자 산맥이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혼란스러움 대신 증오와 살의가 가득 찬 그들의 입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 번 같은 의미의 말이 나왔습니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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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유일한 생존자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이끌려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한 공통의 적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는 스토리. '어떻게 하면 생면부지의 타인이 다른 세계를 위해 목숨도 걸고 싸우게 만들 것인가' 에서 원래 적대하는 상대면 알아서 죽이려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만든 소재임.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고 홀로 남아버린 이들이 고독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하기 직전에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해줌+자기들 세계를 끝장낸 원수와 싸우게 해줌 정도면 알아서 찢어죽이려고 나서지 않을까?


여러 차원을 동시에 침략하는 '적'은 과연 누구인지, 이 네 명의 세계가 각자 어떻게 멸망했는지, 나중에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합류할 이들은 있는지, 그리고 모든 걸 잃은 이들이 끝내 복수에 미쳐버린 광인으로 전락할지 아니면 다시 한 번 원래 자신들의 모습처럼, 영웅으로서 일어설지 좋은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 있음.


이런 묵직한 맛의 판타지+복수극+차원유랑물 누가 써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