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레벨디자인과 억까요소로 악명높은 하드코어 RPG



플레이어는 마왕 토벌을 위해 구성된 토벌대의 구성원 중 하나를 선택해 조종하게 됨


개중에는 가지지 못한 자처럼 고인물용 캐릭터도 있고, 초보용으로 설계된 고성능 캐릭터도 있음


그러나 어떤 캐릭터든 억까에 고통받는 것은 마찬가지.


잡몹을 상대하다가 방심해서 사지가 날아가는 건 다반사, 진짜 운이 나쁘면 그냥 길가다가 뜬금없이 독버섯에 스쳐 사망해버리기도 함


심지어 온갖 억까를 이겨내고 마왕을 토벌해도, 기다리고 있는 건 뒷맛이 찝찝한 배드엔딩 뿐



진엔딩을 보려면 마왕을 처치한 뒤 마왕성의 지하실을 열고 들어가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데

또 이 지하실을 열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자들의 영혼(=동료들의 영혼)이 필요한 거임


즉, 진엔딩을 위해서는 엔딩 직전에 모든 동료들을 제 손으로 살해하고 혼자 마왕과 맞서야 됨



그런데 다른 동료의 앞에서 동료를 죽이려 들면 그 자리의 모든 동료들이 적대하게 되어 다구리를 맞는 기믹 때문에


진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존나 더러운 기분으로 정든 동료들을 하나하나 암살해야 함

(전투 도중 실수인 척 동료를 함정에 밀어버린다거나, 음식에 독을 탄다던가, 밤중에 암살하는 등)





그리고 그런 정신나간 게임에 빙의하게 된 고인물 주인공


게임 빙의물 클리셰대로 상태창을 열지만, 거기에 있는 것이라곤 ‘진엔딩을 보면 돌아갈 수 있다’는 불친절한 지시 뿐.


불합리한 현실 앞에 절망하지만, 끝내 마음을 굳게 먹고 진엔딩을 보기로 다짐함



프롤로그를 착실히 마친 주인공은 마왕 토벌대에 무사히 합류하고, 그렇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됨


물론 마왕 토벌 따위는 뒷전이고, 주인공의 머릿속은 오로지 마왕성 도착 전까지 모든 동료들을 암살할 생각 뿐.


그래도 나름 고인물로서 진엔딩을 몇 번이고 클리어해본 주인공이었기에, 자신의 죄책감만 어찌 하면 어렵지는 않은 작업일 것이라 스스로를 격려하는데…



존나 이상하게 동료들이 죽지를 않는 거임


실수인 척 수풀 속의 가시 함정에 밀어버려도 벽을 기어올라 살아남고


즉사 판정으로 악명높은 독버섯을 실수인 척 던져버려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쳐내고


게임에선 픽픽 죽어나갔던 새끼들이 악착같이 살아남아 한 놈도 뒤지지를 않는 거임.


오히려, 동료들이 원작에도 없던 개트롤 실수들을 연발하는 탓에 반대로 주인공이 제 목숨을 걱정해야 할 지경.




주인공은 갑작스레 상승해버린 난이도에 의아해하지만, 아마 게임이 현실이 되며 생긴 보정 같은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김.


그렇게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내쉬며, 동료가 타준 차를 들이키는 주인공.


그 차가 사실은 악명높은 독버섯으로 우려낸 극독이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그는 오늘도 동료들을 암살할 궁리를 하며 잠에 듬.



밤중에 몰래 다가온 그림자가 뼈톱으로 목을 잘라버리려다 실패하고 돌아간 것도,


그 다음에 다가온 그림자가 흑마법으로 즉사 저주를 내리다가 실패하고 다시 이불 속에 기어들어간 것도.


그 무엇도 깨닫지 못한 채


그는 그저 새근새근 얌전한 숨소리를 울릴 뿐이었음.







사실 이 게임 속 세상에 빙의한 고인물은 주인공뿐만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 모두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되어서 토벌대에 함께하고 있던 것이었음.


그리고 그들 또한 똑같은 지시를 받고, 진엔딩을 위해 매일같이 동료들을 암살할 수작을 부리고 있었음.




사냥꾼이 매일같이 독을 탄 요리를 동료들에게 대접하지만


이 고인물들은 이미 독요리에 대비해 독 내성을 만땅으로 올린 뒤였기에 마왕도 원턴킬나는 극독조차 맛있게 먹어치움



마법사는 전투에서 덤벙대는 척 곧잘 아군에게 파이어볼을 날리지만


이 고인물들은 이미 개억까 화염 함정에 대비해 샐러멘더의 가호를 받은 뒤라 멀쩡하게 불속에서 걸어나옴



전사는 매일밤 몰래 일어나 자고있는 동료들의 목을 베어버리려 하지만


이 고인물들은 이미 좆같은 절단 패턴에 대비해 절단 상태 방지 장비를 구비해둔 뒤라, 아침에 일어나면 쓰레기통에 부러진 뼈톱만 수십개가 쌓여있을 뿐임



성직자는 동료들에게 힐을 해주는 척, 흑마법으로 그들에 즉사 저주를 내리지만


이 고인물들은 이미 즉사 패턴에 대비해 즉사를 1회 방지해주는 언데드로 종족변경한 뒤라, 흑마법이 오히려 진짜 힐로 작용해버림




그런,


이미 마왕은 안중에도 없고 호시탐탐 서로를 죽일 기회만을 노리는 고인물들의 이야기.


중간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만, 설마 동료들이 빙의자일 것이라는 생각만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성실하게 암살을 이어가는 눈새 용사들의 이야기.


결국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마왕을 가뿐히 쓰러뜨리고도, 꾹 닫힌 지하실의 문 앞에서 서로 뻘쭘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빡대가리들의 대환장 파티.


그런 골때리는 착각물이 보고싶구나…





피앤헝2 보다가 갑자기 든 생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