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바보같은 생각이다. 영웅의 서사가 멋지지 않다면 대체 누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까?


나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눈앞의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 안에는, 갑옷을 입은 여성이 함성을 지르며 괴물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하!"


기합소리와 함께 내지른 호쾌한 횡베기에, 사람 키의 두 배는 되는 외눈박이 거인의 머리가 단숨에 몸에서 분리된다. 그녀가 당당하게 검을 치켜들자, 사기가 한껏 오른 주변 기사들이 그녀를 따라 함성과 함께 돌격한다.


군대와 군대가 충돌하고, 이내 혈육이 낭자하며 사람과 괴물이 어지러이 뒤엉킨다. 수많은 괴물과 인간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기사들의 선봉장 격으로 보이는 여인은 당당하게 눈앞의 적들을 베어넘기며 진격했다.


"숙여라!"


여인은 자신 근처의 기사들에게 명령하더니 검을 두 손으로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곧 검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나왔고, 휘둘러진 빛은 괴물 무리의 절반 이상을 단숨에 몰살했다. 하지만 그 파괴력 만큼이나 체력 소모 역시 극심했는지, 여인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는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허억..."


"단장님을 따르라! 물러서지 마라!"


사기를 유지하려는 기사들 주변의 외침을 들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한 번 검을 치켜들어 빛을 내뿜었다. 전술적으로만 보면 효율적이지 않지만, 무리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에는 썩 괜찮은 쇼맨십이었다.


하지만 기껏 체력 소모를 감수하고도 보여준 기교가 무색하게,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사기는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 아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인영이 다섯 정도 떨어지자 순식간에 나락으로 처박혔다. 새로이 나타난 거인들은 적어도 건물 6층 이상의 키를 가진, 내가 보아도 저들이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을 내뿜는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무리를 이끌던 여인마저도 눈빛이 흔들렸다. 다른 이들을 모두 등지고 있었기에 주변의 기사들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화면 밖의 우리들은 그녀의 눈에 절망이 비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


무의식적으로 나온 소리에 기사들의 주의가 쏠리자, 그녀는 실수했다는 듯 얼굴을 굳히더니-


"으아아아아아아!"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물론 클로즈업 된 화면에서 그녀의 떨리는 손이나 다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은 채 다시 한 번 저들을 향해 맞서 싸우려는 모습은 우리가 보아도 제법 멋지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기 출격 준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계기판을 조작했다. 내가 계기판을 조작하는 동안, 화면 속 기사단장은 먼저 앞으로 걸어나온 가장 거대한 거인에게 도약했다. 거인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마치 경공을 연상하게 하는 듯한 움직임과 함꼐 공중에서 다시 한 번 도약해 거인의 팔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크로우 1, 이륙."


"크로우 2, 이륙."


"크로우 3, 이륙."


"크로우 4, 이륙."


버튼을 누르자 신형 무인기가 굉음을 내며 활주로에서 날아오른다. 이륙을 확인한 나는 다시 조종용 화면으로 전환하고는, 화면 속의 여성이 기어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 빛나는 검으로 그것의 목에 기다란 상처를 내는 것을 보았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거인에게서 내려와 석양을 등진 채 웃어보이는 그녀의 당당한 미소는 과연 매력적이었다. 그녀 본인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인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그녀의 서사를 꽤 많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완전무결한 무적의 용사는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녀 역시 가끔 패배한 적이 있었고, 밤에는 악몽을 꾸거나 아예 잠들지 못한 채 흐느끼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도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그녀를 바라볼 때면, 어떻게든 불굴의 영웅을 연기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나름 감동했다.


그리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꽤 많은 것들은 가능하게 한다. 창작물이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매출이 오를 것이고, 다큐멘터리라면 모금을 모아 사연의 주인공들에게 금전적 도움을 줄 수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엉덩이 무거운 지구인들이 어느 날 모두의 눈앞에 나타난 화면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보다 못해 결국 평화유지군 정도는 파견하도록 설득할 수도 있을 테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군을 돌아올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전장에 내몰긴 어렵소. 하지만 원격 화력지원과 민간인 구호 정도라면...시도해보지. 전원, 블랙페더 미사일 발사 준비."


이제 화면 속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머지 4명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녀 자신도,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다. 이제는 뒤에 기사들도 조금씩 눈치챌 정도로 대놓고 덜덜 떨리는 팔다리는 이미 그녀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블랙페더 발사 준비.""""


"발사!"


""""발사.""""


하지만, 화면 속 그녀의 뒤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들은 그녀가 돌격할 시간도 주지 않고 거인들의 몸뚱이에 직격해 폭발했다. 불길에 휩싸인 채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거인들을 본 기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비행하는 무인기를 바라보고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강시현 대위."


"네. 그...크바센토 씨?"


연결되었다. 이제 그대는 저 여기사...페레니아에게 말을 걸 수 있을것이다.


"크흠. 어...페레니아 씨?"


?! 당신 누군데 내 머릿속에서 말을 하는 거야?


"일단 그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들 여러분 편이니까 부수지 말아달라고 전해줄래요?"


당신 누구냐니까?!


"제발요. 그것들 엄청 비싼 것들이에요."


...알았어. 일단은.


"그것들은 일단 내버려둬라! 아직 적들이 앞에 있다!"


화면 속의 그녀가 소리치자, 기사들은 즉각 무인기들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괴물의 군세에 집중했다. 그녀는 굉장히 큰 신뢰를 받는 상관인가보다.


"고마워요."


그래서, 당신은 누구야? 저것들은 뭐고?


"어, 그러니까...지원군?"


...어디 사는 누군데 지원을 와? 당당하면 내 앞에서 얼굴이라도 비추지?


"아 그러니까...하 씨, 왜 하필 나냐고."


미안하군. 통역의 기적에 가장 적합한 것이 그대였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상황 설명용 대본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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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성좌물과 비슷하게, 이계의 신이 용사의 서사를 지구인 전원에게 송출해서 결국 마음이 움직인 여론에 의해 국제연합 평화유지군 정도는 보내기로 한 이야기. 


성좌물과 다른 점은 후원이니 코인이니가 아닌 무조건 지구인들 본인이 직접 나서서 싸우러 가야 하는데, 다른 국가도 아니고 차원이라 일단 무인 화력지원 정도로 시작하게 되는데 용사의 파워업이랑 화면송출에 모든 힘을 꼴박한 나머지 힘이 다 떨어져서 가장 적합도가 높은 주인공 한 명한테만 의사소통 능력을 준 스토리임.


무섭고 힘들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끝없이 극복해내는 영웅의 서사를 보고 감화된 지구인들이 결국 천천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고 그 와중에 주인공은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는 그런 소설 누가 좀 써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