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게임에서 컨셉질을 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어딘가 비틀린 사람들이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고작 게임. 비참한 말로라고 해도 커뮤니티에 박제되어서 조리돌림 당하는 것 이상을 겪을리가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인생이라는 것은 생각대로 굴러가는 법은 없었고, 늘 조져지는 쪽은 나였다.


황량한 대지. 공허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오브젝트가 없는 땅에는 오직 성채만이 우뚝 솟아있었다. 


모니터 속에서만 봤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긴 내가 게임에서 마지막에 있었던 맵이었다는 걸.


황량한 대지에 홀로 서있는 거지꼴의 남성이 캐릭터의 육신을 뒤집어쓴 나라는 걸.


"유희 속으로 들어오다니, 그거 참 신기한 일이로군."


말투는 왜 또 이래. 


*


망할 게임 속으로 들어온지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어차피 집도 없겠다, 고성에 눌러앉아 시간을 축내며 지냈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고, 나름 알아낸 것도 있긴했다. 그건 바로 내가 캐릭터의 모든 것을 계승했다는 것.


퀘스트 진척도, 스펙, 그리고 채팅창에 싼 똥에 가까운 컨셉질까지.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은거기인 같은 흔해빠진 컨셉, 아니 지극히 정상적인 컨셉질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애기븝미 같은 것에 꽂혀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컨셉질을 했다면 자살했을 수도. 아니 분명 자살했을 거다.


TS애기븝미쟝이라니, 그거 완전 능욕물 같지 않은가? 아님 말고.


"심심하군."


반년이 지나도 영 적응이 안된다. 개틀딱 같은 말투라던가, 아무도 없어 쓸쓸한 성채 같은 것들 말이다.


캐릭터에 빙의되면서 컨셉대로 시끌시끌한 것보단 고독을 즐기게돼서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익숙한 것도 아니라서.


이변이 없다면 오늘도 혼자서 붕쯔붕쯔 검술 연습이나 하다가 잠이나 자겠지.


"울적하군. 연습은 여기... 음?"


간절히 바라니 이루어준건가. 뭣도 없는 땅에 사람이 올 줄이야. 복장을 보니 귀족 영애 같은데.


"오호호! 드디어 사람을 발견했군요!"


아니다. 그냥 미친년인가?


*


그녀는 게임의 랭커이자 네임드였다. 랭커가 드릴 머리 귀족 아가씨 화법으로 말한다니, 누가봐도 이목이 확 끌릴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얼마나 컨셉질에 진심이었는지, 캐릭터 코디를 백금발 푸른 눈의 영애로 만든 것은 기본.


귀족하면 기사, 기사는 말을 타야 하는데 라이딩 스킬을 전투용으로 쓸 수 없는 게 마음에 안든다면서 기어코 라이딩 스킬을 전투용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비록 게임사의 불통 운영으로 아이템을 전부 갈아버리고 꼬접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유저들의 추억이자 우상이었다.


템을 모두 갈아버리고 꼬접을 한 탓에 당사자는 죽을 맛이었지만.


"꺄아악!"


템은 갈아버린탓에 게임에 빙의했을 때 사냥은커녕 살기 위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템을 다시 맞추기엔 이 세상에는 경매장 시스템도 없었고, 저렙템부터 다시 맞추기엔 레벨 격차 패널티 때문에 저레벨 장비는 드랍되지도 않았다.


이게 그녀가 황폐한 땅의 고성까지 오게된 이유였다.


"...그러니까, 가문에게 추격당하고 있는데 몸을 숨기려면 여기가 제격이라는 건가?"

"후후, 그렇답니다."

"민폐로군. 꺼져라."


무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렸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받아줬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이해는 가도 조금은 억울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자신이 한 말은 컨셉질의 영향으로 제멋대로 튀어나온 설정일 뿐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말투가 이상하게 변한 것도 짜증나는데, 입이 제멋대로 있지도 않은 일을 내뱉는게 그녀로서는 미치고 팔짝뛸 노릇이었다.


가문의 추격이고 뭐고 이쪽은 잠시라도 머물 집이 없다고, 라고 일갈하듯 외치려 하면.


"크흠, 저는 가주의 직위를 되찾을 거랍니다. 당신이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추후에 충분한 보상을 드리지요."


이렇게 마음에도, 생각하지도 않은 말이 툭하고 튀어나와버린다. 


아니, 되찾을 가문도 없는데 주긴 뭘 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무사가 자신을 쫓아내도 문제, 받아줘도 문제 아니야!


"보상... 누굴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는군."

"이런 쓸쓸한 고성은 생각도 나지 않을 멋진 성과 사용인들을 붙여드리죠."


갸아악! 파멸의 주둥아리야 제발 멈춰...


"...일단 들어와라."


넘어왔어!?


으아아... 어쩌지. 성은 무슨, 가문도 없는데 이걸 들키면 바로 쫓겨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컨셉질인걸 들키지 않고 장비를 모으다가 충분한 준비가 되면 도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