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방공호의 안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장교는 생각했다.

여기엔 나 혼자밖에 없을까. 아무도. 그 누구도 제시간에 맞춰 이곳에 대피해 오지 못했단 말일까. 깜빡이는 전등과 콘크리트 분진. 흩날리는 먼지. 장교는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났다. 부디 고통이 없었길 빌었다.


아무도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다 되어서 그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단장 눈앞에서 핵미사일이 실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벙커의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바깥에서 벙커의 문을 열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가 문을 열지 않는 한 다시는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핵 전쟁이 시작된 이상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실수로 발사 버튼을 눌렀는지. 아니면 미사일을 의도적으로 쏘았는지. 모든 게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세상은 불타오르고. 윤회를 위한 소용돌이 속으로 모든 것들이 던져졌으니. 그는 자신이 다시 바깥에 나가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바깥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라는 것은 미친 듯이 지지직거리며 울리는 가이거 계수기다.

나가면 첫 분도 안돼 몸의 온 기능이 정지할 정도로 강한 방사능이 덮친 모양이었다. 어쩌면 놈들이 더티 밤을 사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화염이 그렇게 강해 보이진 않았다.


확실한 건 장교가 생각하기에 바깥은 지옥보다 더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겠지. 이게 인류의 멸망일지도. 끔찍한 상념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흐르지만. 그걸 막아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벙커는 한 사람이 굶어 죽기에는 빌어먹을 정도로 많은 물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사람들이 올 때까지.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기 전까지 기다리다 문을 닫았었다.

그런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됐다.


발전기는 다행히 잘 가동됐다. 기름으로 돌아가는 형식이지만. 앞으로 수년간 쓸 수백 갤런의 연료가 잘 저장되어 있으니 한동안 빛이 없어 미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장교는 그 사실에 위안을 가지기로 했다.


그렇게 수 년이 지났다. 바깥의 방사능 농도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어 옅어져 있었고. 가득 쌓여있던 담배와 술들은 본래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 장교가 기어이 손을 댄 후 금방금방 사라지고 있었지만. 본래 중요 인사 수십여 명이 올 벙커였기에 여유분은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마다 장교는 악몽을 꿨다. 늘 비명을 지르며 일어서고. 다시 술을 마셨다. 몸이 점점 망가지는 걸 그는 충분히 느끼고는 있었지만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 혼자뿐이지 않던가. 금방 죽든 말든 그는 정말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혼자였으니까.


그렇기에 장교로썬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할 건 아니었다.


"밖에 나가봐야겠어. 좋은 생각이지?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그래. 나도 알아. 멍청한 짓이라는걸."


길고 장황한 혼잣말은 지난 수년 동안 갈고닦은 그의 새로운 습관이었다. 이미 그는 반쯤 미쳐 있다고 보아도 이상할게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린 방사능 농도는 충분히 방호복과 방독면으로 감당이 가능한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주섬주섬 방호복을 챙겨 입고. 산소통과 방독면을 잘 점검한 후 밖으로 나섰다.

황량한 풍경. 벙커는 숲이 울창한 산속에 위치해 있었다. 그 산림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차디찬 눈인지. 화산재인 것인지 모를 것이 얕게 벙커와 주변의 모든 대지를 뒤덮고 있을 뿐.


주변을 둘러보려던 그의 발길에 무엇인가 기다란 것이 밟혔다. 그는 눈인지 뭔지 모를 것을 치우고 그것을 확인했다.


길고 가느다란. 뼈. 그것은 뼈였다. 그는 그것을 들어 살펴봤다.

짐승의 뼈가 아니다. 이건 사람의 뼈였다.


장교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니라고 되뇌었다. 아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시간에 맞춰 찾아오지 못했다. 그는 문을 닫았고. 다시 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그는 자신이 살던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산림은 불타 사라져 있고. 건물들은 무너져 파편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

방사능 측정기는 계속해서 시끄럽게 울린다. 남자는 세상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다.


정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을까. 마침내 남자는 고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끔찍했던 폭심지에 비하면 상황은 나은 편이다.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들이 많다.

챙겨두었던 군용 소총을 거머쥐고 남자는 마을을 확인하지만. 살아있는 게 보이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옛집에 찾아가 보았다. 

집의 형상은 멀쩡했다. 폭발의 영향에선 완전히 벗어나서 상태가 괜찮았다.

그날의 혼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깨진 유리창. 망가진 전화. 급히 무엇인가를 챙겨 나간 흔적


아무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니면 불운하게도.

그는 집 안에서 가족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도대체 어디로 떠나려고 했던 걸까. 그는 주변을 뒤지다. 상태가 매우 나빠 보이는 포스트잇 하나를 발견했다. 문가에 붙여놨던 것이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아내가 쓴 것이다. 분명하다.

그는 그것을 들고서 조심스레 들고 읽어보았다. 


여보. 저희 떠나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희 가족도 대피 대상이래요. 만약 집으로 찾아온다면. 북부 산맥의-


아니야. 그럴 리가. 거기까지 읽은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빌어먹을. 잘못 읽은 걸 거야. 그는 다시 내용을 확인하지만 아니었다. 거짓말이다. 아니야. 설마. 빌어먹을. 내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벙커까지 미친 듯이 달리다 돌아다니는 사람 무리를 보았지만. 그는 상관치 않고 총을 쏘아대며 그들을 위협하고. 벙커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이야기가 통하는 살아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거칠게 달린 탓에 방호복에 구멍이 뚫린 모양인지 다리부터 찬 공기가 느껴진다. 아직 방독면은 멀쩡하다. 신경질적으로 필터를 갈아끼운다. 하하하.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했지. 미친 듯이 웃으며 그는 방공호로 다시 달려간다. 


총을 아무렇게나 갈긴 것 같기도 한다.

웃어댄 거 같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한 것 같다.

그날 출근을 하기 전에 아내와 싸웠던 게 떠오르기도 한다.


빌어먹을 머저리. 쓰레기. 문을 닫는가. 그 고통스러운 아우성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문을 열라는 아우성이. 비명소리가.


"나.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저. 정말이냐고? 정말이야. 아무것도. 아닐까. 거짓말. 난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어. 그 울던 소리도. 비명 소리도. 헬리콥터 로터 소리도. 정말 아무것도 들은 게 없단 말이야!"


머릿속의 목소리들이 거짓말 치지 말라며 힐난한다. 아니라고 대꾸한다. 그는 벙커의 앞에 다다를 때까지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그는 벙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이 가만히 남아있는 상태로. 유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공호의 문 앞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떠날 때 살펴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공호의 문 앞에서 손톱으로 문을 긁어댔던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들의 숫자가 익숙했다. 분명 이 방공호의 입주자가 될 사람들과 얼추 수가 맞았다.


그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유해들을 하나 둘 맞췄다. 그리고. 숫자보다 더 많은. 두 유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붙어있는 유해가. 여성의 것과. 자그마한. 소년의 것.


그제서야 그는 기억 한편에서 묻어둔 것을 꺼낼 수 있었다. 그날. 

방공호 앞에서 들려오던 그 비명소리에. 울음소리에 끼어있던. 어떤 한 단어.

익숙하게 그를 부르던 목소리의 정체를.


그의 가족이다.


장교는 군모를 저 멀리 산맥 아래로 집어던졌다. 바람을 타고 그의 군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곤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거봐.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벙커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갔다.


벙커의 문은 그렇게 수십년 전과 같이 철그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나 하나 잠겨나갔다. 


벙커의 문은 그렇게 영원히 닫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