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이거 볼사람은 대충 각오하고 왔겠지만 암튼 잔인한 묘사 주의.*

구상 단계에선 최소 글자수는 넘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일부러 내용을 좀 더 추가했었는데, 쓰다보니 폭주 씨게 해버렸...

이래도 괜찮나 싶긴 하지만 최대 글자수 제한은 없으니까... 아마도...?

모르겠다 공미포 25000자 짜릿하다ㅎ

(+예전에 구상하고 갖다버렸었던 장편의 일부라서 짧은 장면에 세계관을 다 집어넣다보니 좀 설명충같은 부분이 있을수 있습니다)


***


어두침침한 창고를 밝히는 전등.

그 희미한 빛을 받아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을 내는 그의 머리카락을, 나는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는 연약한 꽃잎이라 믿었던 그것을.

이제까지 아물지 못한 베인 상처는 조용히 증오를 머금은 붉은 선혈을 떨어뜨렸다.

공기조차 무거운 침묵 속에 가라앉은 가운데, 서서히 뜨이는 눈꺼풀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한겨울의 호수처럼 투명한 푸른빛을 띄는 그의 눈동자에 깊은 혼란이 깃들었다.

어두운 창고, 밧줄로 묶인 양손, 그리고 눈앞에 서있는 나.

주변의 풍경이 하나하나 그의 망막에 새겨졌다.

서서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 위로 수많은 생각이 얕게 스쳐갔다.

수백 번도 더 상상했었다.


'언젠가 내가 너를 다시 마주했을 때, 너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을까.'


"...정말로, 살아있었구나."


내 독백에 화답하듯,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뭐?


이미 차갑게 얼어붙어버린 그의 호수는, 어느새 모든 감정을 두꺼운 얼음판 너머로 가라앉히고,

껍데기만 남은 미소를 내게 비추고 있었다.


***


나는 오늘도 새벽같이 찾아온 피터가 들뜬 목소리로 일으키는 소란에 잠을 깼고, 비몽사몽한 나를 잡아끄는 아이의 손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지나는 자리마다 머리 위로 늘어선 나뭇가지가 밤새 쌓아둔 차가운 눈을 흘려 잠기운을 쫓아 주었다.

이제야 서서히 숲길 위로 찾아들기 시작하는 새벽빛을 등진 채, 벌써 저만치 앞에서 맑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

차디찬 겨울 바람을 맞고서도 부드럽게 팔랑이는 금빛 머리카락은 자유롭게 설원의 하늘을 누비는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

머리카락과 같은 금빛을 품은 한 쌍의 눈동자가 언뜻 장난스러운 빛을 띄고 이쪽을 비추더니, 이내 생긋, 가볍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언제나 이른 아침부터 이러는 게 지치지도 않는 건지.

새파란 새벽공기 속으로 지친 숨을 내뱉는 나를 향해 그가 손을 뻗어왔다.

나는 그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며 마주 손을 뻗다, 문득 피터 옆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케이티는?"


늘 그의 옆에 붙어 다니던 나이차 많이 나는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응? 아, 오늘은 피곤하대서."


"뭐...?"


별 일 아니라는 듯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빠지고 싶다고 했을 땐 울고불고 난리를 쳤으면서?!'


이건 차별이야.

내게도 늦잠을 잘 권리가 있어!


"그, 그럼 나도...!"


"누나는 나랑 약속했잖아."


"윽."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단정짓는 피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실수였다.

작년 이맘때에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해 혼자 침울하게 앉아 있던 아이를, 나는 지나치지 못했었다.

그를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감당 못할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해에는 누구보다 많은 꽃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함께 찾아주겠다는, 다르게 말하면 그가 만족할 때까지 이 끔찍한 새벽 등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


우리처럼 작은 산골 마을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분주해진다.

어떤 노부부는 추운 겨울날 이웃과 온기를 나눌 소박하지만 따스한 음식을 준비하고,

누군가의 어머니는 반짝이는 순수함을 간직한 아이들을 놀래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선물을 숨겨두었으며,

아이들은 예쁜 장식으로 집 곳곳과 트리를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이것은 작은 마을이 다가오는 특별한 날을 맞이하는,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정경이리라.

다만 한 가지, 우리 마을에서 사용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조금 특별했다.

'루시아'.

차가운 겨울 숲을 비추는 한 줄기의 빛을 품은 꽃.

꽃잎 사이사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옅은 마력 때문인지, 그 꽃은 그 어떤 장식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냈다.

꽃이 피는 자리는 언제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큼 깊은 산속, 그중에서도 가장 춥고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장미꽃과 닮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단단하게 여물지 못한 가느다란 줄기엔 가시 하나 없었다.

약하디 약한 은빛 꽃잎만을 애써 날카롭게 벼린 채, 추운 겨울을 버티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분명 그 작고 연약한 꽃은 마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지.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찾아드는 이맘때가 지나면, 꽃을 지켜주던 마력은 어김없이 제 스스로를 망가뜨리곤 도망쳐 나갔다.

도망친 마력은 멀리 저 깊은 산속까지 퍼져 나가 내년 이맘때에 또다른 루시아로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꽃이 힘없이 시들고 부스러져 버리는 모습은, 우리에겐 그렇게도 쓸쓸히 다가왔기에.

우리를 포함한 마을의 많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루시아가 피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산을 돌아다니고, 이브날 밤에 마을로 가져와 장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힘겹게 피워내어진 꽃봉오리에 자그마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것은 이 마을만의 관례가 되었다.


***


망했다.

주변에 피터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세 글자였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잘못 들어 길을 잃은 건지, 들뜬 피터가 나를 두고 먼저 앞서나가 버린 건지는 모르겠다.

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주변 산길은 이미 몇 번이고 지나본 익숙한 곳이라, 내게 있어 마을로 되돌아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테니.

하지만 만약 그가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간 나머지 길을 잃어버린 거라면.

이 산은 너무도 넓고 또 복잡하기에, 아무리 이곳을 제집처럼 누비는 그로서도 간단히 마을로 돌아올 순 없을 것이었다.


'늦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 도움을 구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 너무 성급한 결론일지도 몰라.

우선은 주변을 좀 더 살핀 후에 결정하는 게-

그때, 새벽에 잠긴 고요한 숲길을 가르고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임에도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 전에 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새 돌아온 피터가 떨리는 손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누가 쓰러져 있어...!"


***


피터에게 이끌려 따라간 깊은 숲 안쪽, 그 안에서도 구석지고 어두운 수풀 속을 밝히는 옅은 푸른빛.

요 며칠간 우리가 애타게 찾아 해매던 루시아였다.

꽃이 비추는 수풀 아래, 얕은 눈더미 속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마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 꽃이 흘리는 빛을 따라온 듯 했다.

나이는 많아 봤자 피터 또래 정도일까.

엉망으로 흐트러진 긴 은발은 본래의 색채를 잃은 채, 군데군데 힘없이 끊어져 있었다.

몸에 꼭 맞는 군청색 제복은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앞코가 다 헤진 신발 한 짝은 벗겨져 저만치서 나뒹굴었다.

전신이 온통 자잘한 상처로 뒤덮여 성한 곳이 없는 몸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축 늘어진 모습에.


"주, 죽은 건 아니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오는 피터를 향해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행히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아직 뛰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다독여주려다, 문득 이변을 눈치챘다.

지나치게 창백한 낯빛과 불안정한 호흡.

서둘러 미미하게 떨리는 아이의 몸을 받쳐들었다.

열을 재기 위해 이마에 올린 손바닥에 녹아내릴 듯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


아이가 눈을 뜬 것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도 일주일 후였다.

사라 아주머니 말로는, 저런 옷차림으로 겨울 산을 몇 시간이고 헤매인 것을 약한 몸이 못 버틴 탓이라고 했다.

우리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오랜만의 방문객에 대해 궁금해했으나, 그는 자신과 관련된 정보는 어느 하나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경위는 물론이고, 그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조차 말이다.

하는 수 없이 임시로라도 부를 이름을 정하려 했을 때, 피터는 그에게 루시아의, 가시 없는 꽃의 이름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너는 그저 '닮았잖아?'라며 언제나처럼 웃어 보일 뿐이었지.

그래, 확실히 닮았다.

달빛을 받은 듯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도, 바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지는 모습도.

그가 아니라면 이 이름이 어울릴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닮았기에 주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갖게 되면, 너도 다음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루시아와 함께 부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


그 아이, 루시아는 말수가 적었고, 잘 웃지도 않았다.

언제나 무엇인가 결여된 듯한 무표정.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호수 같은 눈동자가 본연의 푸른빛을 끌어안고 조용히 침잠했다.

마치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마을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피부는 시체의 그것처럼 생기 없이 창백했고, 날카로운 눈매는 악마와 같은 섬뜩한 인상을 아로새겼다.

주민들은 그를 걱정했지만, 일부는 그의 특이한 겉모습이며 늘상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다.

아예 마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또한 외로운 아이였다.

얼핏 보면 공허한 호수 깊은 곳에는 억압된 감정이 웅크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기에, 표현이 서툴렀을 뿐.

여름날 냇가에서 처음 본 그의 웃음은 여느 아이들의 것과 같이 사랑스러웠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단풍잎을 잡아채고 순수히 기뻐하던 네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윗옷 단추를 잃어버리고 속상해하던 모습,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사소한 불만을 털어놓던 모습,

어두운 밤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던 겁 많은 너의 모습도 모두.

이런 아이가 어쩌다 웃음을 잃어버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디 그가 이 마을에 오래도록 머물며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었다.

언젠가 따스한 햇살을 반사해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수를 볼 수 있기를-

그것이 지나친 낙관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생각인 줄도 모르고.


***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의 고요를 깨부수는 폭음.

허공에 수없이 많은 마법진이 제각기 무언가를 쏘아내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광장을 가로지르며 돌진하는 불꽃이 잠시 밤을 몰아낸 그곳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주민들이 폭죽처럼 피를 흩뿌리는 모습이 선명히 비춰졌다.

붉게 물든 이웃집 창 너머로 새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검은 군화가 쓰러진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짓밟는다.

나는 샛길로 피난하는 주민들의 행렬에 끼어 걷고 있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뒷문은 마을의 깊은 곳에 감춰져 있어 눈에 띄지 않기에, 그쪽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안전하다.

이 근처 숲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우리니까.

하지만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케이티는 좀처럼 어른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자꾸만 뒤쳐졌다.

나는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아들고, 겁에 질린 눈을 살포시 가려주었다.

이미 느닷없는 폭음과 비명소리만으로도 케이티에겐 버거울 테니.

그때였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세차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한순간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에서 비릿한 체온이 느껴졌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눈가를 문질러 닦아내자, 내게 안긴 채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케이티가 보였다.


"......케이티...?"


목이 절반 정도 뜯겨 나갔다.

사라진 오른쪽 어깨 아래, 간신히 붙은 채 힘없이 흔들리는 팔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쪽을 돌아본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ㅇㅏ...으...... 끄륵..."


성대를 잃은 목에서 끌어올린 소리는 언어가 되지 못했고, 그녀가 애쓰면 애쓸수록 절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만 늘어갔다.

제 오빠를 닮아 태양처럼 선명한 금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방황했다.


"케이티, 케이티......"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처 인지조차 못할 정도로 짧은.

짙은 무력감이 심장을 옥죈다.

이렇게나 허무하게 너를 잃을 수는-


"아, 아니야..."


아직, 아직 살 수 있어.

제시카 할머니라면 낫게 해줄 수 있을 거야.

늦지 않게 데려가기만 하면 돼.

케이티는 언제나처럼 금방 회복하고 일어나서, 걱정에 밤을 지새운 내게 와서 투덜대겠지.

이래 봬도 생각보다 튼튼하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자기 몸이나 챙기라며.

기어이 내가 침대에 가서 잠드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이다.


'...분명 그럴 테니까.'


나는 떨리는 손길로 그녀의 목을 감쌌다.


***


"헉, 헉..."


나는 복잡한 골목을 가로질러 달렸다.

샛길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뿐더러, 그 길을 따라 마을 외곽을 돌아가면 늦을 것이다.

뒷목을 받친 손가락 사이로 케이티의 생명이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확연히 옅어진 호흡이 끊길 듯이 이어질 때마다 핏물이 왈칵 솟아올라 가슴께를 적셨고, 이따금 내게 쏘아지는 빛줄기가 따갑게 몸을 스쳐갔다.

정돈되지 않은 자갈길 위로 긴 꼬리처럼 드리우는 붉은 카펫.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무방비한 등을 노리고 쇄도하는 화살을 간신히 옆으로 흘려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없었다.

화살을 피해 급히 방향을 틀었던 발에 뭔가 걸렸다.


'...나무뿌리?'


자갈 틈새를 비집고 뻗어나온 나무뿌리가 하필 그곳에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기에.

지나치게 속도를 냈던 몸에 급격한 제동이 걸리며, 나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시야가 순간 하늘로 튀었다가, 크게 회전하며 곤두박질쳤다.

온몸을 찌르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케이티는-'


아.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완연한 죽음이 드리운 두 눈동자와.

부드럽게 살랑이던 금빛 단발머리가 검붉은 물감을 쏟아부은 것처럼 바닥에 끈적하게 눌러붙었다.

목 아래에 붙어 있어야 할 몸은 이미 저만치 튕겨나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아아..."


수많은 비명이 목 안쪽을 긁으며 아우성쳤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뒤엉킨 채 토해낸 소리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공기 중에서 흩어질 뿐.

눈물이 말라붙은 핏물 위를 타고 괴롭게 흘렀다.

나는 바닥을 기어가 주인이 떠나고 쓸쓸히 남은 머리만을, 소중히 품에 끌어안았다.


***


나는 도망쳤다.

살의를 담고 날아드는 마법에 옆구리가 찢겨나갔다.

자잘한 돌부리에 발이 걸려 바닥을 구르고, 수없이 많은 나뭇가지에 찔린 온몸이 욱신거렸음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건만, 잠시 쉬어갈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무엇으로부터 이리도 절박하게 도망치는가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나 힘들여 향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단지 지금 멈춰 버리면 영원히 끝나 버릴 것만 같아서.


'...대체 뭐가?'


그러게, 그 역시 잘 모르겠어.

끈적이는 핏물이 머릿속까지 엉겨붙은 듯, 생각은 복잡하게 꼬이고 몸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달렸다.

어쩌면 폐가 버티지 못하고 전부 찢겨 나갈 때까지 계속.


***


반쯤 허물어진 담 너머로, 힘없이 늘어진 금발 머리가 나를 맞았다.

어느 집의 문턱에 닿을 듯이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피터의 등은 이미 검붉은 액체에 젖어 있었다.

그 아래 깔린 흙바닥이 서서히 피로 물들어간다.

간신히 체중을 지탱하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안아주고 싶었다.

떨어졌던 동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 못지 않게 혼란스러울 그를 위로한 후, 가능하다면 부축해서라도 함께 탈출하고 싶었다.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곁을 지키고 싶다고 바랐다.

하지만 쓰러진 피터 옆에 버티고 선 거대한 인영이 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선량하게 웃던 눈매가 일그러지고, 질식할 것 같은 새까만 어둠이 눌러담긴 눈동자가 떠올랐다.

상처 하나 없는 전신을 뒤덮은, 아마 피터의 것이 분명한 피를 무신경하게 털어내는 손짓마저 극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훈련 받은 티가 역력한 자태에 그들과 같은 검은 군화, 가슴팍에 자리한 수많은 훈장이 눈에 띄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마을을 습격한 자들의 리더 격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건만, 무시할 수 없는 불길함이 목덜미를 노리고 서늘하게 날아와 꽃혔다.

서둘러 담 뒤편에 등을 기댄 자세로 몸을 숨기자, 겨울밤의 냉기가 시리게 몸을 파고들었다.

그에 따라 시린 슬픔도 함께 뼛속을 찔러왔다.

왜, 대체 왜.

왜 너까지.

눈앞에 케이티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녀에게 그랬듯이, 나는 죽어가는 피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아아......

소중한 이들이 내 곁을 떠나간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나는 핏물이 검게 말라붙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다들 어디로 갔지?

아직 살아있긴 할까?

아니, 당장 살아있다고 한들, 그게 의미가 있나?

이 지옥도에서 무사히 도망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어쩌면.

이대로 그저 무력하게 끝을 맞이하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운명의 전부인 게 아닐까.

아파,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

지금도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이미 지독히도 붉었다.

서서히 올라오는 진한 피비린내.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


한순간 잦아든 소란 틈새로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쪽을 내다보았다.

피터 바로 옆에 자리한 집의 열린 문, 그로 인해 생겨난 사각지대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살짝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이 혈향을 싣고 불어온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꼈다.


'루시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여긴 그 아이가 머무르는 곳이었지.


'아?! 자, 잠깐...!'


나는 다급하게 루시아와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허리춤의 장검에 손을 올린 채 말없이 루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밟아 죽일 벌레를 보는 듯한 그 무감정한 눈빛에, 지켜보는 나조차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에 무언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공포가 몸을 잠식하고 있었기에.

두려웠다.

그 아이를 구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무력하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양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

제발, 제발 무슨 말이라도...

그러나 메마른 입안을 맴도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혀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짙은 비감이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루시아는 내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나 태연한 거지...?'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

혼란스러운 주변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태도는 확연히 이질적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볼에는 두려움이 아닌 안도와 기쁨이 어린 눈물이 흘렀다.

금방 지척에 닿은 루시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주변의 소음에 묻혀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발검할 듯한 기세로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루시아의 말과 함께 조용히 되돌아갔다.


***


나비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바닥에 처박혔고, 낡은 부츠가 그 위를 거칠게 짓밟았다.

루시아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목덜미를 쓸었다.

그 눈빛에는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혐오가 깊게 깔려 있었다.

루시아와 그는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나는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쏠려 도저히 그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저 목걸이는 피터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준 것이다.

비록 모양은 허술할지라도 그에 담긴 의미는 특별했다.

그 목걸이에는 추억이 담겼고, 마음이 담겼고, 어쩌면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잘근잘근 짓밟히고 있었다.

그것도 새빨간 죽음을 뒤집어쓴 피터의 바로 앞에서.

어린 나비는 멋모르고 칼날 가까이 다가간 죄로 날개를 찢겼다.

그래서였을까, 순간 이미 죽었을 터인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도 같았다.


"이런, 빗맞았었나."


...뭐?


어느새 소란이 멎은 주변이 조용해진 탓에,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채 이해하기도 전에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검집에서 칼이 뽑혔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가볍게 장검을 휘두르자, 피터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검의 궤적을 따라 비산하는 핏물이 새까만 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나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검에 묻은 피를 대충 문질러 닦은 손수건은 이미 붉은 물이 흥건하게 스며들어 있어서, 닦으면 닦을수록 그 검신은 더욱 붉게 물들기만 했다.

그는 수하로 보이는 사람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한 후, 루시아와 함께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명령을 받은 수하는 제 상관이 떠나자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하나같이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나타나 후련한 듯이 웃고 있는 꼴이 역겨웠다.

옷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주민들의 단말마가 절규를 토해냈으나, 그 비명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정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을 뿐.


'...잠깐, 저 방향은 뒷문이 있는...!'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손 쓸 틈도 없이 일방적인 학살극이 재개되었다.

숲길을 이용해 그들을 따돌리고 도망치려는 얕은수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무용했다.

한층 더 짙어지는 혈향과 함께 다시금 퍼져나오는 비명소리.

가까스로 대피했던 사람들마저 죽어가고 있었다.


***


'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미소짓는 루시아를 본 뒤부터, 줄곧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의문이었다.

...모르겠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중 하나조차 내게는 버거운 일들이,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 한꺼번에 닥쳐와 버려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혼란스럽게 뒤엉켜 버렸다.

무언가 크게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이미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다시 한번 헤집었다.

내가 보아왔던 루시아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쳐갔다.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를 연관지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부서진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맞출 때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생각이 드문드문 끊겨 떨어졌다.

나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려 몇 가닥인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산들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내 상념은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불현듯 등을 찌르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고요한 마을, 그 위를 덮은 하늘에 거대한 붉은 원이 떠올랐다.

알아보기 힘든 기하학적인 도형과 복잡한 글자들이 원 안팎으로 일정한 배치를 따라 새겨졌다.

그 흔적을 따라 서서히 차오르는 붉은 빛에, 나는 확신했다.

내 불길함이 가리키던 것이 무엇인지를.

마법이다.

그것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나는 빼곡한 글자들 사이 숨어있는 익숙한 단어 하나를 발견하고 무심코 소리내어 읽었다.


"...화염."


그와 동시에 마법진에서 내쏘아진 거대한 불기둥이 마을을 집어삼켰다.

어두운 숲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온다.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성큼 다가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아아-.

나의 보금자리와,

나의 가족들과,

나의 추억들-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나의 평생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새까맣게 부스러지고 있었다.

오렌지빛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온 산을 새하얗게 물들이고도 남을 만큼.

그러나 내 삶의 흔적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꽃은 너무도 뜨거워서.

내려오던 눈송이들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나는 손 안의 펜던트를 강하게 쥐었다.

모든 사람들이 뒷문 쪽으로 몰린 때를 틈타 빠져나올 때, 흙을 뒤집어쓴 채 버려진 것을 주워왔었다.

정돈되지 않은 나뭇결에서 가시가 일어나 손바닥에 박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내게 남은 과거는 이것뿐이구나.'


그저 그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고 싶었다.


***


짧은 시간 무엇보다 뜨겁게 타올랐지만, 이제는 까만 잿더미 속에서 느릿하게 꺼져가는 불길.

그 쓸쓸한 정경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떠올렸다.


 '전쟁.'


시드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단어였다.

그 단어 하나로,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던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처음 마주쳤던 그날 루시아가 입고 있었던 군청색 제복과 검은 신발은, 비록 여기저기 상하긴 했어도 우리를 학살하던 그들의 옷차림과 거의 일치했다.

데이브 아저씨가 급한대로 못 쓰게 된 옷들을 장작으로 쓰려 했을 땐, 집까지 찾아가 그 너덜너덜한 옷만은 되찾아 왔더랬지.

그것이 소중해 마지않는 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 시드가 제국의 상징이라 했었던 군청색 군복과 검은 군화였다.

돌이켜 보면, 이상하게 여길 만한 행동은 많았다.

과도를 쥐던 손놀림은 지나치게 익숙했지만, 과일을 깎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실수로 산딸기 바구니를 엎어 얼룩진 옷을 피범벅이 된 것으로 단정짓고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으며,

최근에는 '통신 마법'에 대한 책을 챙겨 밤늦게까지 남몰래 무언갈 하다 잠드는 듯한 기색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유출된 뒷문의 위치.

수색하는 기색조차 없이 곧바로 그곳으로 향하던 모습은 이미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뒷문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인물이자 그들이 유일하게 해하지 않은 사람.

그러면서도 과거의 행적이 불분명한 자는, 내가 알기론 하나뿐이었다.

왜 이제서야 떠오른 걸까.

바깥 출입이 잦던 시드가 전부터 수없이 주장했던, 전 세계가 오래 전부터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겐 지나치게 허무맹랑하게 들렸었다.

그렇기에 믿지 않았고,

그렇기에 루시아를 믿었다.

외부인을 꺼리는 마음에 괜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 간단히 치부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불꽃의 열기가 잦아들어 미미하게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밟고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멈춰선 길목에서, 우연히도 홀로 피어 있는 루시아 한 송이와 마주쳤다.

루시아.

어쩌면 그는 연약한 꽃잎으로 위장한 칼날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꽃을 품어주려다 심장을 깊게 베이고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붉은 피가 빠져나간 심장이 차갑게 굳어졌다.

나는 가장 어두운 곳을 은은하게 비추는 그 여린 꽃에게 가까이 다가가-

짓밟았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한 발길질로 몇 번이고 계속해서.

꽃잎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기어이 형편없이 꺾인 줄기가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눈물일까, 아니면 내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일까.

젖은 눈가에 옅은 햇빛이 닿아 반짝였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크리스마스의 새벽이, 지평선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무슨 헛소리야.

너 때문이잖아.

우리를 배신하고 모두 죽이려 한 주제에, '살아남아서 다행' 같은 소리를 입에 올리다니.


"나를 증오하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노엘'."


자신의 본명을 들은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나는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아직도 네 거짓말에 놀아나고 있을 줄 알았어?'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노엘은 기억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자신의 본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마을을 전소시킨 것과 거의 동시에, 각국의 수뇌부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 뒤부터 제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을 보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둘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을 터다.

종전 이후 제국이 세계를 통일한 데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작위까지 얻은 주제에.

그가 영웅이 된 대가로 우리 마을에는 군사 기지라는 누명이 씌워졌고, 우리의 죽음은 민간인 학살이 아닌 정당한 전투의 결과라 포장당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 가증스러운 연기를 내 눈앞에서 펼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는 무어라 항변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내 손에 들린 단검을 뒤늦게 발견하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래."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께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새하얀 목덜미를 보란 듯이 드러낸 채, 나를 올려다보는 공허한 시선.

뒤이어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선고하듯 읊조렸다.


"마음대로 해."


***


드러난 목은 얇고 앙상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노엘의 눈동자에 남은 것은 무거운 체념 뿐.

오래전에 모든 온기를 내놓은 호수는 이미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눈 아래를 짙게 물들인 그늘은 깊은 어둠 속에서 그의 생기를 빨아들였고, 하얗게 죽은 안색은 병자를 연상케 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신을 닮은 머리카락은 쥐어뜯긴 듯 죄다 이가 나갔으며, 불규칙하게 깨진 손톱은 성한 곳이 없었다.

파리한 빛이 도는 갈라진 입술 위로 핏방울이 하나둘 맺혔다.

뒤편에 드리운 그림자에 죽음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그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서.

내게 새겨진 수많은 상처 깊숙이 허무가 깃들었다.

내가 그렇게나 기를 쓰고 여기까지 기어올라와야 했던 이유가, 고작해야 이토록 볼품없이 시들어가는 꽃을 꺾기 위해서였던가.

나는 금방이라도 그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이 흔들리는 꽃잎을 마주보았다.

너를 품어준 내 심장을 수백 갈래로 조각낸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어?

너로 인해 죽어간 수없는 사람들의 목숨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건데?

우리가 함께한 모든 시간을 지우려 한 것은 다름아닌 너다.

네 선택이다.

그런 얼굴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거였다면, 처음부터 칼날을 꽃잎이라 속삭이지 말았어야지.

기어이 우리 모두를 이용하고 원하는 바를 이뤘다면,

적어도 행복했어야지.

우리의 고통을 밟고 올라선 그곳에선 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행복해져서-

마침내 내가 너의 모든 걸 빼앗고 저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그때,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며 뒤늦게 후회해야 하잖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내게 추하게 매달리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하잖아.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봐.

두려움에 떨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해보라고.

그조차도 못하고 끝내 이렇게 망가질 거였다면, 차라리 네 수하들이 지켜주는 그곳에서 평생 겁쟁이처럼 틀어박혀 있는 게 나았어.

왜 스스로 안락한 삶을 벗어던지고 이런 수상한 임무에 자원했던 건데.

허술한 덫이었다.

막대한 보상이 걸린 것이 아닌데도 위험하고 불확실한 요소가 가득할 것이 분명했기에, 또한 그만큼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 역시 농후했기에, 모두에게 기피받던 임무.

하지만 충분한 전공을 세운 그에겐 그것을 빠져나갈 만한 힘도 명분도 있었을 터다.


'너도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 왜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온 거야?'


왜 내 삶의 의미를 멋대로 없애버린 거냐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내가 오래도록 바라왔던 숙원.

허무하건 어쨌건 간에, 네가 죽어야 할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죽음으로서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다.

네가 지옥에 떨어지면, 나는 살아서 나아갈 것이다.

네가 사라진 세상에서 행복할 것이다.

단검을 쥔 손을 들어올려 그의 목을 겨눴다.

오늘따라 칼자루를 쥔 손이 유난히 무거웠다.

잘게 떨리는 칼끝에서, 그제서야 안심한 듯 편안히 눈을 감는 노엘이 보였다.


'이래서야, 꼭 내가 널 구원해주는 것만 같잖아.'


***


나는 낙오된 병사였다.

예상보다 거센 눈보라와 맞딱뜨린 탓에 그의 작전은 실패했고, 나는 퇴각하는 도중 부대를 놓쳤다.

물론 내가 없어졌음에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찾으려 해도 그가 막았을 것이다.

'루세피어 하프롬.'

한때 친구라고 믿었던 이의 이름.

그러나 그에게 나는 입맞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 어쩌면 화풀이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지 성가신 눈엣가시일 뿐이었으므로.

쓸모를 다한 내가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아무리 걸어도 온통 새하얗기만 한 산속, 그 한가운데에서 그만 정신을 잃었을 때.

진작 죽었어야 할 질긴 목숨이 이제서야 끊어진 거구나, 라고.

나는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


"이름이 뭐야?"


천진한 얼굴로 물어오는 소년의 금발이 코앞에서 살랑거렸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한 쌍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고,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쏟아진 질문 세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만해, 피터. 곤란해하잖아."


스스럼 없이 들이대는 소년을 가로막은 것은, 나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녀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특유의 여유롭고 나긋나긋한 분위기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쇄골까지 풍성하게 굽이치며 내려오는 민트색 머리카락은 봄날의 부드러운 들판과 청명한 하늘을 섞어둔 듯 했다.

그를 제지하면서도 슬쩍 이쪽을 힐끗거리는 모양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뭐,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이름쯤이야 말해줘도 별 상관 없겠지.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내 이름은-"


노엘.

순간 그 간결하고도 익숙한 단어가 덩어리져 목에 걸렸다.

내 뒤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과거가 그들처럼 깨끗한 이들에게 내보이기엔 못내 수치스러웠다.

어쩌면 줄곧 피를 뒤집어쓰고 진창을 굴렀던 삶이, 이제는 신물이 나서.

이렇게라도 그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미안, 전혀 기억이 안 나."


나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아까와 비교하면 확연히 떨리는 목소리.

나는 예전부터 거짓말이 적성에 안 맞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 것부터가 너무도 서툴렀기에.

감정이라는 건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물결치는 파도와도 같아서.

아무리 억눌러 호수 속에 가두려 해도 이따금 제멋대로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들은 어설픈 거짓말에도 간단히 나를 믿어주었다.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들이 바보처럼 순진해서 다행이라는 못된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우리가 진군하려던 나라에 속한 마을임을.

전쟁 중에 자신들의 나라를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다, 실패하고 낙오된 적국의 병사라니.

포로가 제발로 잡혀들어온 꼴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들의 마을은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어서 소식이 느렸기 때문인지 지금이 전쟁통인 것도 모르고 평화로웠다.

아마 내가 그들과는 다른 나라의 사람인 것을 밝혀도 그렇게까지 적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들을 믿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의 개인적인 질문들이 나를 심문하고 떠본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기에.

나는 차라리 스스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아예 잊어버린 척 하기를 택했다.

내 입맛대로 어떤 것만 기억했다 말았다 하는 것도 이상할 테니까.

그러나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 신상에 대한 오해가 발생할 때마다, 나는 '기억에는 없지만 남아있는 습관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증거'를 자연스럽게 티내 오해를 정정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대표적으로는 체구가 좀 작다는 이유로 나보다 한두 살가량 어린 피터를 한동안 형이라고 불러야 했던 일이 그랬고.

내게 루시아라는 이름이 지어진 이후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겉모습만 보고 착각해서 여자애같은 이름을 줘버렸다며 곤란해했었다.

...나중에 머리를 자르든가 해야지.

하지만 나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설산의 밤을 아름답게 비추는 꽃이라.

내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


늦은 오후의 햇살이 머리맡의 창으로 드리웠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습관적으로 옷장 맨 안쪽에 걸린 군복을 점검했다.

다 헤지고 찢어진 그것은 이제 옷이라기보단 군청색 천쪼가리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린다 생각될 정도이긴 했지만.


'...어?'


없다.

나는 언제나처럼 손끝에 느껴져야 할 너덜너덜한 촉감 대신 텅 빈 공간과 맞닥뜨렸다.

다급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손을 휘적이자 옷장 안의 매끄러운 나무판에 내 손등이 닿았다.

옷장의 내부는 여기가 끝이라는 의미.

나는 대충 손만 집어넣어 확인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옷장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어졌혔다.

그러나 옷장에 걸린 몇 안 되는 옷들을 아무리 뒤적여봐도, 예의 그 군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아, 맞아.

어제 피곤해서 책상에 올려둔 채로 까먹고 잠들었었나 보다.

그러나 돌아본 책상 위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에 책상을 정리한 적은 없는데?'


나는 책상 주변을 돌아다니다 발로 그 아래 놓여있던 박스를 건드렸다.

불현듯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겨울에 데이브 아저씨가 다리를 다쳐서 미리 장작을 많이 준비해두지 못했다는 소식을 스치듯 들었었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이 산에서 장작을 구해다줄 때까지, 임시로 못 쓰는 옷이나 장작이 될 만한 것을 주면 고맙겠다 했었던가.

물론 나는 줄 만한 옷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을 예정이었다.

에리카가 내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덩치 큰 남성을 무서워해서 내게 대신 옷을 전해달라 부탁하기 위해 나를 찾았었다.


'일단 나도 남자인데 말이지...'


나는 나보단 마을의 큰언니 격인 메리 누나한테 가는 편이 더 든든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었다.

아, 혹시 남녀 상관없이 그냥 큰 사람이 무서웠던 건가.

작아서 서럽구나.

...아무튼 책상 밑의 저 박스에 담긴 것이 아저씨께 드릴 에리카의 낡은 옷이다.

그런데 그건 뒀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책상 위에 둔 군복만 사라졌다는 건...

창밖으로 서서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보였다.


'아저씨는 점심때쯤 온다고 했었으니까-'


응, 한참 지났네.

아무래도 내가 대답이 없으니까 문을 살짝 열어봤다가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인 군복을 발견하고 착각해서 가져가버린 것 같다.

적어도 문단속이라도 하고 잤어야 했는데.


'벌써 태워버린 건 아니겠지?'


나라고 불태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처리하려 했다간 이후에 그게 어떤 변수가 되어 나타날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과거에 뼈저리게 깨달은 삶의 교훈이었으며, 간단한 길을 내버려두고 굳이 어렵게 돌아가는 이유였다.

괜찮을 거다.

아마 에리카 말고도 그를 도우려는 사람이 꽤 있었으니까.

나는 서둘러 외투를 걸쳐입고 집을 나섰다.


***


제국의 군복에는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의 위치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비록 담긴 마력을 전부 써버리면 더 이상 작동시킬 수 없는 일회성 마법이고, 추적 가능한 범위도 넓지 않아 멀리 도망쳐 버리면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지만.

옷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손상만으로도 쉽게 마법진이 뒤틀리거나 파괴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보급품의 품질도 점점 떨어져가는 상황에선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할 터였다.

실제로 나는 보급받은 군복에 제대로 된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꼴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입을 군복에 새기기 위해 필요한 마력을 무리하게 줄인 탓에, 이외에도 자잘한 단점은 내 입으로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마법진을 새긴 군복을 생산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국만의 상징... 뭐 그런 문제일지도.'


이런 정성스러운 자원낭비 같은 짓을 하는 나라는 내가 알기론 제국 이외에는 없었다.

그래, 우리의 고귀하신 황제폐하께선 마력이 썩어넘치실 테니까 말이야.


"하아..."


나는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유명무실해진 마법이 뜻밖에도 전혀 뜬금없는 곳에서 내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원래의 것보다 훨씬 범위가 줄어들었고 신호도 미미하지만, 내 군복에 새겨진 마법진은 확실히 작동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서 눈을 뜨고 얼마 안 되어 확인했을 때는 이미 망가져 있었는데.'


언제부터, 무엇을 계기로 다시 고쳐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마법은 제국에 마을의 존재를 노출시킬 수 있기에,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했다.

...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마법으로 인해 이곳에 피해가 갈 확률은 미약했다.

아마 범위는 산 중턱 정도까지밖에 닿지 않을 테니, 아무리 이 산이 국경 근처에 있다지만 굳이 산속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신호의 존재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마저도 숲에 빼곡한 나무들이 장애물이 되어, 추적되는 위치를 부정확하게 만들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위험 요소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황혼의 빛깔에 물든 데이브 아저씨네 현관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조용히 저물어가는 태양 너머로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법진이 새겨진 군복을 망가뜨리면 이 마법은 간단히 파괴될 것이다.

그것이 벽난로의 불길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이미 마법진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정도의 손상에도 여전히 마법이 발동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쩌면 잘못 건드렸다가 되려 위력이 강화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 위에 다른 마법식을 덧씌워 마법 자체를 무표화시키는 것뿐이었다.

이 방법은 무효화시킬 마법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에, 시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필요했다.

나는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누군가 깔끔하게 정리해준 책상을 떠올렸다.

책상 위의 선반으로 옮겨진 두꺼운 책 대여섯 권은 가지런하게 꽃혀있었지.

그건 모두 '통신 마법'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본래 내 목적은 '위치 추적 마법'이었지만, 이건 갖다 달라 요청할 때 제대로 된 명분을 설명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서 나는 그 대신 비슷한 구조의 마법식을 바탕으로 한 통신 마법 관련 책들을 얻어왔다.

물론 개인적으로 위치 추적 마법서를 찾아본 적은 있으나,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통신 마법서도 지금 내 책상에 올라와 있는 게 다라고 하니, 아예 이 마을에는 없을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어차피 내가 찾는 건 제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량해 만든 마법이라 그와 완벽히 같은 마법을 다루는 마법서는 황실 서고에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이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다시 찾아보면 되니까.

우선은 군복을 되찾아오는 것이 더 급했다.

나는 서서히 열리는 문을 통해 실내로 걸어들어갔다.


***


나는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 오랜만에 잘 자고 있었는데.'


마법진 건도 해결됐겠다, 한동안은 푹 쉬면서 그동안 쌓인 피로나 회복하려 했더니.

창을 통해 보이는 어둠에 잠긴 바깥은 아직 한밤중이 분명했기에, 나는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피터가 다짜고짜 내 양 어깨를 덥석 쥐었다.

떨림이 그의 손을 타고 내게 전해져왔다.


"피터? 무슨 일..."


내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날붙이.


"커헉...!"


그가 토해낸 핏방울이 내 옷에 붉은 흔적을 떨어뜨렸다.


"루, 시ㅇㅏ..."


-도망쳐.


내 어깨에 올라갔던 손이 미끄러져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다리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피터에게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넘쳤다.

출혈이 너무 심하다.

아득한 과거, 피칠갑을 한 사람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니, 아니야.

여기는 아니야.

여기는 평화로운 마을이잖아.

나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깨끗하고 빛나는 곳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

나 때문인가.

내가 이곳을 더럽혀 버린 건가.

이곳에 머무르며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품어 버렸기 때문에?

서서히 피터의 움직임이 멎었다.

안 되는데.

죽으면, 죽으면 안 되는데.

그를 꿰뚫었던 검날이 뽑혀나가 제 주인에게로 되돌아갔다.

그 피로 물든 궤적을 쫓은 시선이 도달한 곳에는 여유롭게 검집에 검을 집어넣는 그가 있었다.

지난 2년여간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나를 설산에 버려두고 떠난 지휘관이 되돌아왔다.

그는 태양조차 삼켜버릴 것만 같은 까만 어둠이 깔린 눈동자로, 언제나처럼 지독한 무표정을 띤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리도록 무감정한 시선이 나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학습된 공포가 전신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마침내는 모든 것을 뒤덮었다.

멋대로 운명에서 도망친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


내가 그의 마음을 거절한 이후, 세 달 만에 다시 찾아온 루스는 이미 내가 알던 소년이 아니었다.

빈민한테 차였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걸까?

아니면 비록 모르고 한 거지만 같은 남자한테 고백했다는 사실이?

어쨌든 그는 계속해서 나를 탓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거리를 대동해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소복히 쌓인 눈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새로 새하얗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나는 그의 한결같은 미소를 믿었다.

그것이 꾸며낸 단면일 뿐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무해하게 감고 있던 눈꺼풀 뒤편에는 끝없는 어둠뿐인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어둠이 나를 잡고 끌어내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짓눌렀다.

그가 밀어넣은 아득한 아래에서, 나는 헤매이고 또 헤매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담은 것은 따스한 봄눈이 아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에서 차갑게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였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방에 핏물이 흥건했다.

골목 전체를 메운 지독한 피비린내에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고, 온몸에 엉겨붙은 피가 끈적거리는 느낌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발끝에 무언가 채이는 느낌에 무심코 고개를 숙이자, 내 발아래에서 온몸이 난도질되어 죽어있는 루스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잘 모르겠다.

저 짓무른 고깃덩어리가 정말 눈이 맞는지조차.

새까만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던 너의 속내는 사실 이렇게나 붉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미끄러져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침내 내게 짙게 드리웠던 어둠을 찢고 나왔건만, 후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전신에 들러붙은 핏물처럼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머릿속을 적셨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내가 한 거라고?'


아냐.

아니, 야.

나, 나는...

급하게 뒷걸음질치다 발이 꼬여 그대로 넘어졌다.

바닥을 뒤덮은 핏물이 내게로 질척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싫어.

벗어나려 휘적이는 팔다리를 끈덕지게 휘감아 붙잡았다.

싫어.

디디는 곳마다 피를 머금은 진흙이 늪처럼 패였다.

일어서려 해도 자꾸만 미끄러져 다시 새빨간 진창 속으로 처박혔다.

싫어...!

땅을 박차고 다시 넘어지고를 반복하며 나아갔다.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볼을 타고 흘렀다.

새빨갛다.

온 세상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발길 닿는 대로 도망친 끝에 다다른 곳은 국경지대의 병영이었다.

나는 귀족을 살해했다.

그것도 끔찍히도 잔인한 방법으로.

중범죄자인 내가 갈 만한 곳은 여기뿐이었다.

적어도 붙잡히기 전에 쓸모를 증명한다면, 어떻게든 죽음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몰랐다.

전장에서 허약한 8살짜리 꼬마가 거들 수 있는 일 따윈 없다는 걸.

그래도 다행히 그곳의 군인들은 나를 불쌍히 여겨줬는지, 간단한 허드렛일을 돕는 것만으로 이곳에 머무르게 해 주었기에.

죽음을 각오한 것 치고는 무난히 지낼만했다.

게다가 무거운 물건을 옮기다 계단에서 굴러 심하게 다친 이후로, 저들은 내가 뭐라도 거들려 하면 죽을 듯이 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걸레질 몇 번 한 정도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데요...?"


물론 그들은 언제나 위험하니까 좀 더 커서 하라는 말과 함께, 당사자인 내 의견은 가볍게 묵살했다.

이곳은 국경에 가장 인접한 곳이었지만, 애써 정렴해봤자 얻을 것 하나 없는 척박한 땅이었기에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적들도 굳이 우리를 건들지 않았고, 이쪽도 굳이 그들의 영역을 넘보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비옥한 토지가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쳐들어간다면 패배가 확실시될 정도의 막대한 병력차가 존재했기에 우리로선 시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기적적으로 맞물려 유지되는 평화.

나는 그런 이곳의 평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와 최악의 방법으로 재회하기 전까지는.

루스.

아니, 하프롬 백작.

기울어가는 귀족가의 후계일 뿐이었던 그는, 어느새 황제의 심복이자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이 조잡하고 별 볼 일 없는 부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소문조차 돌지 않았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가 피칠갑을 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본 목격자만 해도 충분히 많았을 텐데.

그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막은 것이다.

내게 직접,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가지고 놀며 보복하기 위해서.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린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이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연기라고 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렇게 형편없이 티나는 거짓말이라니.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목숨을 구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추해 보일지라도, 나는 살고 싶었다.

알고 있다.

내가 빌고 있는 눈앞의 상대가 지난 몇 년간 나를 지독히도 괴롭혀온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대로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가 봤자 내게 남은 건 단순히 과거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그의 허리춤에 차인 장검과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피터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단순히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대로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사방에 내리깔린 서늘한 살기에 멋대로 떨리는 몸은 분명 내 것인데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아.'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이 서 있는 내 꼴이, 꼭 원수의 손에 목숨을 맡긴 스스로의 처지와도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흐려진 시야를 통해 미동도 없이 올곧은 자세로 여전히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물감이 번진 것처럼 흐릿해진 표정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명 언제나처럼 꼴사납게 구는 나를 경멸하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버려진 주제에 다시 들러붙으려 하는 내 비굴하고 뻔뻔한 태도에 질려하는 걸지도 몰랐다.


***


"그건 뭐지?"


백작의 시선이 내 목에 걸린 조잡한 목걸이를 향해 있었다.


"......!!"


나는 반사적으로 목걸이에 달린 나비 모양 펜던트를 감싸쥐고, 그것을 보호하듯이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희미한 짜증이 서린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웬만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에, 이건 상당히 심기가 거슬렸다는 신호였다.


"아..."


괜히 찔려서 과민반응 해버렸다.

그로서는 이 목걸이에 대해 알 길이 없을 테니, 그냥 별 뜻 없이 물어본 거였을 텐데.

충분히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왜 나라는 멍청이는 매번 망쳐놓는 건지.

침묵 속에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펜던트를 쥔 손을 그대로 세게 당겨 목걸이를 잡아뜯었다.


"...별거 아닙니다."


뜯어낸 펜던트를 바닥에 던지고, 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짓밟았다.


"그냥, 쓰레기죠."


줄에 쓸린 뒷목이 쓰라린 동시에 허전해서, 나는 괜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런, 빗맞았었나."


잠깐, 뭐라고...?

갑작스레 들려온 영문 모를 혼잣말에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백작의 검이 이미 죽은 피터를 한번 더 베었다.

머리와 몸을 잇는 길목에 붉은 강이 넘쳐흘렀다.


"따라와라."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단지 그 딱딱한 한마디만을 내뱉고는 혼자 뒤돌아 앞서가기 시작했다.

내 어설픈 연극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이미 버렸던 내게 다시 흥미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마을의 참혹한 광경을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그 괴롭게 뒤틀린 정경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으며 이야기했던 면면들이 싸늘하게 식은 채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씻어내고 또 씻어내도 이미 피로 더러워진 손은 깨끗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처럼 다시 순수해질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마저 이 피비린내 나는 진창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뿐.


'...미안해.'


그 당연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내가 같잖은 희망을 품고 망설인 그 모든 시간들이, 너희에겐 새빨간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구나.

나는 붉게 물든 마을에서 들려오는 죄없는 이들의 단말마를 조용히 뒤로했다.


***


그로부터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세계를 좀먹던 전쟁이 끝났다. 

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서. 

몇십 년이나 지속되어 온 세계 단위의 전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허무한 마무리였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전까지만 해도 그 전쟁의 양상은 제국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기존의 왕국들보다 한 단계 높은 제국을 자칭하기 시작했던 황제의 행태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지도 모른다.

제국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남은 국가는 총 6개의 크고 작은 왕국들 뿐이었다.

그들은 오만한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다.

가까스로 평형을 이루었던 정세는 이때부터 이미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장소를 바꿔가며 몇 번인가 회의를 했고, 그중 마지막으로 선정되었으며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이 바로 내가 지냈던 산마을이었다.

전세계를 휩쓸며 이리도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을 모를 정도로, 그 마을은 바깥 소식에 어둡고 외부와의 왕래가 잦지 않은 곳이었으니, 어쩌면 그들에겐 최적의 장소였을 터다.

어째서인지 대리인을 내세우지 않고 한 나라의 지배자나 그에 준하는 자가 직접 걸음했더랬다.

나 역시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귀족처럼 보이는 이들을 몇 번인가 마주쳤던 것도 같았다.

주민들이 워낙 아무렇지 않게 대했기에 자연스럽게 별 일 아니라는 생각 속에서 잊혀졌었지만.

어쨌건 백작의 입장에서는, 추적 마법의 신호를 받아 습격한 마을에 적국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계획의 모든 과정을 은밀하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그들이 대동한 호위의 수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간소화되어 있어서.

그의 군대만으로도 그들을 진압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지배층을 잃은 왕국들이 혼란에 빠진 시기를 틈타 제국의 군대가 급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전쟁은 제국의 손에 세계가 통일되며 막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백작이 종전 이후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은 예상외였다.

오히려 나는 그날의 일을 공훈으로 인정받아 막대한 재물과 작위까지 하사받았다.

어쩌면 마을에 있던 고위층이라는 변수가, 되는대로 내뱉은 내 거짓말을 어떻게든 누덕누덕 기워준 걸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적들의 비공식 동맹을 간파하고 그들의 아지트에 잠입하여 그 수뇌부를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왔으며,

마침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


시작은 언제나 온통 핏빛으로 칠해진 채 아수라장이 된 마을의 풍경.

나를 원망하는 주민들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내 멱살을 잡고 물었다.

그것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사실은 일방적인 비난에 가까웠다.

옷이 그들의 피로 흥건하게 적셔져갔다.

다리가 무너져 도저히 체중을 지탱할 수 없었기에, 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매달린 꼴이 되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겹쳐지고 다시 겹쳐져 머리가 아프도록 울렸다.

그들은 내게 수백 가지의 질문을 토해냈지만,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전부 지독히도 맞는 말 뿐이라서.

하늘에서 선명한 핏빛을 띠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나를 에워싸고 있던 그들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피부와 살이 흉하게 벗겨지고 마침내 뼈만 남은 신체가 산산이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바닥 위로 질척거리며 쌓여가는 검붉은 액체에서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나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검붉은 것들이 내 몸을 단단히 휘감고 기어올라왔다.

결국 진이 빠진 신체가 저항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몸을 맡긴 순간, 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옥죄던 것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오히려 더 끔찍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은 너무도 추웠다.

몸이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심장이 온전히 냉기에게 잡아먹힐 때까지, 나는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어두웠던 시야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순식간에 세를 넓힌 불꽃 속에서 수많은 손들이 새카맣게 탄 채로 내게 뻗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져 나타난 불협화음은 기괴하게 뒤틀린 비명과도 같아서.

반가운 동시에, 괴로웠다.


***


눈을 뜨자 익숙한 어둠이 나를 맞았다.

고급스러운 베개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모든 생명이 떠나고 비어버린 마을을 집어삼키며 사납게 타오르던 불길이, 꿈에서 깨어나고도 미치도록 선연했다.

나를 저 아래로 끌어내리려던 그들의 손이 여전히 내 팔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며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나는 손톱으로 미친듯이 팔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정신이 들어 손을 떼어냈을 때는 이미 잠옷 위로 희미하게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나는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닿은 맨발을 통해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에 몸이 떨렸다.

내 시간 감각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우고 조명이 모두 박살난 실내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깨어났던 날 이후로 다시 며칠이나 지났을까.

사실 내가 마지막이라 기억하는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팠다.

몽롱한 정신으로 돌아다녔던 기억이 잠들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는 악몽들과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그 무엇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소중한 것들은 이미 빼앗긴 지 오래였으니까.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마법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군복 따위 갈기갈기 찢어버렸어야 했는데.

군대가 닥쳐 왔을 때는 단순히 생존본능에 의탁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어리석은 나는 눈앞의 공포에 눈이 멀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사무치게 그리워할 줄을 알았다.

이렇게나 괴로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그들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지금의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들의 죽음을 팔아서 얻은 것이었다.

나로 인해 그들은 죽어서까지 오명을 쓴 채 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들을 짓밟고 얻은 것이라 생각하면 건들기조차 싫었지만, 결국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끔찍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뻔뻔스레 살아있는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삶의 이유도, 의미도, 이제 내게는 없었다.

그저 악몽에 시달리며 무기력하게 잠들었다 깨어나길 반복할 뿐.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죽지 못했다.

선명한 로프 자국이 새겨진 목이 쓰라려왔다.

단순히 줄이 끊어져서 자살이 실패로 돌아간 탓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후의 순간,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몇 번이고 떠올린 생각이 다름아닌 '살고 싶다'였기 때문에.

살아갈 이유를 모두 잃어버리고서 죽느니 못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지라도,

나는 아직, 지독히도 살고 싶었다.

내가 삶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내려놓기 전까지, 얼마나 이 짓을 반복하건 간에 나는 죽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


시뮤라 가의 영애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종전 이후에 급격하게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 세계는 언어부터 법치 제도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크고 작은 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그때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괴수'의 출몰.

전쟁 중에도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지만, 최근 들어서 지나치게 그 빈도가 증가하며 재조명되기 시작하고 있는 문제였다.

괴수라 불리는 그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악마와 관련된 전승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에 새까만 털을 가진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십수 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몸집과 입안 전체에 빼곡히 나 있는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언제나 무리지어 나타난다는 습성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울 법 했지만.

여기에 마법마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특수한 체질이 더해져, 어느새 그것은 하나의 자연재해와도 같이 취급되기 시작했다.

황제가 기거하는 수도와 영향력 있는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에서는, 아예 대 괴수 사단을 특별히 편성하여 배치함으로써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정복지나 외곽 지역은 괴수 무리에 잘못 걸리면 꼼짝없이 통째로 폐허가 되기 일쑤였다.

때문에 괴수들로 인한 인명 피해가 극심하던 차에, 제국에서 가장 그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시뮤라 공작가의 외동딸인 샤를로트가 느닷없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던 중 그녀의 서랍장에서 발견된 일기장에 적힌 것은, 괴수 사태를 해결하고 나아가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기록이었다.

그 두꺼운 연구일지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 내 계획을 완성시켜줄 마지막 퍼즐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그려진 마법진을 통해 그녀가 순간이동 마법으로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거기까지였다.

마법진에 쓰여있는 목적지의 좌표만으로는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 좌표가 가리키는 위치가 이 세계 밖의, 차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뿐.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적어도 그 좌표 자체가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장소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건 확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미지의 장소에 대해선 온통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렇기에 선뜻 공녀를 찾으러 가겠다는 이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행태는 사실상 가출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짓이었고, 이름뿐인 임무는 그 뒤치다꺼리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

게다가 세계 평화라니, 곱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의 허무맹랑한 망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임무에 자원했던 이유를.

어쩌면 전쟁이라는 것에 완전히 질려버려서, 나도 그녀를 따라 이상을 쫓고 싶어진 걸까.

그게 아니라면 깊이 뿌리내린 죄책감이, 어딘지도 모르는 타향에서 그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속죄하라며 내 등을 떠밀었을지도 모르고.

그마저도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그저 조용히 잊혀지고 싶었을지도.


***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내가 살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목표가 생기니 의외로 버틸만해서, 나는 서서히 그곳에 적응해 나가며 착실하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발판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


나는 어두운 실내에서 밧줄로 단단히 묶여있는 손목을 응시했다.

언젠가 이런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이때만을 기다려 득달같이 달려들 작자라면 넘쳐났으니.

전쟁 영웅이라는 건,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원한을 가진 이들 역시 수없이 많은 존재이니까.


"...정말로, 살아있었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내게 마지막을 선사하는 게 너라서.

말라가는 풀잎, 무덤 속의 하늘과 같은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메리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맞이했다.

단검을 든 손에는 손등부터 팔꿈치까지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선명한 원한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나를 증오하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짙고도 무거운 분노가 눌러담긴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런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


"...노엘."


아.

그래, 알아버렸구나.

그래도 루시아라고 불러 주었으면 했지만, 긴 망설임 끝에 결국 그만두었다.

지금의 내게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을까.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고서도 제 목숨만은 거두지 못하는 한심한 겁쟁이는, 다른 이의 손으로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자 했다.


"마음대로 해."


마지막은, 역시 웃으면서 끝내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공허한 웃음밖엔 지을 수 없네...

그녀의 단검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어느새 목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칼날이 차갑고도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관객은 이미 떠난 지 오래인 길고도 지루한 연극의 막이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지척까지 다가온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의 끝이 다가왔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어째서 복수의 대상인 너마저 그것을 바라마지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나는 칼날의 방향을 틀어 노엘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다시 이쪽으로 거둬들인 단검을 뒤따라 솟구치는 피가 내 얼굴 위에 사선을 그리며 튀었다.

끈적하게 달라붙은 핏물이, 이상하게도 이전처럼 끔찍하지 않았다.

허벅지를 찔러 무릎을 꿇리고 곧바로 손등을 꿰뚫었다.

단검 끝을 바닥에 고정시킨 그대로 검날을 빙글빙글 돌려 상처를 헤집었다.


"...하하"


오만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올곧게 서 있던 신체가 추하게 바닥을 기었다.

나는 도망치려는 그의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단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한 마디씩.

가슴 속에 맺혀있던 울분을 토해냈다.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그의 다리를 놓아주었을 때, 그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힘없이 늘어진 채 바닥에 흥건한 핏물에 잠겨 있는 노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붉게 물든 케이티가, 피터가,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에 마주했던 수많은 주민들이 스쳐갔다.

...아니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무겁도록 짙게 깔린 침묵이 가슴을 갑갑하게 옥죄어 왔다.

다시금 깊은 공허감이 내 안에 자리했다.

이제야 알겠다.

오래전에 비어버린 그대로 굳어진 마음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나간 과거를 억지로 붙잡아 두고, 복수라는 명목으로 난도질해봤자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나도, 그도, 이미 텅 비어 있었으니까.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마무리짓기 위해, 나는 단검을 들어 그의 심장을 겨누었다.


"......"


그러나 나는 한참 동안 그 상태로 굳은 듯이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모두 꾸며낸 것임을, 이제는 사무치게 잘 알고 있는데도.


순진하게 믿어줬었고,

오랫동안 증오해왔고,

이제는 꺾어져 시들어가는,

어느새 내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그 아이를,

도저히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었다.

그와 함께한 날들은 순수히 행복했었고, 또한 순수히 불행했기에.


나는 쓸모없는 단검을 뒤쪽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붉은 핏물이 찰랑이는 그곳에 몸을 눕혔다.

그저 그의 곁에서, 스러져가는 꽃잎을 바라보며 함께 잠겨갔다.

천천히 식어가는 체온을, 희미해지는 숨결을 느꼈다.

핏빛으로 물든 호수, 그 저편에서.

루시아,

너는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