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의 구름.

 이건 일본의 역사 소설의 거장인 시바 료타로가 쓴 소설로, 아키야마 형제 두사람이 일본 제국군에 입대하여 러일전쟁에 참전하는 이야기다.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고,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분명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선의 입장은 열문장 정도 밖에 묘사되지 않는 경이로운 소설이다. 이 작가 쓰면서 이 서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했나. 양심 어디감.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소설이다. 

 너무나 깔끔하게 조선의 입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들기 때문에. 이 소설의 러일전쟁은 마치 일본과도 관계없고 조선과도 관계없는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같고, 실제로 작가도 그걸 의도했으리라.


 나는 이 소설이 일본 판타지 군대물, 밀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소설은 전쟁역사를 다룬 소설 중 최초로 '전쟁'이 아닌 '행정'에 집중한 소설이기 떄문이다.


 스토리는 다음와 같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일본.

 아키야마 형제는 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다 군대에 입대한다.


 군사 학교에 들어간 덕분에 아키야마 형제는 서양에서 들어온 최신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엘리트 장교가 된다. 한명은 육군 장교가 되고 한명은 해군 장교가 된다. 이들의 재능이 탁월하다는걸 꿰뚫어본 군부는 아키야마 형제를 유학보내 유럽에서 군사학을 배워오도록 명령한다. 아키야마 형제는 열심히 유럽 군사학을 배우고, 일본의 밀정으로써 유럽의 정보를 본국에 보낸다. 아키야마 형제를 비롯한 일본의 밀정이 유럽 배후에서 암약하고 분투한 결과 폴란드는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러일전쟁보다는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니혼진 스고이!

  

 아키야마 형제와 밀정들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일본에 최신 군사학을 전수한다. 그 결과 철을 불태우는 전설의 화약 시모세가 이 세상에 탄생해 일본 해군의 포탄을 강화시킨다. 일본의 과학기술력은 제일이다. 니혼진 스고이 (하지만 작가의 주장과 반대로 시모세 화약은 매우 불안정한 물질이라 그걸 전함에 탑재하면 자침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리고 아키야마 형제는 유럽의 최신 기병술을 도입하여 한반도 북부의 마적을 소탕하는데 성공한다. 니혼진 스고이!


 하지만 이 기병술은 러일전쟁에서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작가도 실드 불가능했는지 기병은 총 앞에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기병을 지휘한 아키야마 형제가 잘못된게 아니라 일본 군대에 기병이란 존재를 남겨둔 구시대 대가리들이 잘못된거라고 실드를 친다. 어쨌든 아키야마 형제가 잘못해서 부하들이 죽은거 아님.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러일전쟁 203 고지전투다. 무려 3만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낸 러일전쟁 최악의 접전지. 하지만 어쨌든 아군의 시체를 밟고 밟고 올라가 이겼쥬. 아키야마 형제는 유능한 젊은이를 만명 단위로 죽게 만든 일본 육군에는 희망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이제 희망이 있는 건 해군 뿐이다. 육군의 썩은 생각을 뽑아내고 해군답게 합리적인 시모세 화약 정신으로 무장해 나아가면 일본 제국은 끝없이 발전할 것이다.


 그렇게 역사가 나아가겠지?


 이렇게 형제들이 믿으며 소설이 끝난다. 



 스토리 요약만 봐도 알겠지만 이 소설은 일본군은 늙은 대가리만 썩어있었고, 아키야마 형제 같은 젊은 세대는 전부 올바르고 선량하고 깨끗했다고 주장하는 소설이다. 그러니 늙은이들은 전쟁에 졌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일본의 젊은이들을 믿어! 이렇게 외치는 진취적인 소설인 것이다. 그래서 대히트를 쳤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일본의 이세카이 군대물과 몹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일개 병사가 모르는 세계의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가서 최신 문물을 접한다. 그리고 기지를 발휘하여 이후 전쟁 정국에 도움이 될만한 역할들을 수행해낸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법으로 무장하여 적군을 농락한다. 하지만 구시대의 상부층이 전쟁을 제대로 못해서 오히려 방해가 된다.


 유녀전기같은 이세계 전쟁물은 이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의 군대물로써 탁월한 점은 현대전의 중심이 '영웅'이 아니라는걸 간파했다는 것. 현대전은 군대라는 거대한 행정조직이 수행하는 것이다. 영웅의 카리스마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은 현대에 없다. 그래서 군대행정이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군이 얼마나 기존과는 다른 강력한 군대가 되었는지를 묘사한다. 이 소설은 전쟁소설임에도 전쟁묘사가 클라이막스를 제외하면 없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의 절반 이상이 군대 행정에 관한 묘사다.

 군대 행정이 얼마나 엉성했는지, 그 엉성했던게 아키야마 형제가 들어오며 어떻게 보완되고 발전해나가는지. 이런 부흥물적인 특색을 띄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대히트를 쳤고 사극으로도 쿨타임돌듯 몇차례나 리메이크 되었다. 오래된 소설이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일본인의 밀뽕을 자극하는 소설이 되었다. 나는 굳이 이 소설을 읽어라고 추천하진 않는다. 이 소설에는 그정도의 예술성은 없다. 한국인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도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발상과 아이디어만큼은 세련되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 패배의 원인을 '늙은 세대' 탓으로 돌려버리고 '젊은 세대'가 이끌었으면 안졌을텐데... 하는 뻔뻔함

 과학기술과 행정력, 교육 수준 등 거대 인프라가 강한 군대를 만든다는 통찰력,

 폴란드 독립은 일본이 배후에서 개입했기 때문에 성공한거라고 주장하는 그럴싸하면서도 돌아버린건가 싶은 국뽕.


 세대갈등, 

 초고속 행정발전,

 배후에서 암약하는 어둠의 실력자들.


 어쩌면 군대물의 재미란 전쟁묘사에 있는게 아니라 저 세가지 요소에 있는건 아닐까.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