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온 죄수에게 이것저것 하는 야겜에 빙의했다. 


정확히는 그 야겜을 캡처했다 주장하는 사람이 올린 스크린샷이었다.


반짝이는 금발과 녹음을 담아놓은 또렷한 눈동자.


스크린샷의 스테이터스 대로 슬렌더한 미소녀가 된 것은 좋은데, 문제는 내가 들어간 몸의 주인은 심각한 범죄자였다.


그것도 전쟁범죄자.


민간인 거주구역 무차별 공격.

공정한 재판에 따르지 않고 게릴라 처형.

게릴라 보복과 무관한 주민 집단 징벌.

민족을 파괴하려는 의도로 집단 살인.


이상이 그녀, 아니 지금은 내가 된 [다이애나 힐하우즈]가 저지른 죄목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이런 잔인한 짓거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지른 범죄가 많은 데다 잔혹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죄수에게 야겜에서 하는 ‘이것저것’이 아닌 재판으로 사형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이건 서다가도 죽넼ㅋㅋㅋ 교수형 땅땅땅


저런 야겜이 실제로 발매되었다 해도 강간보다 사형이 시급하다 생각해 댓글을 달았더니 다음 날 스크린샷 속 전범의 몸에 빙의했다. 


억울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전범에 빙의했을까.


그것도 평범한 전범도 아닌 대량학살마에게 빙의하다니.


최소한 사람을 죽이기 전에 빙의시켜 줬다면 착하게 살 자신 있는데.


죄를 반성하고 갱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최소 무기징역이다.


원작-게임도 아니고 짤에 빙의했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을 이용해 승승장구하긴 커녕 린치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지금 당장 내가 읽었던 소설 속 망나니나 악녀에 빙의시켜 준다면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끼익-


“1811번. 심문 시간이다.”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감방 문이 열리더니 간수들이 내 양 팔을 잡고 수갑을 채웠다.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나라도 눈앞에 다이애나가 있었다면 비슷한 시선을 보냈겠지.


문제는 내가 그 다이애나 본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받은 심문과 간수들의 대화를 통해 드문드문 듣는 소문에 의하면, 다이애나는 전범집단의 행동대장격 인물로 과격한 행동 덕분에 같은 전범들조차 그녀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다이애나가 죽인 엘프들만 세어도 마을 하나를 채울 수 있었다고 하니 피할 만 했다.


철컥.


좁은 심문실의 유일한 광원은 깜빡거리는 형광등 뿐이었다.


그녀의 기를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둬야 했단다.


“죄수번호 1811번 입장입니다.”


간수들이 나를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천신의 가호가 있기를.”


눈앞에 있는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빙의한 직후 지금까지 나를 심문한 심문관은 죄다 남자 각성자, 그것도 전투 스킬이 있는 B급 이상 헌터였다.


심문관들은 하나같이 다이애나가, 내가 지은 죄를 인정하라며 윽박질렀다.


처음에는 빙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변명했고, 그 다음에는 침묵을 고수했다. 어제 심문에서 내 영혼이 다이애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 주장했더니 각성자 연합 측에서 작전을 바꾸기로 한 것 같았다.


새하얀 베일과 은발, 그리고 품이 넉넉한 사제복.


딱 봐도 나 성녀요, 라고 말하는 듯한 복장이다.


설마 형장으로 끌고가기 전 최후의 자비로 성직자를 보낸 걸까. 


그럴 리가. 나 같아도 다이애나 같은 미친 학살범에게 자비를 주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성녀님인가요?”


“그리 부르는 사람이 많죠. 천신의 종 가브리엘라라고 합니다, 다이애나 힐하우즈 씨.”


성녀 가브리엘라는 은은한 미소를 띄우며 인사했다.


“당신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왔습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건가요?”


“일단은요.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것은 천신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니…”


그녀는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읊조렸다.


가브리엘라의 대답에 눈물이 고였다. 이 세상에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조금은 희망을 품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평생 감옥에 처박히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고 싶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


 누가 봐도 AI 딸깍질한 미소녀 옆에다가 야겜 스테이터스 적어 둔 스크린샷에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이애나로 살면서 겪은 18번의 심문을 받는 동안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이 세상은 나치 독일이 아닌 각성자와 이민족을 배척하는 ‘정상인 국가’가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세계였다. 


말이 좋아 배척이지 유대인 청소나 생체실험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집단이 바로 이 ‘정상인 국가’였다.


상태창도 없고 이종족의 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인 ‘정상인’들의 낙원을 만든답시고 각성자와 이종족을 학살하는 것이 옳은 건가. 


대충 이 ‘낙원 만들기’의 예를 들어 보자면 눈 앞에 상태창 뜨거나 증조부모가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이면 가스실로 끌고 가는 식이었다. 


다이애나는 이 집단 수괴의 외동딸이자 최측근이었고.


각성자가 생기면 비각성자들이 차별받는다고 하지만, 도대체 어떤 차별을 겪으면 이런 악마가 탄생하는지 참 궁금해졌다. 


 “일단 당신의 인생사를 되짚어 보죠. 모친께서 미등록 수인 각성자에게 살해당해 각성자와 이종족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 기억하고 계시나요?”


“아니, 애초에 내가 겪은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합니까.”


아무래도 말만 믿는다 했지, 성녀는 ‘내’가, 아니 다이애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깔고 들어가는 듯 했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 크림색 빛무리가 몰리더니 그 빛무리가 내 머리에 옮겨가 머물렀다. 


“어라? 진실이네요?”


성녀는 정말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한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다이애나의 몸은 초능력도 상태창도 없는 100퍼센트 비능력자라 성녀가 어떤 능력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성력을 사용한 거짓말 판독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 이제는 믿어 주시는 건가요? 저는 이세계의 한국, 아니 여기서는 대한제국인가. 어쨌든 그곳에서 살았고 [한국말도 할 수 있어요.] 주소는 서울, 아니 한성이었고 이름은 김성환입니다. 그리고 대림초등학교를 졸업해…”


“그 정도면 괜찮아요. 그럼 정리할게요. 다이애나 씨, 아니 성환 씨는 전범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누명을 벗고 싶다는 거죠?” 


나는 성녀가 내 말을 믿든 말든 전생의 모든 개인 정보를 읊어 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잡을 수 있는 동앗줄은 그녀밖에 없었다. 


다른 심문관들은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능력부터 휘두르려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좋아요. 최대한 돕겠습니다. 하지만 나쁜 소식이 있어요.”


“나쁜 소식이라뇨?”


“상부에서 당신에 대한 고문을 허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검사 결과로 기억상실증 판정을 확정하고, 당신이 저질렀던 일의 기억을 과거부터 하나하나 되살릴 거고요.”


“고, 고문이라뇨?”


내가 묻자 성녀의 눈초리가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 분노인지 경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양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제가 성녀라고 해 봤자 재판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성환 씨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버텨 주실 수 있을까요?”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는 듯 두근거렸다. 고문이라니. 다이애나가 되기 전 가장 아팠던 기억은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던 기억이었다. 


아무리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도 고문은 비슷할 터였다. 


어떤 고문을 받든 자전거에서 넘어진 것보다는 고통스럽겠지. 아니, 초능력이나 마법이 존재하니 더 심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여자라는 이유로 성고문까지 가한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제 힘이 부족해서 미안해요.”


허나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하는 성녀 앞에 대고 고문은 싫다고 소리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심문이 끝난 후, 나는 감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까득, 까드득.


성녀가 내가 다이애나가 아님을 증명해 준다 노력한다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있는 일은 없었다.


언제 고문이 시작되지 몰라 손톱만 씹어 대고 있었다. 


당장 오늘 밤? 내일? 아니면 고문하고 바로 처형장으로 데려가는 걸까?


[소등한다.]


수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순간 소등을 알리는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스위치가 내려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전범수용소 안의 불이 꺼졌다. 


엷은 마력등의 빛마저 꺼지자 감방 안에 어둠이 깔렸다. 


터벅, 터벅.


순찰을 도는 간수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냥 죄를 인정한다 말하고 덜 고통스럽게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끼이익-


갑자기 감방 문이 열렸다. 


그림자 여러 개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귀신인가 싶었지만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다이애나 힐하우즈에게 손을 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는데.”


고문? 강간? 뭘 하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주면 안 되는 걸까? 


너무 무서워.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살던 고시원보다 좁은 감방. 도망칠 구석도 없을 뿐더러…


“아, 자네도 알고 있었구만. 소문이 참 빨라. 정말 어떻게 하든 좋다, 이거지?”


콰악-


그들 중 하나가 내 머리를 벽에 박고 바로 나를 구속했기 때문이었다. 


각성자 연합의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둘러싸인 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 강간만은 제발… 아니 살려 주세요…”


짜악-!


귀가 뾰족한 군인이 동료들의 어깨를 밀치고 나와 내 뺨을 후려 갈겼다. 


“개소리 하지 마! 내 가족이 죽는 건 괜찮고 네년이 아픈 건 싫다는 거냐!”


“으윽!”


눈앞에서 별이 튀더니 맞은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닮은 소년소녀들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라임색이 섞인 산뜻한 금발에 귀가 뾰족한 아이들.


아이들은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네가 우리를 죽였잖아.]


[너는 왜 아직도 아프지 않은 거야?]


[불공평해.]


[불공평해.]


[불공평하다고!]


“머, 머리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이 죄수복이 벗겨지고 발길질이 복부를 향해 날아왔다.


“제발 그만…”


의식을 잃기 전 날 범하려 하던 그는 울고 있었다. 


*

 여름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따사로운 햇빛이 온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마을 옆에 있는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노는 엘프 아이들은 없었다. 


마을회관 앞에 늘어선 군부대 앞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부하가 경례를 올렸다. 


[충성! 정상인에게 영광을!]

[비정상인에게는 죽음을.]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이게 정상인 국가군의 구호인가.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설마 다이애나의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건가?


[엘프 보호 구역을 점령했습니다. 각성자들과 성인들은 전부 사살했고, 남은 것은 애들 뿐인데 어떡할까요?]


나는, 아니 다이애나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엘프 아이들을 차갑게 내려다 보았다. 


[음…]


안 돼.


죽이지 마.


아무리 능력자 때문에, 이종족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 해도 이건 정당한 복수가 아니었다.


애초에 어머니를 죽인 각성자는 수인이었다면서. 


왜 애꿎은 엘프를 죽이려고 하는데?


[전부 회관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아무리 어리다 해도 지구에 무단침입해서 자원을 뜯어먹는 쓰레기들의 씨앗이다. 불로서 정화시키는 게 옳아.]


나는 열심히 다이애나를 말렸지만, 그녀는 소년소녀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알겠습니다. 끌고 가!]


부관의 한 마디에 군인들이 아이들의 팔이나 머리채를 잡고 마을회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창문을 막아!]


시끄러운 망치질 소리와 함께 창문이 나무 판자로 막혔고, 군인들은 회관 전체에 기름을 뿌렸다. 


[남은 애새끼들은 없겠지?]


[그렇습니다!]


휙-


아이들이 전부 회관 안에 갇힌 것을 확인한 다이애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무심하게 기름이 묻은 쪽으로 던져 버렸다. 


화르륵-


불이 퍼져 나가자, 창문 사이로 목숨을 구걸하는 아이들의 비명이 들려 왔다. 


[싫어! 엄마아!]


[살려 주세요!]


[꺄아아악!]


쾅쾅쾅!


아이들이 작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을회관 앞에 모인 군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잘 타네.]


*


 “허억!”


다이애나의 회상이 끝나자, 나는 악몽을 꾼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의식을 잃은 사이 강간을 당한 듯 다리 사이에 정액과 피가 고여 있었다. 


“이, 이런 건 싫어…”


배와 가슴에 찍힌 멍을 바라보며 양 팔로 나 자신을 끌어안았다. 


내가 다이애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기억을 계속 봐야 한다고?


고문까지 당하면서?


“죄수번호 1811번. 심문 시간이다.”


“오지 마!”


오늘은 고문을 당하는 걸까. 아니면 또 강간을 당하는 걸까.


심문실로 끌려가기 싫어서 침대 프레임을 잡고 버텼지만 간수들은 내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내 인권 따위는 존중해 주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줄줄 끌려갔다. 


점호 시간인 듯 죄수들이 감방 바깥에 나와 있었고, 모두가 알몸으로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나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단 한 명도.


“저런, 당신에게 신이 자비를 내리시길.”


성녀 가브리엘라는 엉망인 내 꼴을 보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성녀님, 제발 살려 주세요.”


나는 무릎을 꿇고 성녀의 사제복 자락을 움켜잡았다. 


나를 이 지옥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피와 정액 범벅이 되어 꼴이 퍽 추레해졌지만,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쉬잇. 불쌍한 어린양이여, 두려워 하지 말아요. 시련 끝에는 꼭 영광이 온답니다.”


“시련이고 뭐고 난 죽기 싫어요!”


아기처럼 엉엉 울면서 성녀의 발끝에 매달렸지만 그녀는 조심스레 나를 떼어내고 내 귀에 속삭였다. 


“고문이 싫다면… 인정하는 ‘척’을 하면 어떨까요?”


“나, 난 그런 짓은 저지른 적 없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런 끔찍한 짓을 해요? 인정 못해요. 절대 못해!”


성녀를 밀치고 고함을 쳤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나를 달랬다. 


“진심으로 인정하라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전범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믿고 당신이 믿고 있잖아요? 인정하면 적어도 고문은 중지될 것이랍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당신의 결백을 밝혀 드릴테니, 절 믿어 주세요.”


*


 성녀의 제안을 받고 이틀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결백을 주장했다. 


전쟁 범죄자 다이애나 힐하우즈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무고한 김성환이 그녀의 몸에 갇혔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가?


…그런 생각으로 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국가에서 평범하게 살던 나는 이틀동안 계속되는 고문을 버틸 수 없었다.  


그제는 손톱이 뽑혔다. 


다이애나가 포로로 잡아 사지가 찢겨 죽은 각성자의 동생이 엄지손톱을 뽑았다. 


다른 손톱들이 뽑히지 않았다는 말은 필요 없었다.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은 열 명이 넘었으니까.


어제는 각성 능력으로 고문당했다. 


정상인 국가, 아니 사탄이 울고 갈 전범집단은 각성등급이 낮은 각성자나 힘없는 이종족 아이들을 주로 죽였다. 


아이를 잃은 각성자 어미가 물 마법으로 호흡기를 막았다.


인간과 사랑해 하프엘프 아이를 얻은 엘프 아비는, 아이를 죽인 다이애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세계수의 처벌을 각오하고 넝쿨로 내 목을 졸랐다. 


강간과 폭행은 당연했다. 


다이애나의 몸에 쏟아지는 수많은 폭력과 비난.


적어도 인정하면 성녀는 나를 보호해 준다 했으니까. 


운이 좋으면 내가 다이애나가 아님을 증명할 수도 있어.


그날 심문일.


나는 성녀에게 모든 죄를 인정했노라 답했다. 


*


 -피고인 다이애나 힐하우즈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땅, 땅, 땅.


법봉 소리가 법정에 울려퍼졌다. 


이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그때 방청석에 있는 성녀와 눈이 마주쳤다. 


간수들의 팔에 잡혀 끌려가기 전,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성녀 가브리엘라에게 질문했다. 


“성녀님, 이제 전… 벗어날 수 있나요?”


"저 쓰레기 같은 년!“


“벗어나긴 어딜 벗어나!”


선고를 받자마자 그런 질문을 던진 내게 각성 능력과 마법으로 던진 오물들이 날아왔다. 


하지만 이제 괜찮았다. 


인정했으니까 더 이상 고문은 없을 터였다. 


성녀는 미소짓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더러워진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입술을 열었다. 


“그걸 믿었어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내 앞머리를 거세게 잡아챘다. 


“이 전쟁 범죄자.”


피잉-


그 순간 성녀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어?”


법정이 새하얀 빛으로 덮이고, 모든 소리가 꺼졌다. 


*


 [엄마, 엄마아아아…]


[가브리엘라, 울지 마렴. 천신님께서 너를 지켜 주실 거야.]


성녀와 같은 은발에 여우 귀를 단 수인이 어린 여우 수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개틀링 건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희 같은 짐승에게도 모정이 있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우린 사람이에요. 모습이 달라도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인데, 같은 사람을 짓밟고 죽이려는 당신들이야말로 비정상이야.]


피식.


다이애나는 여우 여인을 비웃었다. 


[내 어머니를 동족의 죄를 짊어지게 해 주는 데 감사해라.]


각성하지 않은 인간이 강력한 신체 능력을 가진 수인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타타타타탕-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지를 자른 뒤 신체가 버틸 수 없는 만큼의 총알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여인의 딸은 총알을 한 발 맞을 때마다 고깃덩어리가 되어 가는 어미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엄마아아아아!]


튕겨 나간 총알에 맞은 소녀가 피를 줄줄 흘리며 어머니를 불렀다. 


소녀는 울다 말고, 눈물을 흘리며 웃는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조금은 기억이 돌아오고 있나요?”


“분명 내 말이 진실이라고 했잖아요. 날 믿어준다고 했으면서!”


성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여우 수인 소녀는 내가 화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스레 베일을 벗었다. 


아름답지만 찢어져 있는 오른쪽 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나를 믿어준다고 말했던 사람이 다이애나가 죽인 사람의 딸이라니.


“믿어줘요? 어머니를 죽인 당신의 말을? 체포 당시 머리를 부딪혀 기억상실에, 망상증까지 앓고 계시더군요. 자신을 다른 세계의 무고한 이라 믿고 있으니 ‘진실’을 말할 수밖에.”


“아니야. 나는 김성환이야. 다이애나같은 전범이 아니라고.”


“심신미약으로 인한 참작은 없어요. 죽음으로 사죄하도록 하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녀의 배신조차 그저 다이애나의 업보라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세뇌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의 그녀는 내 편을 들어 준 적도 없었지만.


*


 결코 오길 바라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토록 오길 바랐던 처형 날이 다가왔다.


곧 목이 매달릴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간수들을 제외하면, 나를 배신했던 성녀밖에 없었다. 


목에 줄이 걸리고, 간수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질문을 듣자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나 때문에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내가 무고할지라도, 나는 그녀 때문에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을 존중해야 했다. 


어차피 고통받는 것은 다이애나의 몸이지, 내 영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다른 세계의 무고한 자에게 떠넘긴 비겁한 인간이었다. 


그녀가 죽음으로서 나는 다이애나 힐하우즈의 몸 속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망상장애라서 죄송합니다.”


-


주인공 정체는 상상에 맡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