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네가 잘못 한거잖아? 그렇지?"


여성이 간헐적으로 몸을 떨면서 내게 되물었다.


말 중간중간 '힛'하는 웃음이 들어가 여지없이 정신병자 같이 보였다.


그녀는 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묻은 칼날에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살짝 베어 보이며 물었다.


"흐, 히히. 이러면 우리 두명도 같은 피가 흐르는거네?"


미친년.


내가 속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쌍방이 아니라 일방 아닌가?


어찌됐던 저 년의 피가 내게 들어오진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 앞에 번개불이 튀었다.


"으윽···!"

"하, 하아···. 이제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


여성이 부르르 몸을 떨며 환희했다.


일방통행은 취소다.


내 내장이 갑작스러운 칼의 피스톤질에 '응앗, 거기는 안돼엣♡'을 외쳤다.


한 세번정도 당한 것 같다.


하긴, 나는 지금 몸도 마음도 순결한 청년이었으니 처음에 피가 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 세계에선 얼마나 순결했는지에 따라 흘리는 피의 양이 달라지거나 하는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내 순수성은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작 세번의 피스톤질만으로 피가 이렇게나 콸콸콸 흘러나오지 않는가!


아찔해지는 정신에 내가 휘청거리다가 내 피 위로 철퍽 넘어졌다.


그런 나를 덮치며 여성이 흐히힛 하고 웃었다.


이후 내 피가 묻은 손으로 내 얼굴을 사랑스럽다는듯 쓸어내리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어졌어."


그녀가 웃었다.


손가락을 접으며 말한다.


엄지.


"같은 학교를 다녔잖아? 그러니까 학연."


검지.


"방금 피가 이어졌으니까, 혈연."


중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지? 지연."


약지.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애연."


소지.


"마지막으로··· 우리는 같이 회귀하니까, 이걸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뻔뻔한 태도다.


매번 자기 입으로 똑같이 말해놓고 묻는다.


내 입으로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이겠지.


물론 들어줄 생각은 요만치도 없다.


나 또한 피식 웃으며 중지를 들어올렸다.


"글쎄, 악연?"

"아, 그래 운명이 좋겠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고 만날 운명이었던거야."

"퍽이나."


서서히 의식이 꺼진다.


소녀, 한민아는 그런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내 사랑. 7년 6개월 '전에' 다시 보자. 금방 따라갈게."


좆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죽음의 향취가 코를 간지럽히고.


암전.


잠시 후 뻐근한 정신과 그에 반비례하듯 태평하기 그지 없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저 미친년이 죽이기 전에 구해야 할 인물 목록이···."


성녀 아스텔.

용사 엘리제.

현자 디웬하임 폰 에르트.

검귀 얀.

하이 엘프 공주 나스샤.

몽환술사 『■■■』.

방랑자 드워프 로엔.

수인회 용병대장 키티.


"젠장··· 더럽게 많네."


내가 노트에 이름을 적어 정리하면서 투덜거렸다.


그 노트의 끝자락에


[이번에 우연히 만나서 구해준 소녀.] 라고 날림으로 적은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회귀 후 가장 처음 구해야 하는 것은 '검귀'다.


그 녀석은 모든 인물중 가장 취약하고 가장 접근하기 쉬우니까.


노예 시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