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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누가 '캐릭터가 저절로 움직인다'는 현상에 대해 신기하다고 쓰는 사람이 있어서 써볼랬다가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신변잡기 정도로 대폭 깎아냄.


난 어차피 소설 작가도 아니고, 작가라는 직업도 없고, 단순히 고전적인 시나리오 창작법에 맞춰서 '캐릭터가 저절로 움직인다'는 걸 설명하고 싶어서 써볾...... 사람마다 글 쓰는 스타일이 있고 이건 그냥 이런 식으로 쓰는 법도 있다는 정도로 알면 좋을 것읾......


1. 우선, 동기가 중요함. 쓰고 싶은 배경이나 넣고 싶은 인물상, 넣고 싶은 플롯이나 핵심 설정에 대해서 방향성을 설정함. 배경을 위주로 쓸 거라면 해당 배경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베이스가 될 것이고, 인물 위주라면 등장인물들 간의 서사가 주가 될 것임. 그리고 플롯 위주라면 미리 준비된 것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역동성이 중심이 될 수 있음.


1-1.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역사와 이야기가 시작되는 폭발점이 있어야 함. 극에서는 보통 갈등을 위주로 전개하는데, 어떤 인물들 간에 어떠어떠한 역사가 있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떤 일이 발생했고, 이게 하나하나 꼬이고 쌓인 끝에 그 갈등이 폭발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갈등의 폭발점임.

(이건 효율적으로 이야기의 폭발력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무대극의 지시문인 희곡에서는 갈등과 사건을 최대한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포인트를 세팅하고 압축시켜놓는 거임. 영화 쪽에서 이런 고전적인 극작법을 많이 활용하는데, 회차 수나 이야기를 그때그때 변칙시킬 필요성이 있는 TV드라마에선 이걸 개 같이 많이 만들어서 꼬아놓고 그래서 보통 드리프트를 많이 치고 사공이 많아지면서 재미가 없음, 소설에선 앞뒤로 빼서 조절하기도 함.)


1-2.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아주 멍청하거나 독특한 시도를 하는 작가가 아닌 이상 설정된 역사에 대해 구구절절이 다 풀어서 쓰지 않음.


2. 처음부터 빡세게 설정할 필요 없음. 어차피 쓰다 보면 어느 정도 바꿀 일이 생길 거임. 배경을 위주로 짰다면 여기에 집어넣으면 재밌어질 것 같은 인물이나 사건을, 인물을 위주로 짰다면 이 인물이 들어가면 재밌을 것 같은 세상과 맞닥뜨릴 이야기를, 플롯을 위주로 설정했다면 이 플롯이 정상적으로 구동하기 위한 인물과 배경을 물색함. 큰 틀은 변할 수도 있긴 한데, 요컨대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이 되었는가가 중요함.


3. 그리고 이게 재밌을 것 같고, 내가 써도 괜찮을 것 같고, 움직여도 좋을 것 같을 때까지 미세 조정을 함. 모르는 게 있으면? 전부 다 임기응변으로 때울 생각이 아니면 조금씩 배경 지식을 끌어와서 긴지 아닌지 재본다. 배경은 주로 이게 가능한 환경인지, 인물은 주로 이 캐릭터의 자라온 환경과 핵심 욕망이 무엇인지라던가 각 캐릭터들 사이에 쌓아온 관계가 중요함, 플롯의 경우 꼭 거쳐야 할 사건은 무엇이며 거기까지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위주로 나눠서 생각해보면 판단이 쉬움. 어차피 중요한 건 세부 설정 같은 게 아니라 이야기의 목표와 흐름임. 설계한 내용과 넣은 재료가 올바르다면 원하는 궤적을 그리겠지... 세부 설정은 여기에 장애물을 놓거나 방법을 제시하거나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연출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을 돕는 물길을 트는 역할을 함.


4. 배경 상으로 등장인물이 움직일 수 있는 바운더리와, 설정된 인물이 행동하는 근원적인 욕망과 상황에 따른 힝동의 벡터가 설정된 경로대로 움직이면서 어느 정도의 유도리가 있을지를 봄. 설정을 잘 했다면 요소요소가 각 내용들의 이정표 역할을 할 것임.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캐릭터들이 가는 길이 설정된 범주 안에서 납득이 갈만한 상황인지 검토함. 작가의 인생이나 경험담을 대입시킬 수 있는 인물이면 시뮬레이션이 훨씬 수월함.


5. 여기까지 제대로 왔으면 글을 써서 테스트해봄. 일단 쓰고 싶은 내용을 다 풀어봄. 그리고 깎아내야 할 부분들을 깎아본다. 여기까지 와서 준비가 안 됐다? 부족하거나 과도한 부분이 있는 것이니 뼈대 자체에 다시 집중한다.


6. 이거다 할 첫 도입부 문장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굿 럭임.


7. 캐릭터가 적당한 장소에서 강한 동기와 목표를 갖고, 적당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작가가 특정 상황에 처한 이 캐릭터의 마음속을 공감할 수 있다면, 캐릭터는 작가가 억지로 잡아끌려고 해도 자기 의지에 맞춰서 저절로 움직임. 작가의 의지보다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더 설득력이 실리는 것임. 그럼 보통 글쟁이들은 어떻게 하느냐? 예정을 얼마나 틀 수 있느냐 어디 즈음에서 수용자가 ??? 하지 않는 수준에서 안착할 수 있는지 견적을 짜야 돼서 앞으로의 내용을 재검토핢...... 수구. 어려운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이치는 간단하고, 어떤 분야에서는 못하면 폭망해버리는 것이기도 함......


7번 하나를 위해서 열심히 똥글을 썼얿...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