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청춘도 끝나가는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에.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보지 못한 주인공.


"하아... 나한텐 어디 그런 기회 안 오려나, 막..."


방학식이 끝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며, 막연한 상상을 해본다.

여느 러브코미디 라노벨이라던가, 만화라던가...

항상 나오는 상황들. 남주인공이 히로인을 우연찮게 만나 꽁냥대고... 끝내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그럴 리가 없지, 이건 현실이니까."


그리고 난 애초에 매력 같은 거 없는,

숫기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인걸.


"나도 나에게 호감 있는 예쁜 미소녀 하나 정도만 주변에 있으면 좋을텐데..."


그 어느 라노벨 남주인공, 만화 남주인공보다 잘 해줄 자신 있는데.

나도 상황만 주어진다면 정말 잘 해볼 수 있을텐데...


방과후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동아리실,

판타지 세계의 마을,

비오는 하굣길,

갑자기 맡게 된 편의점 알바.


등등,

그 어떤 상황이더라도, "순애" 가 되는 시나리오는 머릿속에 전부 그려지는데,

어째 내 삶만큼은 그런 망상과 시나리오 대로 되지가 않을까.


좌절하며 얼마 남지 않은 청소년기를 이렇게 홀로 허비해버린 다는 것은 아쉬웠다.

아마 올해 여름방학에 커플들은 다들 바다로 놀러가는 동안 또 어디 혼자서 박혀 있겠지.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너무나 막막했다.


그런데...


여름날, 잔뜩 끼어있던 어두운 구름이 갈라지며 한 줄기 햇살이 내리쬐는 것과 같이,

그리고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주인공의 운명은 바뀌게 된다.



"안녕. 혹시, 너의 이야기를 바꾸고 싶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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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렇게 시작하는 차원유랑물 비슷한 게 보고 싶다.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 근처에 생긴 어느 작고 허름한 영화관에서 빼꼼 나와있는 이질적인 미소녀.

편한 옷차림, 백발에 둥그런 안경을 쓴, 지적으로 보이는 그녀는 주인공을 일상이 따분하지 않냐며 영화관 안으로 안내함.


사실 그곳은 "모든 순애가 시작되는 곳". 순애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강한 사람만이 인지할 수 있는 기술이 적용되어 있는 곳이라 지금까지 주인공이 이곳을 보지 못했던 거임.


여러 평행차원의 순애커플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차원의 틈새이자 망루 같은 곳이었고,

여러 커플들이 원만하게 성사되게 만드는 것이 소녀에게 부여된 임무였기에 이 영화관을 지키고 있는 거였음.

그런데 최근, 건물세도 잘 내지 못할 정도로 소녀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함.


근원은 여러 차원들이 NTR남들의 난입이나 백합커플의 남자 난입으로 인한 암컷타락, 급작스러운 하렘드리프트로 인한 히로인과의 순애관계의 깨짐 등... 여러 사유로 이 영화관을 유지하고 있는 "순애력" 이 떨어지는 거였음

이대로 가다가는 본인마저 소멸할 것을 직감한 소녀가 주변에서 순애에 대한 열정과 갈망, 절실함이 가장 강한 주인공을 끌어들인것임


솔직히 말해서, 영화관의 주인이 따분한 일상에서 남주를 구해주는 마이페이스에 상큼한, 특별한 미소녀라는 점에서 "보이 미츠 걸" 클리셰가 충족된 걸 보고 매우 들뜨기도 했고, 순전히 차원의 틈새라는 개념도 흥미로웠기에 소녀를 돕게 되는 주인공.

둘은 영화관 내부의 영사기와 필름을 이용해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순애커플" 들의 성사를 돕게 됨.


로판 세계관에서 억울하게 누명 씌워져 죽은 영애를 변호해 죽지 않게 함으로써 그녀와 약혼자의 재회를 흐뭇하게 몰래 지켜보기도 하고,

헌터물 세계관에서 주인공이 부상에서 회복 중인 동안 혼자 게이트를 뛰는 히로인이 금태양 길드에게 붙잡혀 강간당할 위험을 막기 위해 주인공이 직접 초월급 거대괴수에 빙의해 나타나 지켜주기도 하고,

추리물 세계관에서 애초에 탐정이 다른 사건을 해결하느라 너무 바빠 지켜주지 못했던 커플을 주인공과 영화관 소녀 듀오가 탐정과 그 조수를 자처함으로서 미스터리를 해결해 주고,

학원물 세계관에서 이미 한 100화까지 순애 빌드업을 쌓다가 히로인이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바로 다음날 남주를 BL드리프트로 암컷타락시켜서 극태쥬지에 굴복하게 만든 작가를 직접적으로 조져서 전개를 수정한다던가...

뭐 그런 식으로 여러 순애커플들을 구해 나가는 차원유랑물을 보고 싶다.


주인공은 매번 영화관을 통해 모험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소녀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호감에서 사랑으로 바뀌어 가고,

자신은 순애의 조율자이자 관찰하고 돕는 자이기에 사랑을 해서는 안되지만 이번만큼은 지켜보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직접 사랑을 받는 입장으로서 순애물에 등장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는 소녀.

둘 다 매 모험마다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낯뜨거운 해프닝도 일어나지만,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며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두는 것이 보고 싶다.


주인공은 역시 자신에게 영화관 소녀는 과분하며, 애초에 일을 도와주겠다고 시작한 건데 고백했다 차이면 얼마나 자신을 역겨운 속물로 볼지 생각하고, 영화관 소녀는 주인공을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요새 점점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고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고...

그런 착각과 오해가 맞물리다가, 마지막에 결국 한 번 거하게 터졌으면 좋겠다.


이제 주인공의 도움은 필요 없겠다고. 내가 혼자서 일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자신의 능력, 혹은 자신 그 자체를 부정당했고 실연당했다는 슬픔에 주인공은 결국 영화관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고,

그가 역시 내 망상이 너무 심했나 보다, 김칫국부터 마신 탓일까- 하고 자책하며 여름방학은 끝을 맞이하게 됨.


그러나 그로부터 3일 정도가 지나고, 소녀는 점점 의문을 느끼기 시작함.

분명 혼자 일하는 편이 그에 대한 생각도 적어지고 움직이기 편해서 능률이 더 높을 텐데.

실제로 해결하는 사건의 건수도 그와 함께 일할 때보다 더 많은데.

어째서,

어째서 마음이 이렇게 공허한 걸까.

어째서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걸까.


또 다른 이변도 생김.

그녀는 원래 영화관이 붕괴하고 있을 때 신체능력이 살짝 약화되어 병약한 정도의 지장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오히려 영화관이 복구되고 대성하고 있는 지금쯤이면 다 나았어야 할 신체가 더 병약해져서 간헐적으로 기침을 해 대고, 걷기조차 힘든 거임

원래 생글생글 웃는 것 외에는 다른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우울과 슬픔을 느껴 자신도 어째서 우는 지 모른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됨.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이 모든 허전함의 원인이라 생각되는 주인공을 다시 찾아가고자 할 때, 순애력의 부족으로 쓰러지게 됨.

몸이 바스라지며 빛을 잃어가고, 아, 결국 나는 내 사명을 이루지 못했구나- 하며 소녀가 사라져갈 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손이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동시에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안음.

역시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며, 내가 널 어떻게 버리고 도망갈 수가 있냐며...


당연하게도 그 손길의 주인은 주인공이었고, 영화관 업무를 그만둔 이후로 더 이상 그곳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소녀와 똑같이 이유 모를 그리움과 애절함을 느끼다가 다시 한 번 그 거리에 이끌려 돌아오자 영화관의 입구가 보이게 되었던 것임.


사실 소녀가 쓰러질 정도로 병약한 건, 사건 해결이 부족해서가 아닌 본인이 주인공을 거절하고 밀어내며 순애 커플을 깨버렸기 때문.

그래서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둘은 서로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며, 이젠 의무고 뭐고 상관없이, 설령 너에 대한 생각으로 내 일을 망치게 되더라도 널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며 동시에 고백을 박음.


그렇게 다른 순애커플들을 지켜오며 자신들의 행복은 등한시하다가, 결국에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로서 자신의 커플에게 이상적인 순애 엔딩을 내 준 영화관 소녀는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되고, 영화관에 매여있던 의무와 속박에서 풀려나 평범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됨.

물론 자신을 언제까지고 바라봐주고 몇 번이고 구해준 주인공과 함께.


최후의 순애는, 나 자신이 순애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