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가 죽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노랗게 변색된 종이 한 구석에 적힌 글귀였다. 손에 눌려 주름진 신문은 이미 그 글씨가 전부 바래서, 고작해야 그 여섯 음절의 글자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 이 글귀가 신문에 나타났을 때, 과연 누가 이 짧은 문장을 믿었을까. 용사였다. 성검을 뽑아 마왕과 맞서 싸우고, 조금씩 그림자로 물들어가는 세상을 구하려하는...그런 숭고한 인물이었다. 막강한 힘을 가졌고, 동시에 그와 같은 힘을 지닌 동료들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승전보를 전해주던 용사가 갑자기 죽었다니, 믿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할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모두들 생각하지 않았던가.

 

화륵, 어두웠던 숲 속에서 자그마한 불씨가 피어올랐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벌레 때들이 그 불꽃에 달려들어 타죽기 시작했다. 참으로 쉽게 죽는다고 생각다가, 이내 그것이 무언가와 비슷함을 떠올리곤 쓰게 웃는다.

 

아무 소란 없이 평화롭던 세상이 망가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푸른 숲이 새까만 재로 변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술잔을 나누던 이들이 서로 검을 맞대었다. 재앙, 그리고 분란. 한 때 집이라 불렀던 곳은 이미 사라져 늪이 된 지 오래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어떻게든 더 놀아보려 했던 친구들은, 그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죽었으리라. 다만 조금 덜 아프게 죽었기를 바랄 뿐.

 

타오르는 모닥불 아래에 놓인 검이 불꽃에 반짝였다. 낡아 보이는 검집과는 달리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는 검은 꽤 특이해보였다. 새빨간 홍염에 반짝이는, 그 푸른 검신. 남자, 아덴은 그 검을 빤히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손을 뻗어 장작을 채우는 남자의 옷차림은 허름했다. 어쩌면 대륙에 그나마 남은 모험가들이라 불리는 족속들의 일반적인 차림일지도 몰랐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 장갑. 거기에 찢어진 부분을 어떻게든 기워낸 흔적이 역력한 옷. 그 위로 남은 새까만 흔적은, 남자가 방금까지 마물과 싸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 숲은 고요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달과 모닥불. 아덴은 가늘게 뜨인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낙엽이 밟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도 울려 퍼졌다. 

 

투두둑-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적을 깨는 돌 굴러가는 소리. 갑작스레 훅 하고 불어온 바람에 모닥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금 찾아온 어둠 속에서 금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나, 둘.”

 

작게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의외로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서늘한 빛을 발하는 눈이 주변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한순간 느슨해졌던 감각이 다시금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커졌던 동공이 수축하며, 힘을 받은 근육이 팽창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고요함은 싸움의 전조였다.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종말에 가까워진 이 세상에서, 이런 정적은 늘 죽음을 불러오곤 했다.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힌 검이 빛을 발했다. 달빛에 내리 앉은 그림자를 걷어내며,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키에엑-!

 

어두운 숲에서는 그 어떠한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감각은 이 숲에서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아덴은 뒤로 가볍게 한 걸음 물러섰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나무 하나에 손톱자국이 깊게 패였다.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기억하며, 그 방향보다 조금 더 앞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쌔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시원하게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부딪혀, 이윽고 먹물과도 같은 검은 색의 액체가 찍 하고 터져 나왔다. 

 

스펙터.

 

형체가 없는 존재였으나, 아덴은 침착하게 몸을 움직였다. 이미 한 번 닿았던 존재를 놓칠 만큼은 아덴은 미숙하지 않았다. 이미 이 숲속에서 홀로 몇 년을 살아왔기에, 지그시 감긴 눈과는 달리 귀는 스펙터를 확실하게 감지했다.

 

“하나.”

 

스걱-

 

가볍게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서 검은 물이 쩍쩍 흘러나왔다. 형체조차 없는 존재였으나, 제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에 물들여진 스펙터의 모습이 조금 씩 보이기 시작했다. 휘두르던 검을 고쳐 쥔 아덴이 이내 뒤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둘.”

 

무언가를 향해 파고들어가는 이질감과 함께 다시금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나무에 박힌 검에 매달려 있는 것은 스펙터였으니, 애처롭게도 울부짖는 스펙터를 아덴은 가볍게 베어냈다.

 

철퍽.

 

마치 두꺼운 뱀처럼 생긴 스펙터는 이윽고 거뭇한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바닥에 떨어졌다. 허공을 부유하던 날개는 이미 잔인하게도 찢어져, 날개를 뜯어내 속을 뒤적거리던 아덴의 손에 이윽고 자그마한 보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라색의 빛을 내뿜는 그 보석은 무엇보다도 불길해 보였다. 이 끔찍하고도 저주스러운 존재가 품고 있는 유일한 가치. 마정석을 품속에 집어넣은 아덴이 다시금 장작 더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스펙터의 시체는 이내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던 것들이 아니었기에, 원래 왔던 마왕의 거처로 돌아가는 일종의 현상이었다. 마왕, 그 존재를 떠올린 아덴은 조용히 장작 위로 불꽃을 피워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에 비춰진 숲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방금까지 싸웠던 그 스펙터의 존재도, 그리고 아덴이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것들이...그저 불꽃에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차라리 이게 전부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용사가 죽고, 마왕이 나타났다. 진부한 전개처럼 보이는 그것이 이 세상에 들이닥친 현실이었다. 

 

용사가 죽어 사라진지 5년, 아덴이 이 소설 속 세계에 태어나 살게 된 것이 20년.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인연이 불타버린 지금. 아덴이 바라는 것이란 단 하나 뿐이었다.

 

아덴은, 마왕을 죽이고 싶었다.

 





용사 죽은 세상에 주인공이 스스로 용사가 되는 거임 ㄷ


분위기 진짜 존나 어두운 다크 판타지 ㄷㄷ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