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검을 쥐는 오른 팔, 도주를 막기 위한 왼쪽 발목이 먼저 잘려 나갔지만 드디어 저 증오스럽고도 두려운 암군의 목이 떨어진 것이다.


암군, 폭군, 피분수의 주인, 여신의 실수, 황제찬탈자, 역대 최강의 소드마스터 등등 그를 지칭하는 말들은 여럿 있지만 그 어떤 단어도 저 자의 두려움을 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록 말살]이고, 그의 총애를 받았던 공주전하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이세계에서 왔다고 한다.


술에 취하거나 침대 위에서 흥분했을 때, 그가 살던 세계에서의 이름을 부르라고 시켰다는데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에게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게 의외의 충격이였다.


... [중략]



이렇듯 폭군이 저지른 죄는 기록지를 몇장을 채워도 모자를 만큼 많고 깊다.


폭군 그 자신도 반란으로 황제를 찬탈한 만큼,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과 그를 위한 수탈에 대한 집착이 심했는데 그런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어선 영웅들을 소개할 차례가 된 것 같다.


폭군에 의해 전 황제 폐하의 눈앞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걸 지켜봐야만 했고 그 뒤로도 꾸준히 능욕당하신 공주전하.


그런 공주를 납치하고 그에게 바쳤지만, 진정한 주인인 악녀를 위해 폭군의 오른 팔을 날린 악녀의 기사단장.


어리숙한 폭군을 발견하고 찬탈의 꿈을 불어 넣었지만, 정작 그 자신도 나락으로 떨어진 악녀.


폭군을 위해 이런저런 흉계를 세워 악녀와 같이 여러 재산을 바쳤지만, 자신의 업적을 무시하는 폭군을 몰락시킬 계획을 세운 책사.


그저 폭군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끌려가는 그녀를 붙잡았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가족들이 처형되는걸 봐야 했던 수도의 평민.


끌려가는 소꿉친구의 가족들을 처형해야 했던 수도 경비병과 그의 동료들.


당장 동료 부랑자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일용할 양식까지 빼앗겼던 빈민가의 거지.


그리고 그런 빈민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녀가 순결의 맹세를 깨고 스스로를 폭군에게 바치기까지.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렸는가. 그의 죽음을 바라였는가. 


성직자들 사이에선 황혼을 바라보는 노인부터 새벽을 여는 아기까지 모두가 여신께 그의 죽음을 빌고 또 빌었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으니 얼마나 암울한 시대였는가.


그렇기에 감히 오늘까지의 이 시대를 제국의 가장 깊은 암흑기라고 칭한다.


귀족, 성직자, 평민, 하층민, 노예 모두가 그의 죽음을 바라였으니 폭군이 죽는 오늘, 모두가 일어서는건 당연한 일이였음이라.


... [중략]



오늘을 위해서, 폭군을 죽이기 위해서 2년 반동안 모두가 폭군의 비위를 맞췄다.


공주전하와 성녀는 그의 조교를 기꺼이 받아드렸고 결국 오늘날 두분의 옥체는 완전히 타락해버리고 말았다.


기사단장과 책사는 꾸준히 마을 처녀들을 폭군에게 바쳤고, 귀족 영애들도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했다.


오직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의 습관과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그를 방심시키기 위해 모두가 불나방처럼 안겼다.


그리고 결국 오늘 기사단장이 그의 오른팔을 자르고 달려드는 병사들이 그의 발목을 벤 순간. 


그 순간에 모두가 폭군의 죽음을 직감했다. 


끝났다. 드디어 저 폭군이 죽는 것이다라고.


결국 왕좌에 주저앉은 폭군의 신체에서 목이 떨어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 [중략]



폭군이 죽고 난 뒤에 몇일이 지났고 드디어 이걸 다시 쓸 시간이 왔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극적으로 달라지는건 없었다.


폭군의 자리를 정당한 계승자이신 공주 전하께서 황제에 오르셨다.


먼저 폐하께선 모두가 고통받았기에, 제국의 비고를 열어서 제국 각지에 배급했다.


2번의 반란으로 인해 많은 군인들이 죽었기 때문에, 비고에서 배급한 양이 얼추 맞아떨어졌다는 웃지못할 농담도 돌았다.


그래도 크게 체감이 되는게 있다면, 그저 폭군이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희망이 깃들었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아무도 폭군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폭군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


이 어리석은 기록자만 빼고.


그가 '악녀'에게 발견 되기전의 시기에 구해진 나는.


공주를 탐하기 전의 그를 알고 있었던 나는.


서서히 변해가는 그를 말리지 않았던 나는.


그저 전리품으로 목이 잘린 그의 시체를 안아들고 무덤을 만들어 한방울의 눈물을 흘려주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는.


모든 순간을 후회한다.


내 손으로 폭군을 만들어낸 악녀로써, 욕심 많긴 해도 순수했던 그를 사랑했던 악녀로써, 나 스스로를 저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록을 후대에 남긴다.


다신 나같은 악녀가 나타나지 않도록. 그 악녀에게 홀리는 무고한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랑하는 이를 가해자로 만드는 멍청한 일이 다신 일어나지 않도록.


 ~제국력 874년~

우리의 후인들과 어리석은 [기록말살]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