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게 욕을 주고 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놈들이 하나같이 술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떨떠름한 시선을 느꼈는지 오른쪽에 앉은 놈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긴 말 안할게. 며칠이나 지났어?"


"뭘?"


"그 엘프랑 사귄지, 며칠이나 지났냐고."


"야, 진짜 왜 그러냐? 안 어울리게 폼이나 잡고ㅡ"


"며칠이나 지났냐니까?"


처음에는 술 처먹고 정신이 훼까닥 돌아서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없이 진지해진 얼굴과 낮게 깔린 말투가 지금 던져오는 질문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꼿꼿이 세워졌다.


"......이제 한달 반 좀 넘었지."


"젠장, 미치겠네. 그러면 떡은 언제 쳤는데?"


"......그저께."


"씨발 세상에."


마침내 그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나왔다. 능구렁이같은 놈이긴 하지만 함부로 욕을 하고 다니는 인간은 아니었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욕을 하고 있었다. 불안감이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에 호응하듯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거니 받거니 기울어지던 술잔들은 어느새 제자리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날 향한 눈초리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눈을 감아버린 놈도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엘프랑 사귀는게 뭐 어때서?"


"......너, 시골에서 올라왔댔지."


"......?"


"시골 깡촌에서 허울뿐인 귀족 작위나 붙잡고 있다가 무작정 여기로 올라온게 17살때였고."


"갑자기 왜 시비냐?"


"끝까지 들어. 17살이면 이해는 해. 한창 남의 충고 같은거 안 들을 시기니까. 그런데 넌 지금 20살이잖아. 3년이라고. 무려 3년. 니가 여기로 올라와서 지내온 시간이 3년이나 되는데 그 빌어먹게 긴 시간동안 너한테 엘프에 대해서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냐?"


"엘프가 뭐 어쨌ㅡ"


"우리 정도니까 이렇게까지 해주는거야. 새겨 들어."


양쪽 어깨가 붙잡혔다. 내 몸을 돌리고 정면에서 어깨를 붙잡은 녀석은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진지한 표정과 기세로 입을 열었다.


"아직 희망이 아예 없는건 아냐. 가서 헤어지자고 말해.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고, 그냥 다른 여자가 더 좋으니까 꺼지라고만 말해도 돼."


"헤어지라니? 아까부터 이해를 못하겠는데?"


"이해하려 들지마. 그냥 행동으로 옮겨. 우리 친구잖아. 한 번만 믿어주라. 제발."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절박함이 묻어나는 친구를 착잡하게 마주보았다.


"엘프는...... 아니, 그것들은, 그냥 괴물이야."


"뭐?"


"괴물이라고. 너, 그 엘프가 연약하고 가녀린 척 하지 않던?"


"그랬지. 일단 비쩍 말랐고, 몸에 근육도 거의 없었고."


"그게 문제라는거야. 너, 왜 세계수가 있는 대수림 밖으로 나오는 엘프 숫자가 얼마 안 되는지 아냐?"


"어...... 인간들이 무서워서?"


내 대답에 친구놈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웃겨서 나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에 가까운 듯 했다.


"너, 왕국 노예상인들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잘 알지?"


"갑자기 노예상인 얘기가 왜 나와?"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 인간들이 취급하지 않는 노예 따위는 없다고. 돈만 된다면 그 어떤 종족이든 잡아다 노예로 만들어 팔아먹는 족속들이 왕국의 노예상인들이었다.


"너, 걔들이 엘프 노예 취급하는거 본 적 있냐?"


"아니, 지금 걔랑 헤어지고 엘프 노예나 사라는 뜻이냐?"


"제발 문맥 파악좀 해라. 본 적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언젠가 눈앞의, 친구라 불리는 인간 중의 한 명이 새끈한 노예가 필요하대서 같이 구경을 갔던 경험을 떠올렸다. 정말 이런 것까지 노예로 만들어 파는건가 싶을만큼 다양한 종족들이 즐비했지만, 모든 구역을 돌아다녔음에도 엘프는 단 한 한명도 보이지 않았었다.


"......없어."


"네 앞에서 보여준 모습대로 엘프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종족이라면, 왜 노예상인들이 엘프를 노예로 안 만들고 있을까?"


엘프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아름답다는 단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종족이었다. 비쩍 말랐고 몸에는 근육 하나 없었음에도 보기 흉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와 완벽하게 빚어진 이목구비는 신이 직접 빚어냈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엘프와 떡을 칠 수 있다면 돈은 얼마고 지불할 의사를 지닌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국 어디에서도, 엘프를 노예로 삼았다거나 엘프 창녀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분명 수요가 넘칠테니 공급이 있어야 하는데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는지, 친구놈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뭔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지?"


"......"


"이게 본론이야. 새겨들어. 왜 엘프 노예가 없냐면, 그것들은 감히 인간이 재단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서 그래."


"......"


"아까 내가 왜 대수림 밖으로 나오는 엘프 숫자가 얼마 안 되냐고 물어봤었지. 그 괴물들도 아는거야. 자신들에 비해 이 세상이 너무 연약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연약하다고? 엘프들에 비해?"


그때 가만히 앉아 술잔만 들여다보고 있던 친구들 중 한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까지 하라는 뜻 같았다. 눈앞의 친구가 벌컥 성을 냈다.


"야, 어차피 이새끼가 이대로 엘프랑 안 헤어지면 우리도 뒤진다니까? 차라리 말을 해주는게 살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너희가 죽는다니? 뭔ㅡ"


"넌 질문하지 말고 듣기만 해. 엄청 오래된 일이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이 좀 많이 끝내주잖아. 그래서 감히 왕실 도서관에 한번 방문할 기회를 얻었었지. 그때 내가 본게 역사서였는데. 마침 거기에 엘프랑 연관된 이야가 적혀 있었어."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녀석의 가문이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왕실 도서관에 출입할 기회까지 얻어본 경험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이 왕국의 13대 국왕이 급사했다는 건 알고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의 13대 국왕. 자애와 친절을 통한 온정을 펼쳐 왕국을 풍요로움으로 이끌었던 왕이라고 역사서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단지 상당히 젊은 나이인 24살쯤에 갑자기 병으로 죽어버렸을 뿐.


"그 국왕은 급사한 게 아냐. 엘프에게 납치된거지."


"......뭐?"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에, 입이 떡 벌어졌다.


"사랑에 빠져 왕국에 쳐들어오는 엘프 하나를 막으려고 온 대륙의 군대와 마법사가 싸그리 동원됐어. 왕이니까. 지켜야 하니까. 엘프 앞을 막아선 숫자가 무려 70만 명이었댄다."


70만.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되게 많은 병력인데, 13대 왕이 재위하던 시절인 200년 전에는 얼마나 큰 규모였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물론 13대 국왕이 사라진걸 보면 그 70만의 군대와 마법사가 엘프 하나를 못 막았다는 소리겠지. 그러면, 얼마나 걸렸을거 같냐?"


"뭐가?"


"70만 명이 뒤지는데. 얼마나 걸렸을거 같냐고."


"......나야 모르지."


"20분."


"시발 뭐?"


"그 엘프가 70만 명을 싹 죽여버리고, 국왕을 납치하는데 걸린 시간이 20분이라고."


머리가 굳어버렸다. 두 숫자가 너무 극단적이어서 현실로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한쪽의 숫자는 너무 크고, 다른 한쪽의 숫자는 너무 작아서.


"엘프가 대수림 밖으로 나오는 조건은 하나 뿐이야. 자신의 힘을 제대로 숨길 수 있을 것. 그리고 평범한 인간 수준의 힘을 낼 수 있을 것."


"말이 안되잖아. 그러면 나랑 사귄 엘프는ㅡ"


문득 그저께 있었던 정사를 떠올렸다. 조금 거칠게, 강간하듯이 해달라고 하길래, 두 팔목을 붙잡았었다. 엘프는 어떻게든 팔을 비틀어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내 손아귀는 미동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런 행동마저 다 연기였다고?


"그 괴물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힘을 철저하게 조절할 줄 아는거지. 완벽하게 힘을 숨길 수 있는 엘프들만 대수림 밖으로 나와 우리 세상을 돌아다니는거니까, 당연히 숫자가 적을 수 밖에 없지."


"......"


"그러니까, 그 엘프가 너한테 더 빠지기 전에 헤어져. 널 위해서 하는 말이고, 우릴 위해서 하는 말이야. 걔가 여기서 너 데려가려 하잖아? 그러면 우린 끝장이야. 네 기억을 마음대로 끄집어내고 읽어서, 너랑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인간들은 싹 죽이고 널 데려갈테니까."


*


*


*


"샤를!"


"......세레스티아."


저만치에서 나를 발견한 갸냘픈 소녀가 도도도 뛰어왔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가느다란 팔다리, 내 허벅지와 비슷한 두께의 허리, 그러면서도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외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아름다운 엘프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술집에서 경고를 들은 직후, 내 마음은 무척이나 심란했다. 정말로 눈앞의 이 가녀린 엘프 소녀가 그렇게 벌벌 떨 정도로 위험한 존재일까? 어쩌면 세레스티아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간지러워요, 샤를. 하면서 꺄르륵 웃는 세레스티아를 내버려두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가 이끄는대로 움직여주는 얇디 얇은 손. 여기서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찢을 힘이 나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 샤를. 저 샤를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요. 들어주실래요?"


한동안 그렇게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으려니, 세레스티아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입가에 미소가 활짝 걸려 있었다.


"부탁할 일?"


"네."


"그거 우연이네. 나도 세레스티아 너한테 말하고 싶은게 하나 있었는데."


"저도 알아요, 샤를."


안다고?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다시 세레스티아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세레스티아의 입꼬리는 싱긋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방금 전의 세레스티아가 포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였다면, 지금의 세레스티아는 딱딱하고 차가운 이미지였다.


"저랑 헤어지자는거죠?"


"......어?"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들었어요. 술집에서 샤를이 친구들이랑 나눴던 이야기."


들었다고? 그걸?


"전 샤를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알수 있는걸요. 행동 하나, 표정 하나, 목소리 하나 까지도. 전부."


깍지를 낀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손가락을 풀려고 해봤지만, 세레스티아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힘을 주어도 그게 전해진다는 느낌 자체가 없었다.


그래, 꼭 세레스티아와 나 사이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있다는 듯이.


"걱정 마세요, 샤를."


눈썹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동그랗던 눈이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모두 사실이니까요."


단순히 날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기만 하던 손은, 어느새 적극적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저희 엘프들은 평생토록 한 명만을 사랑한답니다."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저지르죠."


세레스티아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는 느낌이 전해졌다. 스읍, 세레스티아가 내 옷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는, 당신을 위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요?"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찢어질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 날, 왕국의 수도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예상보다 존나 길어졌네 시발 공백 미포함 4200자라니 원래는 그냥 재미로 몇줄 쓰고 말 생각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