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2장 17절,

너희는 주술쟁이 여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22장 18절,

짐승과 교접하는 자는 누구든 사형을 받아야 한다.


출애굽기 22장 19절,

주님 말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는 처형되어야 한다.]


"어리석고 사악한 마귀들아!

전지전능하신 주께서 네놈의 죄를 단죄하실 것이다!"


십자가를 짓쳐든 노인이 내 앞에 서서 소리쳤다. 

노인의 주위로는 날을 벼린 검을 든 수사들이 둥글게 진을 지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젠, 젠장할.


저 얼뜨기같은 수사들은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질리도록 마주쳤고, 질리도록 죽여왔다. 중앙의 노인은 여기 있는 우리 흡혈귀 일족보다 훨씬 강했지만 일족 중 몇 명이 죽을지언정 일족의 대다수가 도망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너머에 있는 존재였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 일족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백부.."


수장님이..아니 백부님이 눈을 여전히 전방에 고정시킨 상태로 내게 말했다.


"슈트리건. 이 자리의 우리 일족 중에서 네가 내 다음으로 강하다. 노인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솔직히 모르겠다. 저 노인은..너무 강하다.


"모르겠습니다. 많이는 못 버틸 겁니다."


"버텨라. 난 노인의 뒤로 가겠다."


"노인의 뒤에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 천사. 


우리가 있는 이 산 전체에 자신의 권능을 뿌린 자.


존재만으로 주위의 신성을 강화하고 삿된 힘을 무르는 자.


기도하는 자.


성녀.


백부님은 그 존재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크아아아아-!"


백부님의 눈이 붉게 변하며 온몸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내뿜었다.


노인은 몸을 살짝 웅크리고, 난 뒤로 물러나며, 상대쪽의 수사들은 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 하고, 우리쪽 흡혈귀들조차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며, 양 진영의 누구도 말을 못 꺼낼 때.


노인의 뒷쪽에 있는, 성녀가 나섰다.


오직 성녀와 백부님만이 공기를 가득 채운 사기 한가운데에서 멀쩡했다.


성녀가 나지막히 말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해치는 자들이 아직도 주님의 광휘가 비치는 이 땅을 걷다니요."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마치 얇은 장막을 걷듯이, 안개가 낀 날 안개를 손으로 물리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기를 지배하던 백부님의 사기가 한순간에 사라지며 그 자리에 불쾌한 것이 자리잡았다. 아마도 저들이 신성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성녀가 재차 말했다.


아니, 성녀가 아니었다. 성녀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성녀의 몸을 빌어 말하는 원초적인 존재.


'그'가 말했다.


[악한 축생의 왕이여, 순수한 것들에 빌붙어 생피를 빨아먹는 자여, 삿된 이교의 마법을 부리고, 교묘한 책략으로 성지를 부수는 마술사여, 감히 하나님의 피조물을 욕되게 하는 악마여,

너, 짐승의 이름은 무엇이냐?]


백부님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엿."


[엿?]


"먹으라고."


그러고는 크게 소리쳤다.


"모든 일족은 흩어져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백부님은 곧장 허공을 밟고 나아가 성녀에게 대적했다.


[내 너의 악함을 알겠다. 너는 구원의 기회를 걷어차고 고통의 길로 들어서는구나!]


"....그렇다면 나에겐 구원과 고통이 같은 말인가보구나!"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며 난 곧바로 노인에게 돌진했다.


***


"으음.."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래도 아까 철몽둥이에 얻어맞은 게 컸던 것같다.


그래서 그런지 옛기억이..


아니, 아니지. 이 순간에 집중하자. 자칫하면 내 목이 날라간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난 정면에서 내게 검을 겨눈 이가 놈을 보았다.


목은 이색. 


빌어먹을 성리학자놈..공민왕만 살아있었다면 난 가장 먼저 저 놈의 목을 치라고 간언했을 거다.


그 오른편에 차가운 얼굴로 날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삼봉 정도전.


왼편에는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남자가 있었다.


포은 정몽주.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검을 들고 날 둘러싼 성리학 꼴통들...날 죽이려 하니까 꼴통들인 거다.


왜 100여년전 우리 일족이 가톨릭놈들에게 거의 몰살당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알았다.


구도가 비슷했다.


"참 생각하는 게 똑같아요..응? 좀 참신하게 가보자구. 언제까지 다구리만 깔 거야?"


이색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도 처음 봤을 때보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근데 나이를 먹었는데 약해지지는 않았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군."


하..가톨릭 놈들 칼날 피해 안전한 동방까지 피해왔다. 이름도 바꾸고, 변신술로 동방 사람들처럼 외모도 바꾸고, 신분도 조작하고 나서 요괴들을 외적막는 데 써먹는 고려에서 적당히 왜구나 잡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는데..여기서도 이러면 진짜 어쩌자는 거냐아..!


...

.....다 잡을 수 있을까?

역시 무리인가..?


능력을 쓸까..? 아니, 쓸 수가 없구나.


다 잡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살아나가는 게 문제였다. 망할, 뭐 어쩌자는 건지.


이색. 그 자체는 무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학식이 깊고 지혜가 있는, 두뇌파였다.

그래서 내가 단신으로 잡고자 한다면 못 잡을 것 없지마는..문제는 양 옆의 두 인물이었다.


삼봉과 포은.


특히 포은 정몽주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더욱이 정몽주나 정도전, 이색보다는 못 하지만 전문적으로 나같은 monster, 아니 요괴들을 잡아온 성리학자들이 날 둘러싸고 있으니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피는 나와 같은 흡혈귀들 힘의 원천이었다. 피가 많이, 제대로, 빨리, 깨끗하게 돌수록 우리의 힘은 강해져만 갔다.


그런데 이렇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조금만 능력을 써도 빈혈로 쓰러질 정도라면, 난 어떤 능력도 쓸 수가 없다.


이미 흘린 피를 사용하고자 해도 피를 사용하니 말이다.


내 몸을 회복하건 아님 능력을 쓰건 일단 피를 빨아야 하는데..보아하니 그럴 기회도 없을 것같고.


정말 이젠 가망이  없다.


나는 이색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나 좀 보내주면 안 되는 거냐?"


"...."


대답은, 없었다. 내 미래도 없는 것같다.


"흐흐, 그래. 그렇겠지."


"..때가 되었소. 이제 이 고려는 더 이상 당신같은 괴물들에게 고통받지 말아야 하오."


"난!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네놈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수많은 외적을 잡고! 고려를 지켰다! 그건 계약이었어!"


이색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당신이 왜구만 잡았나? 내가 알기로는 당신을 싫어하거나 고발한 관료들이 여럿 사라졌었는데..그 관료들도 물론 외적이었겠지?"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 중요한 건 고려야!"


"그래. 그러니까..인간의 힘으로 고려를 지킬 거다."


이색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정몽주가 허리춤에 패용하던 검집에서 검을 빼면서 내 목을 향해 날렸다.


목을 꺾어서 검날을 피한 난 곧바로 손톱을 휘둘러 정몽주를 견제했다.


"그래, 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순간에 불타는 게..나같은 놈에게 더 알맞겠지."


검을 뽑으며 내 옆으로 짓쳐온 정도전이 내 혼잣말에 응수했다.


"그렇다면 지금, 불타시오."


그 말과 함께 정도전의 검에서 화기가 일며 내 살갗을 살짝 태웠다.


저놈이 저런 것도..!


그러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불길은 확실히 놀라웠지만 여유롭게 피할 수는 있었다.

마침 옆에 있는 개천의 수기가 놈의 화기를 억누른 것이 다행인데..왜 정도전 저 놈이 웃고 있지..?


아뿔싸! 시선을 빼았겼다!


그순간 내 발목이 검에 베이는 감각이 새겨졌다.


정몽주의 검술이었다.


난 힘줄이 베인 왼쪽 발목을 억지로 움직이는 대신 멀쩡한 오른쪽 발목을 중심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며 손톱을 내질렀다. 


정몽주가 뒤로 물러나 내 손톱을 피했지만 어차피 나도 정몽주가 이 정도에 상처입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대신 손목을 바로 꺽으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내 손톱의 날이 향한 곳엔, 정도전이 있었다.


그는 내 공격이 바로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하고 화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자세를 잡으려 노력했다.


난 입술을 비뚜루 올려 웃으며 소리쳤다.


"소용없다! 갈 때 가더라도 네놈 하나 정도는 데려가주마!"


난 바로 왼발로 땅을 구르며 정도전의 흉부로 검을 날렸다.


...왼발로..?


힘줄이 이미 잘려 제기능을 못 하는 왼쪽 발목이 땅에 닿자마자 무너지고, 난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넘어갔다.


정도전이 한순간 섬뜩했던 마음을 풀어내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혼자 가야할 듯 하오."


"이런..내가 이런 실수를.."


시야가 밑으로 내려가며 넘어진 난, 안도한 정도전의 얼굴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발목의 힘줄을 끊긴 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몸상태만 멀쩡했어도, 피만 더 마실 수 있었어도 이까짓 발목 힘줄은 아무 것도 아닌데..

무심코 내가 쌩쌩할 때처럼 행동해버렸다.


내 편이 있었다면,

내가 3일 동안 쫓기지 않았더라면,

성리학자 놈들을 미리 다 죽여놨더라면,

마실 피만 더 있었더라면,

몸상태만 멀쩡했다면,

능력의 일부가 봉인당하지 않았더라면,

회복력을 좀 더 길러놓았더라면,

..했더라면,

..다면,


그러나, 난 졌다.


난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 이색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보자. 나같은 놈들이, 그러니까 흡혈귀가 왜 그렇게 싫냐?"


"그건.."


"맞아. 날더러 뭐라 하던 관료들이 좀 띠꺼워서 맛있게 냠냠 좀 했다. 근데, 우리 솔직해지자고.

그거 때문에 날 잡는 거 아니잖아? 왜 잡는 거냐?"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물음.


성리학자놈들은 이 땅에서 '괴물들'을 사냥해왔다. 원래 유학자들이 그러기는 했지만 이번의 성리학자들은 굉장히..의욕적이었다.


이 땅에서 원주하던 요괴들은 성리학자들과 그들의 동료인 일부 신흥무인세력에 의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는데 의욕적이면서 자신들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어 막강한 힘을 거머쥔 성리학자들의 덕이었다.


이색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신념이다."


"신념? 신념은 무슨.."


이색은, 소매에서 장검을 꺼내서 검기를 불어넣더니 칼을 내게로 겨누며 말했다.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 怪力亂神). 공자께선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러니..너와 같은 존재들은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는, 이색은 곧장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을 향해 일직선으로 칼을 내리그었다.


칼날이 내 몸을 가르는 것을 느끼며 난 속으로 조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네들이 더 괴력난신같은데 말이지?

하..거의 출애굽기급으로 지겹게 들은 소리..좀 참신하게 가자니까..


내 육신은 고꾸라져 바닥에 쓰러졌고, 점점 힘을 잃어갔다.


길고 긴 생애, 구차하게 이어나갔지만 이제 끊어지니 어쩌면 마음이 더 편하구나..우리 일족은 줄곧 많은 사람들에게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놈들이란 소리를 들어왔다. 어쩌면 내 命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일지도..




장르소설 챈은 글/댓글 안 쓰고 눈팅만 하다가 이벤트때문에 글 처음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