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멸망해 홀로 남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중한 것을 살아남기 위해 부숴야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살아남아서 이 세계까지 오게 됐다는 거지."


멸망한 세계를 홀몸으로 탈출한 경험만 여러 차례인 그의 말을 들으며 든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다.





눈물겹게도, 그에겐 사소한 재주가 있었다.


챙그랑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우리 집 창고에 박혀있던, 곧 버리려고 했던 잡동사니는 그 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그를 살아남게 한, 누가 준지 모를 얄팍한 잔재주였다.


"잘 써먹어서 닳아진 물건일수록, 추억이 깊은 물건일수록 회복량이 높아. 정말 좋은 것들은 죽기 직전이어도 날 살려낼 수 있을걸."


그는 그런 물건을 통틀어 라스트 엘릭서라고 불렀다. 효과가 너무 좋아 아끼다가 똥이 된 물건들. 그렇게 자조하면서.


아홉 세계를 건너온 그는 라스트 엘릭서를 아홉 개 가지고 있었다. 물론, 똥은 아니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그는 전신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다.


후일 이르기를, 세계를 넘기 위해선 그만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 라스트 엘릭서를 썼으면 상처 없이 넘어올 수 있었던게 아닐까. 그의 사소한 재주는 자신의 몸을 고치는데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선 무신경한 질문이었다고 반성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아끼던 추억의 물건을 부숴야겠으니 내어달라고 할만큼 철면피도 아니었고, 의료를 받기 위해 낼 수 있는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내 호의는 적당한 상처약을 구해다가 발라주는 정도에서 가로막혔으나, 사실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물건을 부수는 재주를 쓰지 않더라도 제법 생명력이 좋았다. 그럼에도 다 쓴 약통은 한 보따리를 넘어갔고,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을 나의 집구석에서 박혀있어야 했다.


내가 약을 발라주고, 그는 앓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좋은 거래였다.







그는 어느 날 떠나야겠다고 했다.


"세계가 멸망할 위기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아."


우리 세계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나, 곧 멸망할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아홉 번, 멸망한 뒤에야 자리를 뜰 수 있었던 엉덩이 무거운 둔탱이는 이번에는 용케도 멸망이 오기 전에 전조를 알아차렸다고 했다.


마침 몸도 다 나아서 쌩쌩해진 그에게 나는 보따리를 하나 내밀었다. 조촐한 선물이라고 할까.


"당신이 다 쓴 약통들이니까, 가는 길에 쓰레기나 버려줘요."


진짜로 선물이었다. 나는 선물 고르는 센스엔 조예가 있었다.


















먼 길을 떠난 그는 딱히 죄책감을 가지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야, 떠난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이번에야말로 멸망에 대항해보기로 했으니까.


아홉 번의 멸망은 연약한 생물을 위대한 용사로 탈바꿈시키기 충분했으니까.






멸망이 형체를 가지고 덮쳐온다.


그는 그것을 견디고 역으로 밀어냈다. 상처 입은 몸은 챙겨온 잡동사니들로 회복했다.


귀하디 귀한 잡동사니들이 남아있는 한 그의 몸은 그야말로 무한정한 고기방패였다.




그 많던 잡동사니도 다 떨어지고, 남은 멸망의 형체도 단 열.


그러나 남은 열 개의 형체는 너무나도 절망스러웠기에, 그는 결코 쓰고 싶지 않아 아끼고 아꼈던 라스트 엘릭서들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에, 소녀심 넘치는 곰돌이 봉제인형이 바스라지고,


둘에, 자물쇠 걸린 일기장이 바스라지고,


셋에, 담배 냄새가 밴 적금통장이 바스라지고,


넷에, 짠내가 풀풀 나는 찌개냄비가 바스라지고....




그도, 물건도, 멸망도 평등하게 바스라졌다.


그에게 남은 건 보따리 하나, 남은 멸망도 하나.



그는 보따리를 내려다 봤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낸 약통들은 추억이 담겨있다.


약을 발라지는 동안 생애 처음으로 풀어놓았던, 이미 지나온 세계들의 이야기.


결코 빠르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던, 새로 사귄 친구와의 별 것 아닌 대화.


쓰지 않아도 마지막 형체를 지우는 것은 가능했다. 그저 목숨을 내놓아야할 뿐.




추억과 목숨은 결코 같은 저울에 올릴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는 처음으로 그 둘을 저울질했다.





그는 차마 추억이 담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들고 가라고 줬더니 길바닥에 버리고 갔네? 설마 내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나?"


"...뭐, 됐나. 왠지 우리 세계도 무사한 것 같고, 그 사람도 무사히 떠난 것 같고."


"그럼 오랜만에 분리수거나 해볼까."


"그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쓸모 있다고 자기가 주워갔으니까...."


"....잘 살았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