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앰. 매앰.

찌르르르 –

 

소년은 괭이질을 멈추고 머리 위에서 훗훗함을 담뿍 머금고 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어 내었다. 벌써 삼 년 째 하는 일이지만 금년 하는 일은 묘하게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 계집아이가 나무 등치에서 몸을 반쯤 삐뚜루 하게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친 지 벌써 매미가 울음 한 번을 토해냈건만, 계집아이가 그제서야 그 큼지막한 눈을 더 키워내며 아예 등치로 몸을 숨기는 것이 소년은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그나마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다시 몸을 돌리어 묵묵히 괭이질을 하고 있노라니, 고 계집애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과 함께 도담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빼꼼하게 등치에서 몸을 내미는게 소년은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을 놀리기로 아주 작정을 한 것인가 하구 기가 막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소년이 소녀를 만난 것은 지난달, 그러니까 작금이 칠월 초이니 유월 중순 즘이었다. 올해도 으레 그러하듯이 방학을 맞아 촌에 있는 외조부님 댁으로 와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있는 터였다. 제 삼자가 보기에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지주의 외손자 놈이 무엇이 아쉬워서 예까지 오느냐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몇 년 전부터 옆 마을에 학교가 생기는 통에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짐보따리 싸 들고 가면은 제 아무리 지주라도 그저 아쉬워 손가락만 빨 수 밖에 없는 법이다. 

 

그 날도 당일 분량의 괭이질을 실컷 하고서 마루에 덜렁 누워 햇살을 베개 삼아, 간간히 불어 오는 바람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외조부님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헐레벌떡 일어나 대문으로 나가보니 조부님과 웬 처음 보는 사람이 함께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일인지 몰라 옆에 서서 멀뚱히 조부님을 보고만 있으니 조부님께서 

 

그래, 왔느냐? 이 짝 동네 의원님과 그 따님이시다.”

아 이 청년이 그 말씀하신 손주 분입니까? 아주 수려하게 생겼습니다. 허허.”

 

하시기에 앞을 보니 그제야 의원님 되시는 분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한 작달막한 계집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알알이 박힌 주근깨, 흑단을 펼쳐 놓은 양 치렁치렁한 머리, 땡그란 눈에 긴 속눈썹을 한 번 씀벅인다. 안 그래도 짐보따리 싸 들고 가 동네에서 젊은 사람 보기 힘든 판국에, 서울에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모습인지라 빠안히 보고 있으려니, 그만 소년은 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함부로 본 게 실례이기두 허구, 초면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어색한 것이 결국 무안하여 소년은 허리를 깊게 숙여 때 늦은 인사를 했다. 헌데 그래도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응당 받아주는 것이 도리인 것을, 고 계집아이 그 땡그런 눈을 파르르 떨더니 무슨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마냥 제 아비 뒤로 몸을 홱 하니 숨긴다. 그래 놓고서는 몸을 반쯤 삐죽이 내미는 것은 또 뭐라는 말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 소년이 인상을 약간 구기니 이제는 아예 완연히 제 몸을 아비 뒤로 감춰 버린다. 그 모습을 본 의원님과 외조부님은 박장대소를 터뜨리셨지만 소년은 감히 웃을 수가 없다. 

 

이 짝 동네들 돌아다니시면서 왕진 중이신데 하여 우리 집에 얼마간 머무르기로 하셨다. 따님도 너와 동갑인 열 일곱이라 하니, 잘 좀 대해드리고.”

아이고, 객식구로 들어가는 와중에 무슨 대접을 받습니까. 그저 몸 뉘일 방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의원님은 허허 웃으시며 흘러내린 안경을 고치고는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비 되는 분은 저리도 태도가 멀끔하신데 그 따님은 왜 저 모양인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너스레를 호탕하게 웃으시며 받아 주신 외조부님의 그만 가서 일 봐도 좋다는 말에, 소년은 그 긴 팔다리를 자박대며 돌아갔다.

 

문득, 묘한 느낌에 뒤를 돌아 보니 그 계집아이, 또 몸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다시 몸을 홱 하고 숨기는 데 참으로 황당한 계집아이였다. 

 

소년이 처음으로 소녀와 대화 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괭이질을 다 하고 팔뚝을 걷어 붙인 후, 짱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처음 듣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옆 쪽 너머로 들려왔다. 

 

얘! 서울 아이들은 다 그렇게 피부가 창백허니?”

 

뭐? 창백해? 초면에 허옇다는 것도 아니고, 창백하다? 소년은 대꾸할 힘도 쪽 사라져서 고랑 위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계집아이만 힐긋 봤을 뿐, 다시 짱돌을 골라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가을도 아닌데 그 까무잡잡한 얼굴이 홍시처럼 울긋불긋 해져서 뻑 하니 소리치는 것이 실로 가관이었다. 

 

얘!”

 

다시 고개를 돌려 인상을 팍 쓰고 아예 고개를 돌려 노려보니, 소녀는 아까 보다 더욱 얼굴이 불긋해져 몸을 달싹이더니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 버린다. 옛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서울에서도 계집애들이 소란스럽게 할 때 지금처럼 인상을 팍 써주면 저 계집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잠잠해지는 것이 여기서도 효험이 있어, 소년은 흡족스럽게 짱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재개했다. 

 

헌데 서울은 서울이고 촌은 촌이라는 걸까, 잠깐동안 잠잠하던 그 소녀는 오히려 아까 보다 더 시끌시끌하게 떠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얘! 서울 아이들은 원래 그리 팔다리가 각다귀 같이 기니?’ ‘얘! 서울 아이들은 다 그렇게 턱이 바늘처럼 뾰족뾰족하니?’ ‘얘! 서울 아이들은 다들 너처럼 팔뚝이 바위처럼 딴딴허니?’ 따위의 질문들을 벌써 몇 번이고 아기 새처럼 재잘재잘, 조잘조잘. 하도 일하는데 정신이 사나워 소년은 결국 어처구니가 없는 듯 한 마디를 툭 허니 던졌다. 

 

시골 아이들은 원래 그리 말이 많나?”

 

그러자 웬걸, 갑자기 입을 뚝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아까까지 수다스럽던 게 조용해진 것이 이상하여 소녀가 있던 쪽을 바라보니 이번엔 제 아비가 아니라 나무 등치 뒤에서 빼꼼히 몸을 내밀고 있다. 그러면서 아까처럼 얼굴이 홍시가 되어 기어코 말을 하기는 해야 겠다는 듯 웅얼웅얼거린다. 

 

원…래…서울 아이들은…너처럼…그..그…동굴에서…말하듯 말하니…?”

 

동굴에서 말하듯 말하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시골 아이는 놀리는 것도 독특한 것인지,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방식에 소년은 대꾸할 생각도 안하고 짱돌을 골라내는 손을 빠르게 놀렸다. 소년이 대답하지 않자, 소녀는 오기가 생긴 것인지 어떤지 슬그머니 몸을 빼내어 다시 조잘조잘, 재잘재잘이다. 결국 그 날 소년은 평소 작업하던 분량의 절반밖에 채우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황은 지금에까지 이른다. 암만 봐도 저 계집아이, 얼굴은 이쁘장한 것이 나 의원집 따님이오 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데, 행동거지는 정 딴판이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제 아비의 반이라도 따라가련만. 근 일주일 사이 계집아이는 자신을 놀리는 데 아주 마음을 먹은 것이 틀림 없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제 혼자 떠들다 소년이 그 짝을 바라보면 작달막한 몸뚱어리로 호다닥 뛰어 나무 등치로 숨어 들어 반만 몸을 내미는 것이 놀리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그 작달막한 몸둥어리는 어찌 그리 잽싸다는 말인가?

 

하늘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하다. 괭이를 등에 짊어지고 자박대며 돌아가니 소녀가 소년의 뒤를 몇 걸음 떨어져 쫄래쫄래 따라온다. 이것이 근 일주일 사이의 소년과 소녀의 일과였다. 소년은 하루 종일 자신을 따라다니며 놀려 대고 방해하는 시골 아이의 뚝심이 실로 황당하기만 했다. 정말 소녀는 지치 지도 않은 것인지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작은 입술을 놀리고 있었다. 뭐라도 정말 한 마디 안 해주면 집에 갈 때 까지 이어질 것만 같다.

 

너, 좋아하는 과일은 있느냐?”

버찌.”

무어야?”

버찌 좋아한다.”

 

그러자 소녀는 기차 화통을 한 서너 번 삶아 먹은 듯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나두 버찌 좋아한다!” 

 

자신을 놀려 먹어 결국 이겼다는 것이 그리도 좋을까. 도대체 얼마나 좋으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우다다다 앞서 뛰어나갈까. 시골 아이의 뚝심은 참말로 놀랍기만 했다. 소녀가 뛰어 나간 자리로 바람 한 가닥이 잡히자, 저 작달막한 몸이 어찌 저리 재빠른 것인지 의문을 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보니 낮과 달리 구름이 희읍스름하다. 

 

내일은 비가 오렷다.’

 

아닌 게 아니라 장대비다. 이제 슬슬 장마철인듯, 일각 전만 해도 거뭇거뭇하기만 했던 하늘은 우르릉 쾅쾅 야단법석이다. 바람이 쌀쌀한 것이 보통 같으면 부채를 연신 부치던 조부님도 곰방대만 마시고 계셨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와서인지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소년은 마음이 평소답지 않게 고요했다. 소녀는 아무리 못해도 의원님 댁 따님이라고 집안에서 까지 소란스럽게 하지는 않았다.

 

현솔아.”

예, 조부님.” 

가서 의원님 모셔와라. 밥은 제때 들어야지.”

알겠습니다.”

 

의원님이 계신 방문을 몇 번 두드리고 문을 여니 의원님은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계셨다. 헛기침을 하여 소년은 자기가 온 것을 의원님께 알리었다. 요지부동이던 의원님은 그제야 반색을 하며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지주님 손주분! 허허, 미안해요. 내가 왕진표를 기록한다는 게 정신이 없어서 그만…”

아닙니다. 의원님의 일 보시는 건데, 편하게 보시지요.”

허허, 정말 지주님 손주분 아니랄 까봐 이렇게 똑부러지는게…헌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부님께서 식사 드시러 오시랍니다.”

벌써 밥 때가 되었나요? 기껏 걸음하셨는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만 선희도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선희요?”

예, 평소에 같이 잘 노시지 않습니까, 허허.” 

“….여기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소년은 의원님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늘 사람 좋던 의원님의 얼굴은 바깥의 저 먹구름이 낀 것 같았다. 

 

“…하, 한 시진 전 즈음에 분명 버찌 따러 뒷산에 간다고…지, 지금 여기 없…?”

 

매우 무례 막심한 행동이지만, 소년은 의원님의 말을 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집 내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법도에 어긋나지만, 놀란 조부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데도 답하지 않는 것도 죄송스러운 행동이지만, 소년은 그대로 뛰쳐 나갔다. 

 

심보가 아주 놀부 같은 계집아이다. 얼마나 버찌를 들이켜려고 한 시진이나 버찌를 딴다는 말인가. 뒷산 길도 잘 모르면서 버찌 따러 쫄래쫄래 올랐을 모습이 눈에 선하니, 만나기만 하면 버찌 대신 욕을 아주 한 바가지 먹여 주리라고 소년은 굳게 결심했다. 

 

집에 있을 때처럼 좀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버찌를 따러 가기는 간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를 놀릴 때처럼 곁에 있기라도 하던가. 또 그것도 아니면 평소 질문을 조잘조잘 대듯이 버찌 좀 먹고 싶다고 자기한테 노래를 부르던가. 보통 때 처럼 황당하게 만들기만 하면 될 것을 왜 도를 넘어 사람 마음에 장마비를 쏟아 붓게 해 이 지랄을 만든단 말인가. 

 

발에 진흙 덩어리들을 매달고 벚나무들이 가득한 곳에 올랐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 대신 물안개가 지척이었다. 

 

장선희!”

 

거친 숨을 부여잡고 소녀의 이름을 외치나, 폭우의 대답은 싸늘하다. 몇 번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오른 소년은 다시 목청이 터져라 소녀의 이름을 외쳤다. 

 

장선희-!!”

 

어림도 없다는 듯 물안개가 살랑거리며 소년을 조롱하자, 소년은 결국 ‘씨발’ 하며 나지막하게 주먹으로 땅을 때렸다. 참으로 뭣 같은 놀림이다. 소녀의 놀림과 달리 기억에 남기는 커녕 당장 지워버리고 싶다. 흙길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 쉬었으나, 장마비의 비웃음은 커져간다. 

 

흐윽…흑…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바람 소리인가? 추적거리며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장마비 소리에 간신히 들었던 소리는 묻혀 버린다. 아무리 길을 꿰고 있는 뒷산이라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데 쉬지도 않고 뛰어 온 것은 소년도 힘이 죽죽 빠졌다. 

 

하…씨발…”

 

흐윽…흑…흐윽…흑…흑…

 

바람 소리도 아니다. 빗소리도 아니다. 소년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옛 어른들이 말하시던 산도깨비가 아니라면 바람 소리도 빗소리도 이렇게 규칙적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소년은 진창이 된 흙길에 발을 박아 넣으며 소리를 따라 달음박질 했다. 비에 도망쳐 나온 돌뿌리가 발목을 쓸고, 물안개가 잡혀 허우적거리는 나뭇가지가 뺨을 할퀴었으나 소년은 홀린 듯이 소리 쪽으로 향했다. 

 

 

 

소년의 입가에서 마른 목소리가 흘렀다. 

 

장선희.”

 

나무 등치에 몸 기대어 숨어 있지 않고,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퍽 그 나이대 계집아이 같았다. 하지만 장선희라는 계집아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주근깨는 이미 눈물에 덮여 보이지 않고, 조막 만한 얼굴에 달린 코는 강보유아의 것 같은데 어찌 그리 많은 콧물을 내는지. 평소에 떽떽 거리던 목소리는 또 어디에 팔아 먹었는가. 버찌 따던 곳에 두고 왔는가. 그나마 빗물 먹은 머리카락은 아직도 흑단인게 신기하다. 

 

흐윽…흑…현솔아아…”

가자.”

 

소년은 소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산길을 올랐다. 지금 저 진창길을 내려가면 목숨도 함께 내리치는 것이다. 

 

빗물은 아래로 내린다고, 소년 목숨까지도 내리려고 작정을 하였는지, 훔뻑 먹은 몸뚱어리가 무겁다. 

 

이 쪼그마난 계집 아이는 빗물도 안 먹었나 보다. 아주 고냥 손목 이끄는 대로 훌훌 따라온다. 요 계집아이, 이리 쉽게 따라와서야 나중에 서울이라도 가면 어찌한다고 이러는가.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인데. 괜시리 짜증이 올라 더욱 올차게 손목을 당기니 선희의 울음이 커져갔다. 아차 싶어 뒤를 돌아 보니 계집아이 얼굴이 아니라 웬 눈물 콧물 범벅이 있다. 

 

한숨을 쉬고 소년은 소녀를 붙잡은 손에 힘을 빼어 좀 더 보드라히 당겼다. 방금 보다 더욱 쉽게 끌리어 오는게 열 일곱이 아닌 그 키에 맞는 어린아이 같았다. 

막상 발을 내뺐으나 소년도 비상한 계책 따위는 없었다. 진창길을 타고 내려갈 수도 없기에 남은 건 산길을 오르는 것 뿐이다. 잠시 큰 나무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제 몸뚱아리로 소녀를 가리고 있으니 소녀가 어느 한 곳으로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쪽 뻗는다. 

 

저어기.” 

 

바위굴이다. 급한 대로 가 몸을 피하니, 그 작은 몸뚱어리가 빗물은 머금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가벼워 그랬다는 듯 소녀가 오들오들 떤다. 항상 기운이 넘치던 그녀가 그러는 것이 뭇내 안쓰러워 소년은 겉옷을 벗어 소녀에게 걸쳤다. 소녀의 얼굴이 벌겋다. 어디 열이라도 나는가, 잠시 보려던 찰나에 입구에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소년은 몸을 떨었다. 소녀가 그 모습에 가느다란 팔을 허겁지겁 놀리며 겉옷을 벗으려 하기에 

 

춥다, 너 걸쳐라.”

 

하고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자 소녀는 어찌할 줄을 몰라 고개만 갸웃거리다 엉덩이를 살포시 들어 제 몸을 소년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무언가 싶어 입을 열려는 찰나에

 

이라믄 안 춥다.” 

 

하기에 소년은 그만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 버렸다.

 

빗소리만이 가득허다. 밖은 추운데, 굴 안은 훗훗하기 그지 없다. 소년의 몸에서 김이 허옇게 피어 오른다. 장대비인데도 여름은 여름인지, 이상하게 더위가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소년이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색색거리며 움직이는 소녀의 정수리다. 

 

매앰. 매앰.

찌르르르-

 

언제 그쳤는지 굴 밖이 훤하다. 장대비, 마치 산도깨비의 홀림이었는 듯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 소년이 입을 열러고 마른 입술을 비죽일 때,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소년의 품 안에서 터져 나온다. 

 

비 그쳤다!” 

 

그러면서 오도도도 하고 뛰어 나가는데 햇빛 받은 흑발이 치렁거리는 것이 비단 같았다. 소년이 다리를 저벅대며 굴 밖으로 나갔다. 쉴 틈 없이 산길을 뛰어 올라서 인지 나오는 목소리가 거칠다. 

 

장선희.”

으응?”

똑바로 말해라. 무얼 했길래 버찌 따는 데 한 시진이 걸리냐.” 

 

소녀의 얼굴이 사색이다.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을 우물쭈물 더한다. 

 

참말로! 참말로 버찌밖에 안 땄다!”

 

소년의 미간에 주름이 패이자, 소녀는 ‘참말이래두!’ 라는 말과 함께 앞서 달려나가 자기한테 손짓을 마구 한다. 그 모습에 소년은 한숨을 쉬며 소녀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둘러 보니 소년의 집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아니라 그 반대편이다.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길목이기에 그저 보고만 있으니까, 

웬 졸졸졸 하는 소리에 그 짝을 보니, 제 종아리까지 오는 얕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어느새 소녀는 그 계곡으로 들어가 계곡 건너편을 마구 가리키었다. 

벚나무가 득시글한 것이 달달함에 그만 취해버릴 것 같았다. 

 

내 참말이지? 거짓말 아니지?”

 

은은하게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자기에게 다가와 눈과 목소리를 파르르 떨며 묻는 소녀에, 소년은 하도 어이가 없고 그런 그녀가 귀엽기도 해 살풋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제야 소녀는 안도를 하며 계곡을 찰방찰방 건너 뛰어 버찌를 그 작은 두 손에 한가득 담고 있었다. 소년은 종아리를 물에 담그고 계곡에 서 있으니, 몸은 햇살이 번쩍하여 뜨끈한 것이 아래로는 물이 흘러 선선하여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버찌를 다 딴 소녀가 계곡으로 들어와 소년에게 버찌를 내밀었다. 

 

먹어봐라, 달고 맛있다.” 


아까 그 난리를 겪었는데 버찌는 무슨, 몸에 힘도 없고 해서 소년은 그저 웃음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 먹어라, 몸에 힘도 없어 먹기 힘들다.” 

 

그러자 소녀는 ‘치이’ 하는 소리와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는 소년의 말 대로 버찌를 그 작은 입술로 오물거린다. 소녀는 부드러히 고개를 들어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소녀의 눈은 여름 햇살 같이 밝았다. 

 

 

소녀는 들었던 까치발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소년은 자신이 더위를 먹어도 아주 심하게 먹었다고 생각했다. 다리를 물에 담그고 있는데도 얼굴이 다 후끈거릴 정도의 더위에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장대비가 자신의 등으로 다 옮겨 갔는가, 등줄기에 땀비가 아주 주륵주륵이다. 방금까지 장대비가 온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더위가 훗훗하다. 소년만 그러는 것이 아닌 양 소녀의 얼굴도 버찌처럼 붉었다. 

 

소년은 그런 더위에 마른 침을 한번 꼴깍하고 삼켰다. 마른 침 끝에는 버찌의 달달함이 진득했다. 

 

매앰. 매앰.

찌르르르-

 

 

여름이었다. 




소재 자유라고 해서 장르소설챈에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예전에 적었던거 가져와봄. 재밌게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