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애를 노예시장에서 처음 만났다.

피부는 희나 등에 채찍질을 당하고, 구속구가 있는 손목에 쓸린 상처가 있던 아이.


산 이유는 별 거 없었다. 

괴물과 사람을 써는데 지쳐 빨래와 요리를 하기 귀찮았기 때문에. 지극히 단순한 이유고, 필요에 의한 만남이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후흣, 저한테 집중해주세요. 주인님."


"흐, 그 호칭 쓰지 말라니까. 기분은 좋지만."


그런데 왜.

지금 이 애와 벌거벗고 같은 침대에 있는가. 

내 인생에서 큰 의문이다. 동시에 가장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입을 맞췄다. 

엘라의 숨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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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나는 엘라를 살림용도로 샀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 한 실수는 피부가 지나치게 희다는 거였다. 최소 시장에서 한 달은 있었겠고 그럼에도 하얗다면 유전적으로 색이 그렇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귀족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뭐하는 거지?"


"....."


엘라는 대꾸하지 못 했다. 

이왕 사는 김에 메이드복도 같이 샀는데 깨끗했던 옷은 피가 묻어있었다. 씻으라 했던 그릇은 박살났고, 잔해는 바닥에 흩어졌다. 청소를 하려면 매우 힘들 듯 하다.


"너, 이름이 뭐냐."


"...엘라, 요."


이때 이름을 처음 알았다. 잊지 못할 두 글자.


"성은 있나?"


"옆, 가문이 쳐들어와서 뺏겼어요."


"젠장."


성과 성을 구분하지 못 하는 걸 보니, 귀족이 확실했다. 

처음부터 알아야 했다. 그 애가 귀족이란 걸, 세상 이치는 하나도 모르는 꼬맹이라는 것을. 그러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빨래는... 할 줄 모르지?"


"....."


"사실대로 말해. 안 혼낼테니까."


"그, 다 몰라요. 글은 아니까 버리지 마세요. 밥은 잘 먹고, 머리는 좋으니까. 뭐든 다 할테니 버리지 마세요. 제발. 밤시중도 할게요."


아, 시끄럽네.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접시 잔해를 치웠다. 그냥 빗자루로 쓸면 되지만, 저 얇은 팔론 이것마저도 못 할 것 같았다.


쟤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한다. 

주종역전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노예상인에게 사기를 제대로 당했다.


그리고 분홍꽃이 새겨진 그릇. 

큰 맘 먹고 산 건데, 아름답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가격도 꽤 되던 걸로 기억하는데. 금화 10개짜리가 1개를 깨트렸다. 뭐, 돌이 돌을 빼낸건가. 서로 비싸다고 자랑하려고. 어이없는 일이다.


"접시, 나중에 갚아라."


"으, 네. 제가, 치울게요."


"됐다. 손이나 잘 간수해."


다 치우고 손에 조각이 박힌 걸 알아차려,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빼냈다. 깊이 박혀있어 뺄 때마다 움찔거렸다. 아파하는 표정이 보기 안쓰러웠다.


"벗어라."


난 소애성애자가 아니다. 

당연히 박을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 애를 씻기기 위해서였다. 몸은 그럭저럭 깨끗했으나 몇 군데에 때가 있었고 모험가로서 청결을 중시하던 나에겐 더러운 축이었다. 겸사 상처도 치료해야했고.


그를 화장실로 옮기고 약초를 찾았다. 

다행히 허브가 남아있었다. 대강 손으로 찧고 뭉쳤다. 등에 붙이면 금방 나으리라. 


화장실에 들어가니 엘라는 알몸이었다. 그래도 옷은 혼자 벗네. 대야에 물을 받고 툭툭쳤다. 차가운 물. 따뜻한 건 마법사한테나 가서 찾아라. 난 배테랑 모험가일 뿐이니. 


온도가 낯선지 잠시 망설이다 들어왔다. 

비누로 머리를 박박 감기고, 부끄러워하든 말든 몸 전체를 닦았다. 가슴에 닿아도 뭔 상관이라. 현재면 야한 짓이나, 이때는 꼬맹이였다. 


등에 허브를 붙이고 내일까지 때지말라 했다. 

수건을 던지고 옷은 내 걸 주었다. 바지가 끌려 천천히 걷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내 침실 한 구석을 내주고 침대에 누웠다. 상현달이 창에 비치고 엘라는 바닥에 있었다.


"저, 아저씨랑 같이 자면 안되요?"


"내가 재워주기까지 하랴? 잠은 혼자 자라."


아저씨는 뭔 아저씨. 

배게를 안 준 걸 떠올려 하날 던졌다.

얇은 이불도 주고. 이 정도면 알아서 자겠지. 눈을 감았다.


"추워요."


허나, 엘라는 내 말을 무시하고 같은 침대에 누웠다. 몸이 닿는 게 싫어 침대 끝으로 이동했으나.


쾅.


"우왓."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푸흐."


그런 내가 우스은지 피식 웃은 그녀는 이불까지 가져갔다. 그 모습이 얄미워 머리를 콩 쥐어박고 다시 누웠다. 이불은 뺏지 않았다. 추위에 떨다가, 겨우 잠들었다. 어느새 천사같이 곤히 잠든 모습에 가져갈 엄두가 안 났다.


정말 첫날이라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고아인 나에게 딸 비슷한 얘가 생겼다. 

걔가 날 아저씨라 불렀다. 

그리고, 같은 잠자리에서 잔다. 


진짜 여우다. 진짜, 얄미운 년. 

몰래 손을 잡고, 차갑기에 그대로 있었다. 그 애에게 온도를 나눠주고 싶어서.


난 과거에 그렇게 생각했다.


--


"이거 근친 아니에요?'


"음?"


키스 한 후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지 못 했다. 근친이라면 부모와 자식 사이가 아닌가. 많이 왜곡해도 양아버지와 딸 사인데, 피가 섞이지 않으니 근친은 아니다. 


가만히 있으니 그녀가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전에 성 지어줬잖아요. 넌 귀족이라면서."


"아, 그랬지."


"갑자기 옛날 생각나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같은 침대에서 잤고."


확실히 그랬던 기억이 난다. 

반역죄를 지은 가문이라, 입에 담으면 안 된다. 귀족 체면은 살려줘야하니 내 이름을 붙여줬다. 물론 나는 평민이지만. 없는 것 보단 낫지않은가. 엘라의 깊은 눈을 보며 숨을 쉬었다.


처음과 같이 달이 비치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보름달이다.


그녀가 내 집에 오고 많은 게 달라졌다. 

계속 가던 임무를 줄이고 일주일에 하루는 그녀를 위해 썼다. 마치 애완동물 키우듯이. 나중엔 진짜 딸이었지만. 


옷도 사주고, 재료를 고르며 무슨 음식을 할까 생각했다. 

버섯볶음이 영양가가 많았나. 늑대 고기를 구워줘야하나. 

실력은 별로지만. 아버지처럼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검도 가르쳤다. 

몇 년을 알려줬지만 몸이 젬병이라 호신술 수준이었다. 그래도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잖아. 그 정도로도 만족했다.


가끔 약초를 발견하면 엘라에게 줬다. 몬스터 사체도 손질해서 주었다. 맛 없다 싫어하지만, 동료의 말에 의하면 성장기 아이에게 좋다고 말해서 먹였다. 루드가 아빠 다 됐다 말했나, 걔가 결혼식때 당황했지. 패륜이 다 있다며. 어쨌든,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온갖 걸 먹인 탓인지 하루가 무섭게 자라났고, 본인이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쏙 빼닮았다. 


긴 흑발, 밤하늘이 담긴 눈.

신성한 외모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큰 가슴과 엉덩이.


남자를 홀리기 충분한 몸이었다. 나마저도.


혼자 아카데미에 보내자 잡것들이 꼬일게 걱정되어 매일 편지를 보냈다. 남자 조심하라며, 다 늑대새끼들이라고. 해도 허락받고 하라고. 


그러자 깃펜으로 꾹 눌러쓴 답신이 와, 자기 전에 촛불을 켜 읽었다. 


아버지, 평안히 계시나요. 

저는 잘 살고 있답니다. 왕자님이 고백했으나 거절했어요. 다행히 아무 일 없네요. 만나도 아버지 같은 남자랑 만날래요.아, 어제는 친구랑 마법을...


대강 이런 내용들. 행복해 보여 기분이 좋았다.

귀족답게 필체가 아름다웠으나, 출신처럼 충분히 챙겨주지 못 하는 게 아쉬웠다. 편지로 그리움을 겨우 달랬다.



어느 봄.

포근한 바람과 함께 그 애가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방학이 왔댄다. 흰 천에 금실을 수놓은 교복이 아름다웠다. 물론, 더 아름다운 것은 엘라였다. 옷 따위 엘라에 비하면 쓰레기야. 


그녀를 보니 내 심장이 뛰었다. 

예전의 나하곤 완전히 달라졌다. 더이상 무뚝뚝하고, 냉혹하게 적을 베는 이가 아니였다.고독하고 남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엘라가 나를 바꿨다.


모험했던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고 온갖 전리품을 보여줬다. 실망스럽게도 오랜만에 만난 엘라는 흥미가 없었다. 그냥 드레스라도 사줄 걸. 검은색이 어울릴 텐데. 흰색도 이쁠 테고. 돈은 얼마든지 상관없어. 내 전부라도 낼 테니까. 선물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야속했다. 


그래도 그녀는 밝게 웃으며, 보고싶었다고 말했다. 나도 웃었다. 와서 좋다고. 밥이나 같이 먹자고. 나는 옷을 직접 빨아주었다. 처음 의도와는 정반대였다.


"엘라. 사랑해."


"에, 갑자기 그러면 쑥스러워요. 헤헤."


엘라, 이제 그녀는 내 배우자다. 

겨울이 찾아올 때 그녀를 만났고, 꽃이 흩날릴 때 몸을 겹쳤다. 과거 내가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먼저 날 덮쳤고, 내가 상당히 취한 상태였던건 기억난다. 


내 마음은 애정과 성애의 어딘가였으며 그 밤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이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레아는 날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게 달랐지. 콘돔은 쓰지 않았다. 덕에 임신할까봐 속이 엄청 탔다.


그 후, 맨 정신으로도 서로를 탐했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순백의 그녀는 너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빛의 신이 강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없어야 맞는 후광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축복해주었다.


"레이, 한번 더 할래요?"


"또?"


"제 몸은 더 원하는데. 혹시... 안 서는 건 아니죠? 늙어버려서요."


"하아, 아니. 기대해 엘라. 잠 못 자게 해줄테니."


결혼 후 단점은 매일 쥐어짜인다는 것. 

엘라는 팔팔하지만 내가 문제다. 나이차가 꽤 나다보니 늙은 느낌이 든다랄까. 스무살 차이면 꽤 큰 게 틀림없다.


말을 끝내고 이불을 치웠다. 


난 이제 그녀의 위에 있다. 레아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팔로 몸을 지탱하고 레아의 앙다문 그곳에 넣는다. 얕은 신음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야한 표정이 보인다. 눈이 풀리고, 입은 벌어졌다. 난 흥분해 키스하고 혀를 섞는다. 타액을 교환하고 서로의 귀에 작게 속삭인다. 


사랑해. 

응, 나도. 


봄이 지고 겨울이 올 때까지. 

다시 꽃이 깰 때까지. 그리고 세상이 하얗게 되면.

영원토록, 너를 사랑할 거야. 죽는다 해도 다시 만나서.


나는 계속, 그녀를 안는다... 몸이 부서지도록. 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