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설거지하는 중에 부르더니 하는 말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 혹시 이상한 거라도 잘못 먹었나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에 그나마 가능성 있는 말로 되물었다. 역시 숲에서 딴 그 화려한 버섯이 문제였나? 하지만 옆집 엠마 씨가 데쳐서 먹으면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당장 옆집으로 달려가서 따져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지한 말투였다.

"린, 전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네. 네. 알겠어요. 피곤한 거 같은데 먼저 가서 누워 있어요. 설거지 끝나고 씻고 들어갈 테니."

"린!"

대충 넘기고 설거지나 마저 하러 가기 위해 몸을 뒤돌았을 때 그가 내 이름을 외치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다급했는지 힘이 바짝 들어간 상태였다.

"아얏!"

미약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사과하며 급하게 손을 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천성이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런 그이기에 숲속에 쓰러져 있는 나를 데려와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준 것 아니겠는가.

내가 그에게 반하게 된 이유에 이런 착한 성향도 한몫 차지하고 있다. 물론 얼굴도 빼놓을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래서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침대에서까지 너무 착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마 상상도 못하겠지. 잠자리에서만큼은 저 상냥한 존댓말도 갖다 치우고 저속하고 거칠게 말해 줬으면 좋겠고,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보다 엉덩이나 가슴을 찰지게 때려줬으면 하는 걸 바란다는 것을.

그런 작은, 아니 큰 불만을 은근히 얼굴에 드러내며 그를 쳐다보자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처음 꺼낸 이야기가 마냥 헛소리는 아닌듯 했다.

"그래요, 에반. '최면'이라고요?"

"네. 맞아요. 당신은 지금 최면에 걸려있어요."

최면이라... 내가?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들으려고 노력했으나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제가요?"

"... 린,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하죠. 숲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저를 당신이 구해줬잖아요."

벌써 1년 전 일이다. 그는 어느 날처럼 약초를 수집하러 숲을 돌아다니다 나를 발견했다. 그 당시의 나는 마수들의 습격으로 큰 상처를 입은 채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내려 창백해진 입술과 피부.  옆구리에 뚫린 구멍으로 장기가 흘러내리는 걸 손으로 막고 있는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체에 가까웠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옆구리가 쑤신다구요. 물론 지금은 당신이 마법으로 치료해 줘서 멀쩡하지만요."

"...... 당신이 깨어나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기억상실, 말하는 거죠? 마법으로 치료하는 거라 부작용이 있다고 했었죠. 하지만 치료가 끝나면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낯설었다. 천장도 침대도 그도. 그리고 나조차도 말이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마수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아니 애초에 내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심지어 이름조차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을 때 그가 따뜻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자신이 쓴 마법의 부작용 때문에 그런 거라고. 마법은 성법과는 달라 사람을 치유할 때 부작용이 있지만 몸이 완전히 치료되고 술식을 지우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맞아요. 오늘로 치료가 끝나서 술식을 해제할 수 있어요. 그럼 당신 기억도 돌아오겠죠."

"혹시 걱정하는 거예요? 제가 기억이 돌아오면 당신을 떠나갈까 봐? 걱정 마요. 우리 결혼까지 한 사이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펴서 그에게 들이밀었다.

약지에 걸려있는 사랑의 증표. 3개월 전 그와 함께 맞춘 작은 반지. 비록 값비싼 보석이 달려 있는 반지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기억이 돌아와도 감정은 그대로에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절 사랑하고. 이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변함없을 거예요."

그의 불안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난 힘을 주어 말했다. 기억이 돌아와도 바뀌는 것은 없다. 결코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다.

애초에 이게 어떻게 얻어낸 사랑인데 변한단 말인가. 9개월,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옆집 엠마 씨의 딸 엔, 야채가게 에이미, 여 모험가 제니까지. 수많은 경쟁자와의 치열한 암투 끝에 얻어낸 값진 사랑이었다.

'괜히 인기만 많아서... 뭐 이제 내 거니깐 상관없지만.'

결혼식 날 에이미 표정이 볼만 했었지. 미친년. 설마 육탄공세까지 할 줄이야. 그때만큼 내 외모와 몸매를 잘 뽑아주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적이 없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기억은 과거의 파편에 불과해요. 설령 제가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가 지금 사랑하는 건 당신밖에 없다고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의 손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 오늘 당신의 부모님을 찾았어요. 멀리 떨어져 있는 영지의 남작이라고 하더군요. 피로 뒤덮인 옷을 발견해서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있었다고 하던데 소식을 들으니 정말 기뻐하더군요."

그의 목소리는 긴장했는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경청하던 나는 침착하게 속으로 신에게 기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살며시 물었다.

"그... 혹시 저 결혼했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죠?"

"그런 말은 없었어요. 오히려 남자와의 만남을 하도 꺼려서 걱정거리였다고 하더군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나도. 지금 당장 두 손을 모아 경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가 지켜보고 있기에 겨우 인내할 수 있었다.

첫 경험에서 핏자국이 남아서 안심하고 있었으나 혹시 모르는 거 아닌가. 이젠 안심할 수 있었다. 결혼식 날 유니콘이 참석했어도 날 보고 눈물을 흘리며 박수 쳤으리라.

그건 그렇고 남작이라. 어쩐지 처음 입고 있던 속옷이 고급스럽다더니 나는 귀족이었던 것 같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자 의외로 쉽게 나왔다. 그를 안심시키기 좋은 방법이 말이다.

"다행이네요. 당신은 마법사라 귀족이랑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물론 어떤 경우라도 당신과 헤어지는 선택지는 없을 테지만요."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라 오히려 남작가 정도에서는 손 벌려 맞이할 정도다. 물론 그가 싫다면 내가 평민으로 내려가면 된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변할 생각이 없고 변하고 싶지도 않다. 그와의 관계는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 길로 오랜만에 돌아오신 스승님을 찾아갔어요. 기쁜 소식도 들었겠다 신나서 달려갔죠."

스승님은 고아인 그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최근 2년간 뵌 적이 없다고 했는데 나를 오늘 찾아간 모양이었다.

"스승님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꺼냈어요. 당신을 구한 이야기, 결혼한 이야기, 당신에게 건 마법 이야기까지 모두요. 그리고 치료가 끝나면 둘이서 찾아뵙겠다고 했죠."

이이도 참. 결혼식에 초대 못해 아쉬웠던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방문할 때 준비할 선물을 마음속으로 고르고 있는데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더듬거리지 않는 게 심히 기적일 정도였다.

"스승님은 중간까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셨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얼굴의 낯빛이 어두워지시더니 마지막에는 일그러지시더군요. 그러곤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님은 크게 호통치셨어요."

'에반!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그는 스승이 그에게 그리 크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역정을 내는 것을 넘어 격노였다고.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원망스럽게도.



...........




"영문도 모른 채 멍해있던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마법으로 치료라니 말이 되냐면서."

마법이란 무엇인가. 마법진이니 서클이니 그런 부가적인 것을 다 걷어내고 나오는 마법의 본질이란 외부의 마나를 술자의 마나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몸 안으로 변환되어 들어온 마나로 신체를 강화할 수도 있고 다시 외부로 분출해 세상의 법칙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이 기적이라고 불리는 힘, 마법이다.

그렇다. 마법이라는 것은 '외부'의 마나를 '술자'의 마나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무엇이었나.

'외부'의 마력을 '그녀'의 몸에 기록된 술식을 통해 변환시켜 그녀의 몸을 치료했다. 그 말은...

'이제야 네가 한 짓거리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지금 네가 한 짓은 외부의 마나로 타인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나에 간섭한 것이야! 그건...'

스승님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타인을 매개체로 발동하는 마법.
악마와 마족들의 마법이라 하여 금지된 마법.
너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허다해서 연구조차 금해진 마법.

흑마법이었다.

결과가 치료라는 긍정적인 것이라서 눈 돌리고 있었던 것인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도 내 머리는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

흑마법은 확실하다. 그럼 무슨 흑마법인가. 결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억과 정신에 관련된 흑마법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저주.

그래. 내가 그녀에게 건 것은 저주였다.

나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승의 서제로 달려갔다. 자신이 이 마법을 알게 된 계기, 어릴 때 봤던 책. 찾아야 했다, 반드시.

흑마법, 특히 저주는 무언가 대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흑마법이 금지된 이유이자 악마의 학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니깐.

미친 사람처럼 서제를 뒤진 끝에 허름한 책 한 권을 찾아냈다. 어린아이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죽 표지에는 먼지가 묻어있었다. 희멀건 먼지사이로 제목이 보였다.

'생명에 관하여'

헛웃음만 나왔다. 그 누가 이런 제목의 흑마법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자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했던 과오가.

'타인에 대한 제어 및 종속 계약 술식.'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어지는 내용은 부정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마법은 외부의 마나를 대상자의 마나로 변환해 뇌와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법이다.'

"...... 하. 씨발..."

속에 금방이라도 궤어낼 것 같은 매스꺼움이 맴돌았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뒤에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부분을 넘기고나자 어릴 적 내가 보았던 부분이 보였다.

'... 대상자의 목숨이 위급할 경우 해당 술식을 구성하는 마나의 일부를 상처 부위의 치유에도 사용할 수 있다. 방법은 일반적인 강화 마법의 변형으로 다음과 같다...'

내가 이 마법을 아무런 의심 없이 치유 마법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문항. 그러나 어릴 적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이 문장의 본질이 보였다.

'저주'의 대상자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만드는 안전장치. 삶의 연명이 오히려 고통이 되는 자들을 위한 악마의 선의였다.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자기변명을 위한 위약이 아니었기에.

내가 건 술식에 기억 상실 말고도 다른 효과가 있는지,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확실한지, 그녀가 무사할 수 있는지. 필요한 건 오직 그뿐이었다.

뒤에서 스승님의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조용했다.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서제에 울려 퍼졌다.

스륵. 스륵.

탁. 책 접는 소리와 함께 세상에 소리가 돌아왔다. 어지러웠던 머리가 말끔해지고 탁했던 세상에 색이 칠해졌다.

'부작용'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스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숲속의 작은 오두막.
사랑하는 나의 아내가 기다리는 곳.
그녀를 만나러 가야 했다.



......




타탁. 타다탁.

거실에 있는 화로에서 불씨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계절이 다가옴에 따라 사라져가는 따스한 온기를 붙잡는 소리. 그러나 오두막에 내려앉은 공기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거울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담고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두근. 심장 소리가 들렸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나 이미 실패한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식탁 위에 얹어져 있는 손도 영향을 받았는지 같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가 처음에 최면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저주나 흑마법 같은 얘기를 처음부터 했으면 나는 훨씬 더 불안해했겠지.

내가 그를 잘 알듯 그도 나를 너무 잘 알았다. 내가 겉으로는 강한척하지만 실은 나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그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저주의 '부작용'은 없었어요. 당신을 치료하기 위한 기본적인 마나 조작 말고는 행한 게 없어서 다행이었죠. 하지만......"

어둠 속 한 줄기 빛 같은 말이었다. 그래, 심각한 용어가 섞여서 그렇지 지나가면 없던 일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내 생각이 안일했다는 걸 뼈져리게 알려주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조작하는 저주에 '부작용'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이겠는가.

"사라질 거예요."

없어진다는 말이다.

"술식이 걸려있었을 때의 기억이."

그와의 추억이.

"그때 느꼈던 모든 감정이."

사랑까지도.

"전부, 사라질 거예요."

어지러웠다. 머릿속에서 벌레가 헤집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까스로 열린 입에서는 머릿속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진짜... 하.. 하하.. 거, 거짓말이죠? 네? 맞죠?"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깐. 그렇기에 이건 그에게 묻는 게 아니다.

저 하늘에 계신 신에게.
빌었다. 제발 부정해 달라고.

"... 진실이에요."

그의 말은 짧고 간결했고
신은 대답이 없었다.

"...... 다른 방법은 없나요? 찾아보면,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억을 잃지 않을 방법이.

울먹이는 나에게 그는 자책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저주는 오늘 12시를 지나면 사라질 텐데, 방법을 찾을 시간이 없어요."

미안해요.
너무 모자란 나라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라서.

그의 사과에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갔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늘리면 된다.

나는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던 과학자처럼 외쳤다.

"술식을... 저주를 갱신하면 되잖아요! 저주가 끝나야 내 기억이 사라지니 다시 갱신하고 그걸 계속하면..."

기적처럼 떠오른 생각에 그를 설득하듯 말했다. 긴장해서 더듬거리는 말투와 과장된 행동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자 그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안돼요...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에요. 지금은 간단한 저주라서 기적처럼 부작용이 없지만 갱신을 위해 술식을 겹치는 순간 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예요."

그리되면 기억도 감정도 자아도 심지어 육체도, 어느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다. 본래 저주란 그런 것이니.

내 마지막 발악은 그렇게 끝났다. 모든 걸 포기하자 그제야 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의 품은 따뜻하고 안락했다. 그 편안함에 몸을 맡기자 그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귓가에 작게 들리는 흐느끼는 소리가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기를 달래듯 약하고 천천히.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흐음, 나는 당신이 절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게 무슨...!"

그는 놀란 듯 살짝 떨어져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길 나는 장난을 칠 때 과장되게 웃는다고 했다. 볼을 타고 내려가던 눈물이 입가에 걸리는 걸 보니 장난인 걸 알아차렸겠지.

아, 그가 웃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1시간. 일에 따라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간. 하지만 그와의 마지막을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

"밤이 늦었네요. 나머지 이야기는 침실에서 할까요?"

그가 말없이 나를 공주님 안듯이 안아들고 침실로 향했다. 미리 때워놓은 난로 덕분에 침실은 겨울임에도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침대에 앉았다. 검은 눈동자와 황금빛 눈동자가 교차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

"네."

"반말해요. 시간이 없으니깐. 들어줄 거지?"

"알았어. 린."

"난 정확히 어디부터 기억을 잃게 되는 거야?"

"술식이 걸렸을 때의 기억이니... 마수의 습격을 받고 일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돼. 물론 그때와 달리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로."

"흐음... 다행이네."

"뭐가?"

"비밀. 당신이 아무것도 없는 나를 꼬시기 편하라고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설마 나 안 꼬실 건 아니지? 다른 여자 만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절대 안 하지. 내가 너랑 결혼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너 좋다는 동네 청년들 근처에도 못 오게 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어쩐지 처음 말고는 남자들이 내 옆에 안 오드라니."

"그러니 걱정 마. 난 너밖에 없으니깐. 너 아니면 나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말이야, 질투도 많고 독점욕도 강하거든? 그리고 강하게 나오면 또 싫어하는 척하면서 좋아 죽는데..."

우리는 이야기했다.
나에 대해서, 그에 대해서.
과거의 추억을, 현재의 사랑을, 미래의 소망을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야속하게도 눈치 없는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은 졸음의 형태를 띠고 내 곁에 와있었다.

"으음... 졸리네...?"

"저주가 해제되고 있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저주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내 목숨을 살려주고 그에 곁에 머무를 수 있게 해준 그것을 마냥 원망만 하지는 않는다.

"왜 또 울어... 죽는 것도 아닌데..."

우는 그를 보며 그리 말했다. 내가 또 달래줘야지. 어쩌겠는가, 난 그의 아내인데.

"그냥... 겨울이라 생각해 줘. 비록 춥고 힘들겠지만 끝이 없는 겨울은 없듯이 봄은 너무 늦지 않게 찾아올 거야. 그러니."

당신은 추워하는 내 곁에서 손잡고 있어줘.

또다시 나랑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게.

계속 곁에서...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난 그에 저항하지 못하고 눈꺼풀을 닫았다.

"사랑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야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해."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읊조렸다.

"사랑해."

사라지는 의식 너머에서 계속.

"사랑해."

나도.

"사랑해."


......


쓰다보니 길어졌네.
추운 겨울에 이 글이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가져다 줬으면 좋겠습니다.
봐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