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성검을 처음 잡게 되었을 때, 그것을 뽑게 될 줄은.


'용사여.'


성검을 통해 여신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몸에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평범했던 시골 소년이었던 카일은 용사가 되었다.


*************


용사는 몰랐다.


으레 용사들이 그렇듯 마왕을 사냥하는 길을 떠났지만, 설마 성녀가 자신의 여정에 동참할 줄이야.


성녀. 성녀. 성녀라.


성녀 엘리제, 그녀가 누구인가?


그 위대한 성국의 왕인 성왕에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며 여신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닌가!


용사는 감히 자신이 마주해도 되나 싶어 주눅이 들었지만, 애써 허리춤의 성검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도 이제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니까. 위축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니까.


"안녕하세요."


그러나 성녀를 마주했을 때, 용사는 바보처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빛 머리카락은 자신이 본 어떤 색깔보다 고고했으며, 

푸른빛 눈동자는 고향의 호수가 떠오를 정도로 맑았고,

그냥...그녀는, 아름다웠다.


용사가 귀족이었다면 이보다도 더 극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했겠으나, 한낱 촌놈의 혀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다 표현하지 못했다.


"용사님?"


아, 그 목소리도.


용사는 그 미(美)를 마음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


용사는 몰랐다.


자신이 성녀와,

성녀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이야.


"정말 꿈만 같습니다. 성녀님."

"카일, 여기에 성녀는 없어요."

"죄...미안해요. 엘리."


용사는 눈치빠르게 말을 바꿨다. 이제 이 정도는 알 수 있다는 것에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흐음...좋아요. 칼. 여기에 있는건 성녀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한 소녀에요. 알겠어요?"

"물론이에요. 엘리."

"흐흥. 좋아요."


소녀라기엔 신체의 일부가 무척이나 자기주장이 강했지만, 용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용사 카일'과 '성녀 엘리제'가 아닌, 서로간의 애칭인 '칼'과 '엘리'로서 이 순간을 즐길 뿐.


그때, 하늘에 한줄기 빛이 그어졌다.


"어머, 칼, 저것 좀 봐요."

"아, 별똥별이군요."

"저게 별똥별...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흠, 소원이라도 빌어볼까요?"

"소원이요?"


용사는 고개를 갸웃하는 성녀에게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미신을 말해주었다.


그 말을 마치자, 잠시 고민하던 성녀는 눈을 감았고, 용사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뜬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칼, 무슨 소원을 빌었나요?"

"그건 비밀입니다. 엘리."

"에, 치사하게...."

"원래 소원은 말하지 않아야 잘 이뤄진다고 하더라구요."

"흐응, 이번만 속아주는거에요."

"아니 진짠데...읍."


둘의 대화는 성녀가 용사의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끝이 났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생을 원한다는 소원을 빌었지만....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둘이 서로 같은 소원을 빌었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


용사는 몰랐다.


마왕이 그렇게 강할 줄은 전혀 몰랐다.


수많은 마족들이 성녀와 용사의 협공 아래 스러졌거늘.


마수가, 마족이, 마계의 공작들이, 사천왕들이 스러졌거늘.


마치 그들의 힘을 전부 먹어치웠다는 듯 고고하게 서 있는 마왕에게는 성검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용사는 마지막 준비를 했다. 자신의 생명을 태울 준비를.


용사의 사명 따위보다도, 사랑하는 성녀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기 하기 위해서.


"칼."


그러나 용사는 몰랐다.


"사랑해요."


자신이 성녀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성녀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고마웠어요."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애칭을 부를 시간조차 없었다.


언제나 들어왔던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스치고, 압도적인 광휘가 자신의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


동시에, 처음 성검을 쥐었을 때처럼 몸에 힘이 차올랐다.


"가요. 칼."


용사는 뒤를 돌아보려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고민하고는, 이를 악물고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건낸 한마디와 생명을 헛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렇게 빛과 어둠이 뒤엉키고. 마침내 빛이 어둠을 압도하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전투가 허무하게도, 마왕은 성검에 의해 양단되었다.


그리고 용사는 아주 티끌만한 생명력을 남기고 쓰러진 성녀를 보았다.


지금, 성녀의 마지막 힘을 받아 인간의 틀을 벗어난 용사는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고 있다. 아주 티끌만한 생명력이 남아 있으나, 곧 몸이 식어감에 따라 그것 또한 쇠하리라.


용사는 통곡했다.


*************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용사는, 아니 용사였던 청년, 카일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을 꿨군...."


아니, 꿈은 아닌가. 전부 있었던 일이니까.


피식 웃은 카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가 죽어갈 때, 그때의 용사는 몰랐다.


치유의 힘인 성녀의 힘으로 인해 아주 잠시지만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당장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음을.


그것을 깨달은 것은 자신의 몸에 칼을 꽂고 온 바닥을 피로 적셨을 때였다.


용사는 이 슬픔을 피해 죽을수도 없는 사실에 절망했고....





그리고....





"칼, 일어났어요?"

"아, 엘리."

"어서 나와서 아침 먹어요."

"이런, 오늘은 내가 준비하려고 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잘만 자던데요?"

"하하...."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가 아주 강력한 치유의 힘을 띄게 되었음을.


그것이 성녀에게 스며들어 그녀를 살려냈음을.


그때의 용사는 몰랐다.


단지 여신의 기적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러나 지금,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엘리의 남편 칼은 알았다.


불경스럽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여신보다 위대한 '두 사람의 사랑'이 엮어낸 기적임을.


조금 늦었지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