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고니안은 위대하신 드래곤과 아둔한 인간중에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그 답은 드래고니안 당사자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드래곤들 사이에선 더러운 잡종, 인간들 사이에선 그들과는 다른 외형때문에 역겹다며 배척당하는 삶.


그래,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나의 유년기다.


그땐 매일매일 신들을 원망하며 살았단다.


...그래,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하하하-! 녀석, 예쁜 얼굴로 질질 짜는게 맘에 안들었는데 이제야 웃는구나.


...아무튼, 시간이 없으니 이야기를 계속 하마.


그 누구도 날 받아주지 않아서 극단에 제발로 들어갔단다.


차마 도둑질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


먹여주고, 재워달라는 당돌한 말에, 입을 떡 벌린 극단장의 표정은 얼마나 웃기던지.


한 몇년간은 낮밤 가릴것 없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제법 괜찮은 추억이였던거 같아.


나처럼 인생이 기구한 자들만 모였었거든.


상단이 쫄딱 망해서 아내가 도망간 극단장.


그런 극단장을 졸졸 따라다니던 귀 짤린 엘프, 물론 결국 결혼까지 성공했단다.


애꾸눈 칼잡이 오크에, 왼다리가 없는 요리사 드워프, 귀머거리 피아노 연주가인 늑대 수인, 손님들 그려주는 삼류 화가인 인간 아저씨까지.


...나? 난 구석에서 날개짓이나 하거나, 꼬리로 땅 좀 쳐주고, 아주 가아끔 불을 뿜거나 했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눈 앞에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당신을 성녀로 지목합니다.] 라는 신언이 보였지.


[절망하고 있던 '만물의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당신을 쳐다봅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아, 아무 것도 아니다. 어머니께서 잠깐 신언을 보내셨거든.


...아무튼 성녀가 됐다는 내 말에, 극단의 모두가 축하해줬단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대했을지도 몰라.


자기일처럼 기뻐하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어머니의 인도를 따라 대지모신교의 신전으로 갔지.


근데 웃긴건 외곽에서 중심으로 이동할수록, 신성해야 할 신전으로 가까워질수록 나를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은 점점 늘어났어.


교단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얀 갑주를 입은 문지기들이 코를 부여잡고 이렇게 말하더구나.


우욱-, 꺼져라, 잡종. 여긴 너같은 역겨운 것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라고.


워워, 진정하거라. 어린 수녀야.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줄 필요는 없단다. 나중에 머리통을 다 깨버렸거든.


어찌저찌 신전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때 당시엔 말 그대로 난리도 아니였지.


최초로 인간이 아닌 성녀, 그것도 이종족의 피가 섞인 더러운 혼혈이 성녀가 된거니까.


교황을 필두로 추기경들, 주교들까지 모두가 내 존재를 반대했단다.


정작 그들이 떠받드는 신께선 나를 인정했는데, 그 밑의 인간들이 반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였지.


그때는 나도 그들이 역겨워져서, 구석진 성당으로 유배가듯이 떠났단다.


신벌을 내리시겠다고 격분하시는 어머니를 말리고, 그 뒤로 쭉 수련만 하면서 살았단다.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부끄러워합니다.]


풋, 드래고니안의 압도적인 육체와 신성친화력, 어머니의 조언과 투자, 하루도 쉬지 않는 단련과 신성마법 연습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졌고, 그곳에서 5년을 보낸 다음에 슬슬 실전이 필요한거 같아서 다시 속세로 내려왔지.


생각해보면 용병으로 살았던 삶도... 나름 좋았던 것 같구나.


하하, 나도 모르게 미련이 남아서일까? 어허, 또 다시 울먹거리지 말거라. 


아무튼 용병 초창기엔 정말 별 일을 다 했었지.


도시에서 고양이 찾기, 고블린 동굴에 들어가서 몰살하기, 돈 떼먹고 도망간 매춘부 잡아오기까지.


어라, 지금 생각해보면 돈되는 일이면 뭐든 다 했던 것 같구나.


주위의 경멸섞인 눈초리와 술에 취한 용병들의 추파는 항상 따라다녔지만, 그것도 매일 겪다보니 점차 무뎌지더구나.


일과가 끝나면 야시장에 들려 닭꼬치 2개를 포장하고, 미리 1년치 끊어놓은 여관에 돌아가서 술과 함께 먹고 자는 하루를 반복했지.


...사실 그때 마음이 많이 약해졌었단다.


이렇게 살다 죽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 누구도 날 원하지 않는데 굳이 성녀로 살아야 할까?


많은 고민과 유혹들이 점차 나 자신을 좀먹어갔고, 그런 날 위해 어머니께서 가야할 길을 인도해주셨지.


[추억에 빠져있던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악신의 추종자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하는건 어떻냐고 조언했다고 회상합니다.]


제법 쎄져서 그런지, 더러운 사교도들을 죽이는게 어떻겠냐는 신언에 그날 바로 출발했단다.


아주 구석진 곳부터 차근차근 부수면서 많이 돌아다녔지.


오른손엔 플레일, 왼팔엔 스쿠툼을 들고 악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부수고 다녔단다.


인신공양의 제물들로 잡힌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고, 때론 이미 희생당한 자들을 보고 악신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기도 했었지.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어머니를 찬양하는 말을 계속해서 듣다보니,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어.


하하, 맞아. 그렇게 성녀로서의 민심을 점차 늘려가다가 결정적으로 인정받게 된 '바람신의 신전 탈환 작전'의 주역이 되었지.


비밀리에 모인 사교도들이 바람신의 신전을 급습하고 신전 통채로 빼앗긴 사건이 터졌어.


아무리 영락했다고는 해도 신전 탈취는 충격적이였고, 그 소식을 듣게 된 나도 용병으로 탈환 작전에 참여했지.


처음엔 모인 대부분이 날 역겨워하거나 못마땅해했지만, 그 시선이 경외로 바뀌는건 얼마 걸리지 않았단다.


오, 그걸 알고 있구나. 맞아. 지진을 일으켜서 성벽 자체를 무너뜨렸지.


사교도들이 공성을 하기 전에, 우리는 곧바로 밀어붙였고 금방 탈환에 성공했지.


뭐, 내가 대지의 성녀다보니,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도 하루면 충분했단다.


그렇게 난 세상의 영웅이 되었고, 날 변방으로 유배보낸 교황도 다시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어.


잔뜩 붉어진 얼굴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날 성녀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해대는게 얼마나 웃기던지.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그땐 정말 속이 뻥 뚫렸다며 작게 미소짓습니다.]


성녀로 인정받은건 좋은데, 그럼 복수를 할 수가 없잖니.


그래서 그 자리에서 성기사 시험을 치겠다고 대뜸 선언하고, 첫날 봤던 문지기 두명을 대련 상대로 지목했단다.


당연하게도 그 두놈은 플레일 두번 휘두르자 머리가 터져나갔지.


그리고 모두가 침묵할 때, 다시 나를 무시한다면 똑같이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었지.


자랑을 조금 해보자면, 역대 최강의 성기사이자 성녀가 바로 나란다.


근데 어차피 성녀가 되었어도 언제나처럼 사교도 사냥에 나갔단다.


어차피 내가 신전에 자리잡고 있어봐야, 모두가 나를 불편하게 여겼거든.


"성녀님, 말씀중에 죄송하지만 마지막 피난 행렬이 곧 떠납니다."


"...알겠다. 금방 끝내도록 할테니 나가보도록."


조용히 천막 밖으로 나가는 성기사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눈앞의 어린 수녀에게 아직 해줄 말이 남았다는게 떠올랐다.


죽으러 가는 내 곁을 찾아온 작은 천사, 이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긴다는게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마지막은 이기적으로 살기로 결정했다.


"어린 수녀야,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구나. 이렇게 내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준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니?"


"성녀님, 제 이름은 엘라에요. 꼭 기억해주세요. 꼭이요."


"하하-! 그래그래. 꼭 기억하마. 대신에 네게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어린 수녀, 엘라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뭐든 부탁하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세상은 한동안 힘들거야.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서 자주 싸우겠지. 그떄가 되면 오늘 나한테 해준 것처럼 사람들을 도와주겠니?"


"네!"


"부탁하마. 세상엔 나같은 성녀가 아니라 자애로운 성녀를 원할거야. 자, 먼저 나가보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성기사 아저씨를 따라가면 된단다."


무언가 느낀걸까, 나가면서 자꾸 뒤돌아보는 엘라에게 잘가라고 열심히 손을 흔들어줬다.


"...어머니, 사실은 두렵습니다. 근데 웃긴건 죽는 것보다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봐 두려워요."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다른 차원으로 도망갈 것을 종용합니다.]


"하, 어머니께선 단 한명을 편애하시면 안되는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절 이끌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천천히 걸어서 천막 밖으로 나가자, 환한 햇빛이 나를 비췄다.


"아..."


이젠 저 따사로운 햇빛도 다신 느낄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서야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교도들이 마계와 연결해놓은 게이트를 도시규모 지하미궁으로 가둔다.


두 번째, 1층으로 들어가 입구를 막고 최대한 틀어막는다.


세 번째, 입구를 막는 것과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 지하미궁을 확장시킨다.


...그래, 이건 그냥 나만 희생하는 계획이다.


어차피 강한 순서로 층을 나눌 것이고, 던전 외벽은 어머니께서 관리하실 것이니 나만 입구를 잘 지킨다면 절대 뚫리지 않겠지.


죽어가는 노인처럼 느릿하게 걸어서 문 앞에 섰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당신의 희생은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자네들이 평소에 날 고깝게 생각한건 알아. 하지만 그런 것조차 추억이 되겠지."


올라가지 않는 오른 손을 왼팔로 부여잡고 문고리를 잡았다.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도망갈 것을 명령합니다.]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제발 문에서 그 손을 떼라고 빕니다.]

[성좌 '만물의 어머니'가 이대로 가지말라고 오열합니다.]

[성좌 '만물의...]


"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사실은 살고 싶었다. 사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들어가는 이유는...


"어머니, 저는 성녀입니다. 그 누구도 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절 인정해주셨잖아요. 비록 짧은 시간이였지만, 전 성녀로서 살아온걸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삶에 대한 미련, 어머니를 두고 떠난다는 죄책감을 털어버리고 성녀로서의 책임감만 남겼다.


"이봐, 자네. 그만 울고 한가지 부탁 좀 들어주게나."


...유언으론 어떤게 좋을까.


"이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살아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퍼뜨려주게나."


끼익-


성녀 파르마로서의 삶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약 다음 생이라는게 있다면, 그땐 인간 파르마로서 살아보고 싶다.


그때가 된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