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이 넘는, 하나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넓직한 방.

암막으로 가려져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의 구석에는 컴퓨터 불빛만을 의지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후…….”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두드린 사내, 서민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직업은 소설가였다. 딱히 등단을 한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장르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마이너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극에 달한 필력과 물 흐르듯 흘러나는 전개, 그리고 불호(不好)가 거의 없는 적당한 반전으로 그는 초기부터 웹상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장의 수익성 측면에서 어려운 출판 제의까지 받을 정도의 수익을 올렸고, 현재 출판 작가로서 발돋음을 하고자 출판용 소설을 쓰고 있었다.

 

사실 이번 소설의 내용은 앞선 글들에 비하면 다소 평범한 편이었다. 역경에 처한 용사가 어려움을 딛고 공주를 구한다는, 다소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메르헨틱한 판타지 로맨스. 출판사에서도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민호는 다음 작품의 계약까지 미리 하면서 이번 글을 출판하고자 했다. 첫 출판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 이야기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첫 독자였던 그녀를 위해서.

 

-나중에 나도 등장인물 한 명으로 넣어주면 안 돼? 주인공 옆에서 애교 부리는 가녀린 여주인공 같은 느낌으로. 그러다가 나중에 남주가 딱 하고 멋있게 등장해서 구해주는 거지. 어때?

-너랑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야, 이래봬도 나도 소녀 감성이라는 게 있거든? 

 

문득 그 날의 대화를 떠올리던 민호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손을 들고 위협하던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까지도.

 

“때리지도 않을 거였으면서.”

 

이제는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요즘 세상이 늦게 결혼한다고는 하지만 여자이니 충분히 결혼도 했을 법하다. 하지만 굳이 민호는 그녀에 대한 소식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연락을 한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애초에 소설도 좋아하지 않고 성격도 전혀 달랐던 그녀다. 그렇기에 민호는 그녀가 자신의 글을 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출판까지 결정한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 혹은 고집이었다. 작가로서 이 정도 낭만이야 있는 게 또 폼이 살지 않겠는가.

 

혼자 생각해놓고 괜히 부끄러워진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나 마실까.”

 

출판을 위한 퇴고까지 마쳤으니 이제 메일만 보내면 끝. 시원스런 기분으로 민호는 방의 불을 켰다. 혼자 살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넓고 풍족한 집안. 십여년 간 거의 쉬지도 않고 쓴 결과물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선 민호는 단지 내의 편의점 대신 굳이 조금 더 떨어진 편의점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소재를 떠올리는 것은 민호의 오랜 습관이었다. 어두컴컴한 길가에 비춘 가로등의 불빛을 즐기며 걷는 민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평소 다니던 편의점에서 그는 평소와 같지 않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뭔 여자 혼자 편의점 앞에서 술을…….’

 

이미 새벽이라 할 수 있는 시간. 아무리 치안이 좋다고는 해도 이렇게 늦은 시간 편의점 앞에서 안주 하나 없이 쌩으로 먹는 여자라니 의아한 심정으로 민호는 편의점 앞 테이블 주변을 슬쩍 살펴보았다. 

 

헝클어진 머릿결에 아무렇게나 입은 트레이닝복. 테이블 위에는 흔한 과자 안주 하나 없다. 어두운 얼굴로 캔 맥주를 들이키는 여성의 얼굴로 시선이 간 순간, 민호는 방금 전 추억을 떠올렸다. 동시에 고개를 든 여성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두 사람이 입을 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 서민호?”

“너 최유라야?”

 

 

***

 

 

“민호야, 뭐 해? 너 밥 안 먹냐?”

“아, 그게…….” 

“오늘도 빵 먹지? 야, 그럼 나 빵 좀 사다주라. 돈 줄게.”

“아, 나도! 난 피자빵!”

“…….”

“왜? 싫어? 이 새끼 표정 보소.”

“아, 아냐. 그럴게.”

“그래 땡스! 맛있는 걸로 골라와!”

“피자빵 없다고 맛 없는 거 고르면 뒤진다!”

 

그리 말하며 뻔뻔하게 웃는 2인조.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민호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돈 안 줄 거면서.’

 

그리 생각하면서도 민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평소 향하던 빵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뒤에서 다음 수업 시간 내내 지우개 똥을 날리며 괴롭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하기는 애매한 괴롭힘. 2인조가 민호를 괴롭히는 방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야, 너희 뭐야?”

 

마침 곁을 지나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불쾌하다는 듯 외친 것이다. 

 

이름이 뭐더라. 고민하던 민호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이 반에서 자신이 아는 이름이라곤 담임과 뒷자리의 2인조 뿐이었으니까. 

 

“김주호, 최기하.”

 

당찬 그녀의 목소리를 마주한 2인조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이런 걸로 태클 걸릴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그 둘을 향해 자기 할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니네가 뭔데 얘보고 사달래? 먹고 싶으면 직접 사면 될 거 아냐. 민호가 니네 빵셔틀이야?”

“아니이. 누가 그냥 사달랬나? 가는 김에 사주면 좋은 거 아냐, 같은 반 친구끼리.”

“민호 급식 먹는 걸로 아는데 굳이? 급식 안 먹는 너희끼리 가면 되잖아.”

“야, 니가 뭔 상관인데? 둘이 사귐?”

“킥킥. 저런 찐따랑 사귄다고? 최유라 보는 눈이 없네.”

“맨날 교실 뒤에서 남자 둘이 쏙닥거리는 거 보면 너희도 사귀는 거 같은데.”

“……뭐?”

“응? 뭘 그렇게 정색해? 같은 반 친구끼리 이 정도 농담도 못 해? ‘같은 반 친구’끼리.”

“아니, 이 씨발년이.”

“야, 됐다. 귀찮으니까 그냥 가자.”

 

교실 안에서 침을 퉤 뱉으며 떠나는 두 사람. 그런 대화를 들으며 민호는 자신을 도와준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최유라, 최유라. 누구였더라, 그러고 보니 항상 수업 시간에 없던 것 같은데. 아마 예체능 쪽 아이였던 것 같다. 민호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뭐 해?”

 

유라가 그에게 홱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흠칫하는 민호를 보며 다시금 일어나라는 듯 한 번 더 등을 탕 두드리는 유라. 얼떨떨한 심경으로 민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민호를 보며 유라가 씩 웃었다.

 

“야, 나 오늘 친구들한테 바람 맞아서 그러는데. 나랑 같이 먹자. 개년들이 나 혼자 두고 먹으러 간다네.”

“어? 아니…….”

“뭐. 아님 나랑 먹기 싫어?”

“……그런 건 아닌데.”

“너 어차피 친구 없는 거 알거든.”

 

그 말에는 민호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놀리는 유라를 보며 민호가 얼굴을 팍 찌푸렸다. 고민하던 민호가 참았던 말을 꺼냈다.

 

“조금 싫을지도.”

“풋. 뭐야,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잖아.”

“…….”

“그래, 민호 주제에 이렇게 날 바람 맞힌다 이거네.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도 혼자 쓸쓸하게 밥 먹으러 갈…….”

“알았으니까 같이 먹으면 되잖아!”

 

빽 소리를 지르는 민호를 보며 유라도 호탕하게 웃었다. 결국 그녀에게 반 강제로 끌린 채 민호는 급식실로 향했다. 

 

그 날 민호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혼자 먹는 밥보다는 같이 먹는 밥이 맛있다는 것을.






쓰다 보니 문득 청춘이 그리워진다

다음화는 오늘내로 올라올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