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겨울이라 그런지 오후 6시에도 하늘이 깜깜하다. 그나마 미약한 전봇대가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나는 패딩을 입은채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어두워도 확실하게 보이는 그녀의 하늘색 머리와 눈. 그 신비로우면서 아름다운 외모가 눈길을 잠시 사로잡았지만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당신! 잠깐만요!"


뒤에서 그녀가 느닷없이 날 불렀다. 그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즉답해버렸다. 아무리 이기주의가 팽배한 21세기에 사는 나라도 저런 비현실적인 미인의 요청은 거절할 수 없었다. 이게 남자의 슬픈 본능이다.


"그래서 뭘 도와드릴까요?"


"저 좀 살려주세요!"


"네?"


그녀가 내 대답에 대답할 틈도 없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그녀에게 날라왔다. 나는 즉시 그녀의 팔을 잡아 댕겼다.


ㅡ펑!


충격에 아스팔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체를 확인해보니 새까만 봉이였다. 

나는 그대로 그녀와 함께 달렸다. 무엇이 공격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직감이 위험하다는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저거 뭐에요 도대체!"


"저를 죽이러 오는 추격자요!"


"도대체 뭘 했길래! 아니 그보다 정체가 뭐에요!"


"저는 베나라고 해요. 이게 어떻게 된거냐면...."


베나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가 달리면서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검은 바디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길을 막고 있었다. 아까 봤던 검은 봉을 들고 있는것으로 보아 저 여자가 습격자겠군.


뒤둘아 다시 도망가려고 했지만 뒤는 검은 벽으로 막혀있었다. 베나가 말했다.


"제가 큰 비밀을 알아버려서, 입막음을 하려는 거에요."


"큰 비밀?"


"베헤메나. 보스로부터의 전언이다. 지금이라도 돌아와서 모든걸 함구한다면 목숨은 보장해주지."


검은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싫어요! 저는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고요!"


"그렇다면 조직의 적에게는 관용이 필요없을터."


검은 머리의 여자가 가공할 속도로 달려들었다. 할 수 없나... 나는 패딩 안주머니에서 하얀 총을 꺼내 그녀에게 쏘았다.


탕!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총을 피해버렸다. 그래도 베나에게 끌린 어그로를 나에게 돌린건 다행이다. 


검은 봉이 내게 날라왔다. 나는 옆으로 굴러 피하고 다시 총을 조준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건... 신발 밑창?


퍽!


얼굴에 퍼지는 격통과 함께 나는 날라갔다. 머리를 맞아서 그런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바닥에 쓸리면서 골목길 벽에 부딧혔다. 흐릿하게 떠지는 시야 사이로 저 개같은 년이 봉을 들고 내게 다가온다. 내 목숨을 끊기 위해서.


문득 베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기요. 이름이 뭐에요."


"이... 이효인."


"저랑 당신이랑 둘 다 죽게 생겼는데, 살 수도 있는 방법이 있으면 고르시겠나요?"


"그야... 물론이지."


"그럼 계약 성립인거에요!"


문득 시간이 느려졌다. 봉을 든 검은 년의 몸도 멈췄다. 이 현상은 도대체...


[신안을 효인님에게 공유 해드린거에요.]


머리 속으로 베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입을 움직이고 싶어도 안움직여진다. 생각을 읽는 모양인데 도대체 신안은 뭐지?


[네! 신안은 바로 저의 고유 능력! 심라만상을 관조하고 관찰하며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죠.]


그래서 지금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저랑 계약...하셨잖아요? 무르기 없기에요?]


납득은 안되지만 이해는 가네. 그래서 이거는 언제 풀리는데?


[지금 당장이요.]


그 말대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몸 상태를 점검해보니 가벼운 뇌진탕을 제외하곤 아무런 이상이 없다. 페딩이 그나마 완충을 해준건가. 나는 제빨리 일어나 패딩속에 남은 하얀 총 한자루를 꺼냈다. 평소 소지하던 총은 두 자루. 하나는 아까 맞으면서 놓쳤고 남은건 한자루.

그러나 총이 있어도 그녀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야 맞출 수가 없다.


[신안 보유자는 동체시력이 상승한답니다. 저 추격자의 움직임은 한 눈에 보일거에요.]


확실히 그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게 눈에 보인다. 아니 눈에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느리다. 세상이 다시 느려졌다. 나는 옆으로 구르면서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총을 쐈다.


이번에는 총알이 그녀를 스쳤다. 이거다. 이대로면 이길 수 있다. 나는 놓친 총을 줍기위해 달렸다. 그녀는 총에 맞아서 잠시 당황한듯 보였지만 내게 달려왔다.


후우웅!


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꽤나 살벌하다. 나는 또 다시 굴러 공격을 피하고 놓친 총을 쥐었다. 남자는 역시 쌍권총이지. 문득 베나 쪽을 바라보니 베나의 몸이 쓰러져 있었다. 어라?


[제가 효인님과 링크해서 그래요. 여기 있는건 제 정신! 링크를 풀면 다시 제 몸으로 돌아간답니다.]


그런건가. 순간 걱정했지만 문제 없으니 다행이다. 이제 쌍권총도 쥐었다. 저 년은 이제 ㅈ됐어.


"라운드 2다. 이제부턴 좀 다를거야."


"너. 좀 건방져."


내 총은 특수제다. 두 자루의 총은 둘이며 하나. 하나이며 둘이다. 떨어져 있으면 평범한 총이지만 둘이 모이면....


양쪽의 총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로 공명을 일으키며 내 몸을 매개체로 끊임없이 힘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몸이 그 영향을 받아 계속 강화된다. 하얀 총은 더 하얗게 순백의 색이 되었고, 검은 총은 더 까맣게 칠흑의 색이 되었다. 


[눈이, 제 신안이! 하늘색에서 회색으로 변했어요!] 


쌍권총을 쥐면 원래 회색으로 변해. 상식이다.


[그런 상식이 도대체 어딨다는 거에요!]


나는 베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깜둥이녀에게 총을 조준했다.


"짖어라. 흑수(黑嘼)."


왼손에 쥔 검은 총에서 검은 아우라를 뿜는 총알이 발사됐다. 그 총알은 칠흑의 짐승의 형상을 띄우며 날아갔다. 신안으로 인해 향상된 동체시력으로 그녀를 확실히 포착하게 된 이상 내 총알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깜둥이녀가 봉을 휘둘러 총알을 쳐냈다. 칠흑의 짐승이 봉에 쳐맞으며 흩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나는 달려나갔다. 멀리서 쐈을 때 막는다면, 근접해서 쏘면 되는 일.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자 내게 휘둘러지는 봉... 아니다. 봉이 휘둘러질 경로가 보인다.


[이제야 좀 적응하셨군요. 그건 신안 제 1의 능력! 미래시에요.]


나는 신안을 통한 미래시로 내게 향하는 공격들을 피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근접에서 오른손에 쥔 하얀 총을 조준했다.


"울어라. 백랑(白狼)."


산탄이 순백의 늑대의 형상을 띠며 쏘아졌다. 그녀는 봉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고작 봉으로 산탄을 막을 수 없는 법. 수많은 총알이 그녀의 몸을 통과하고 순백의 늑대가 그녀를 물었다.


끝났다. 그녀는 순백의 늑대에 물렸으니 죽지는 않는다. 몇일간 정신은 잃겠지만. 나는 베나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일어나는 베나. 그녀는 나를 향해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효인님."


"그래서 이제 어떻할건데?"


"그야 효인님 계속 따라다녀야죠."


"뭐?"


베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잡고 이마를 맞댔다. 그녀에게서 달달한 냄새가 난다. 갑자기 베나의 몸에서 하늘색 빛이 나오더니 깜깜한 밤길을 환하게 빛췄다. 이내 그 빛이 내 이마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베나가 내게 말했다.


"정식으로 계약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주인님. 저는 데우스의 제 1 정령  베헤메나라고 합니다."


"어? 어라? 주인님?"


"그치만... 계약 하셨잖아요?"



***



베나와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사는 삭막한 원룸. 다행히 평소 청소를 잘 하던 성격이라 민망한 상황은 없었다. 꼬털이라던지...


"그래서 결국엔 왜 쫒기고 있던건데?"


"저는 보스의 목적을 알아버렸거든요."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조직은 뭐고 보스는 누군데."


"멸망을 막으려는 비밀 조직 렉스휴먼. 그리고 그 조직의 보스. 대단히 위험한 조직이에요. 저를 세상를 위한다며 권유해놓고 사실 그런 악독한 짓을 계획할 줄은...."


"악독한 짓?"


"보스는 후에 다가올 멸망을 막기 위해 전 인류를 멸종시키려 했던거에요."


갑자기 스케일이 확 커졌다.


"아니 애초에 멸망은 또 뭐야?"


"멸망. 수많은 예언에서 고지한 끝. 세계가 종언을 마지하는 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위기죠. 이미 많은 전조가 보이고 있답니다."


그녀의 분위기가 한층 더 신비로워진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베나의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베나가 말했다.


"주인님. 부디 저와 함께 이 세상을 구하지 않아주시겠어요?"


ㅡ끝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