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이 났다. 나에게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조차 생소한 그 전쟁이 끝이 났다. 허무하게도, 그 전쟁은 끝이 나 버렸다. 안타깝지는 않다. 아쉽지도 않다. 그저 허무할 따름이다. 


 그래, 그 전쟁은 끝이 나 버렸다고 안타까워 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했고, 아쉬워 하기에는 내게 있어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너무나 그 전쟁이 그저 끝나버렸다는 것이 허무했다.


 그 전쟁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영웅이란 호칭을 남겼을 뿐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저 반짝거리기만 하고 가끔 꼬마들이 찾아와 선망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하는 훈장 하나만이 그 영웅이란 호칭의 물질적인 증거였다.


 이따끔 나를 선망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만나면, 나는 그날의 일이 떠오르고는 한다. 그래, 그 어둡고 추운 날의 일이 생각나고는 한다. 그래, 마침 그날은 오늘같이 하늘이 화창한 날이었다. 오늘처럼 하늘이 맑고 높은 겨울의 어느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보자.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그 날의 기억을 되짚어 간다. 그날, 나는 낙오되었다. 오늘과 같이 하늘이 요란한 날, 나는 적의 포격을 피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포격 소리와 기관총 소리와 비명 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가득히 메워서 나는 그저 도망치고 있었다. 나의 좁은 시야에는 나를 방해하는 검은 나뭇가지들과 하얀 눈들만이 가득했고, 나는 포격이 나를 뒤쫒아 오는 듯한 착각에 빠져 그저 계속 뛰었을 뿐이었다.


 나를 괴록히는 차가운 바람에 외투가 흩날렸고, 땅을 뒤덮은 눈들이 나의 발길질에 흩날렸다. 발이 시리고 다리가 아파오며, 폐가 얼어붙는 듯이 아파올 때, 눈 속에 묻혀 있던 나뭇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나는 모두와 떨어져 있었고, 눈으로 뒤덮인 숲 속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나는 숲의 정적에 파묻혔다. 그래, 숲의 정적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포격 소리와 기관총 소리와 비명 소리가 숲의 정적에 의해서 지워져 버렸다.


 나는 이 정적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래, 나는 낙오된 것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머리는 새하얗게 질렸고, 눈 앞은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바로 앞에 서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걷기 시작했다. 그저 뛰었던 것처럼 나는 다시 그저 걸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공포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가장 쉬운 일은 걷는 것이었다.


 끔찍하게 길었던 낮 동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아무일도 없었다. 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렸고, 매서운 바람과 추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 바지는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귀는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으며, 폐는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무엇보다 괴롭혔던 것은 정적이었다. 언제나 들려오던 적의 기관총 소리와 아군의 고함 소리와 포격 소리, 총성,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 전부.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이 소리를 남기며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 했다.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결정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 낮동안의 정적도 설명이 되었기에, 나는 더욱 의심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서야 나는 더 큰 공포에 휩싸여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방향을 짐작해 보았다.


 나는 거의 다 져 가는 태양을 등지며 걸어가고 있었고, 내 상식으로는 그것이 옳은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의심에 빠져 있었고, 그 의심은 나의 상식마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 했다. 그저 나는 걸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저 나는 춥고, 배고팠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나는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고 나 자신을 밀어붙여야 했고, 나는 다시 걷기로 결정을 내렸다.


 잠시 멈춘 틈에 바지가 얼어붙어 까드득 소리를 냈다.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인 귀와 손 끝을 애써 비벼보면서 내 그림자를 향해서 나아갔다. 이제는 눈마저 얼어가는지 눈이 너무나 따끔거렸다.


 해가 거의 지고, 눈발이 가까스로 멎었을 때, 나는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정말 반갑게도 적의 시체였고,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다. 나는 그 시체를 확인하러 나아갔다. 나는 그것의 시체를 열심히 뒤졌고, 혹시 있을지 모를 음식이나 지도, 특히나 간절했던 나침반을 찾고자 했다. 아까의 의심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나, 그것의 가방을 전부 뒤지고 나서도 나침반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것을 뒤짚었다. 그러자 그것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의 얼굴은 총에 맞아 터져나가 있었고, 위턱과 코는 완전히 박살나 있어 새하얀 이와, 얼어붙은 혀가 적나라하게 들어다 보였다.


 나는 그것을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못 했다. 그것에는 이미 익숙했고, 그런 것보다 그의 이빨에 보이는 금니가 더욱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대검으로 씨름을 했고, 그것의 주머니를 뒤젔다. 그의 주머니에는 피로 물든 비스켓과 아직 멀정한 초콜릿 바 2개가 들어있었다. 


 안타깝게도 나침반이나 지도는 찾지 못 했다. 그것에 아쉬워하며, 나는 얼어붙은 포장지를 까서는 입에 초콜릿을 넣었다. 딱딱하게 얼은 초콜릿이 채 녹기도 전에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아까운 초콜릿을 뱉을 수는 없어, 손에 들고 있는 초콜릿을 살펴 보았다. 내가 보지 않은 곳에 피가 굳어 있었다.


 그것을 버리자니 아까워 나는 대충 손으로 털어내고는 초콜릿을 먹었다. 단 음식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초콜릿 바를 다 먹고 나자, 잠시 잊고 있었던 추위가 찾아왔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두 덩이의 초콜릿은 내가 추위에 저항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 했다. 


 눈의 흩날림이 잦아들고, 눈에 노을이 찾아오는 시간이 지난 후, 달이 막 떠올랐을 때, 나는 약간의 빛을 보았다. 무언가가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는 총을 꺼내들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반짝임을 향해 걸어갔다.


 아군일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어쩌면 적군일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 내 심장이 요동쳤다. 본래라면 머리로 피가 몰렸을 것을, 이제는 서늘하게 식어서 싸늘한 느낌만이 올 뿐이었다.


 한참을 다가가자, 나는 그것이 얼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서 죽은 불쌍한 군인의 손이었다.


 수십, 수백여 구의 시체들이 누워 있는 가운데, 그 손 하나만큼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것이 아직  살아 있을 적, 조금이나마 간직한 온기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녹이고, 그 물이 천천히 흘러내려 뻣뻣하게 고정된 그 팔에 얇게 얼어서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눈은 그들의 얼굴을 덮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끔찍한 모습과 눈물을 눈으로 가려주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않음을 알듯이, 그들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슬픔을 느꼈다. 아주 약간의 슬픔,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어쩌면 내가 저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미 한 발자국을 들여놓은 상태이기에 더욱 공포를 느꼈다. 피부에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이 나를 그들의 곁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체를 뒤졌다. 차갑게 얼은 시체들을 눈에서 끄집어내어 그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안타깝게도 허탕뿐이었다. 시체는 많았지만, 내가 더는 그것을 뒤질 기운이 없었다. 시체를 뒤지고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눈꺼풀은 너무나 무거웠고, 추위에 온몸은 굳어 있었다.


 눈꺼풀이 감겨 잠에 들었을 때, 나는 차갑게 얼어붙은 시체에 머리를 부딪쳤다. 얼어붙은 옷에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났다. 상처는 쓰라리고 아팠지만, 흘러내린 피는 따뜻했다. 찢어진 이마를 따라서 볼을 타고 목덜미로 지나가는 그 피에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의 피는 따뜻했다고, 아직 내가 얼어죽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쳤다. 어쩌면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달빛은 내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달빛은 내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친절하게도 외로이 사투를 벌이는 나와 같이 걸어가며 나의 사투를 함께 해 주었다. 내가 힘들어 비틀거릴 때는 잡아주어 같이 비틀거리고, 다리가 아파와 걸음이 느려졌을 때에는 조용히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춰 주었다. 나는 이 친구를 이제서야 알아차렸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부모님의 농장을 도와서 농사를 지으며, 사냥을 나서고, 결혼을 해서는 잘 살 것이라는 희망에 찬,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그는 묵묵하게 들어주었다. 그는 나에게 아무런 조언도 건네주지 않았고,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 친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말을 할 때면, 뻔한 이야기에 담겨 있는 쭉정이같은 희망에 나도 조금은 희망에 젖을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비판도 비난도 없는 그림자의 그 침묵을 나는 긍정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구름이 지나가며 그림자를 가릴 때면 나는 공포에 질려서 추위에 떨었다. 나를 가려주던 얇은 천마저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추위와 어둠에 잠겨 그대로 익사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구름은 가고 친구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방금의 일은 알지도 못 하는 것처럼 완전히 똑같은 태도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최대한 밝고, 시답잖으며,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다리를 밀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는 암울해지고, 결국은 내 것이 아니던 희망은 저 눈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달이 곧 지고, 별만이 총총 빛날 때, 나는 그림자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다. 나의 과거 이야기였다.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참 하잘것 없는 뻔하디 뻔한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는 내가 담겨 있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울고 있는 내가 담겨 있었다. 내가 하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토해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미끄러 넘어졌다. 차가운 눈에 다시 이마가 찢어졌다. 차가울 눈이건만 푸근하고 따듯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차마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 손 끝만 움찔거렸다.  


 그 중에도 내 곁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내가 죽어가는 것처럼, 그 그림자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녹아가고 있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늙은이의 마지막 유언처럼,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눈이 유언을 받아적는 종이처럼, 새빨간 잉크로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내 볼을 타고 흐르는 피마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푸근한 눈보다도 차가워, 그것은 나와 함께 죽어가듯, 식어가고 있었다.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면서 나는 머뭇거렸다. 눈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넘어져 잠에 들고 싶었다. 눈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안 될 노릇이었다. 


 결국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주 희미한 그림자만이 내 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아주 큰 거인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그것의 상반신은 없고 오직 다리만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있었다.


 이젠 그도 망가져 가는구나 싶었다. 유일하게 내 곁을 지켜준 친구가 이제는 떠나가는구나 싶었다. 그 생각에 나는 허무함에 휩싸였다. 


 허무함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깨달았다. 겨우 하루만에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비틀어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록 그것이 내 진짜 친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나는 그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멈추어서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림자에게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길을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아 그림자는 마침내 저 멀리 없어졌다. 이제는 어둠과 그림자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내 눈과 내 몸을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그래, 결국 나는 어떻게든 더 걷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고, 나는 일어나고자 했으나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 했다.


 그래도 천운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다음날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날은 무척이나 하늘이 맑았고 해가 따뜻했으며 바람조차 사그라든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내가 어젯밤 보았던 얼어붙은 시체 무더기들이었다. 나는 달빛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쫒아 결국에는 그 시체들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래, 그곳에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었던 병사의 시체가 있었고, 그것은 이제 편안히 팔을 내리고 잠들어 있었다.




장르소설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잘 부탁함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