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강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 풀링스블룸(봄의 꽃이라는 뜻.). 16살의 프레야는 평소처럼 아버지의 심부름을 위해 한가로이 길을 걷고 있었다. 보통 프레야 또래의 딸을 둔 아버지라면 함부로 딸을 심부름 보내지는 않겠지만 이 도시의 영주 ‘오토 폰 레오폴트’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은인이자 전우였고, 그것을 모르는 이는 이 풀링스블룸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 어느 누구도 영주의 절친한 친구의 딸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본래 별 볼일 없는 기사였다. 하지만 20년 전, 오크와의 전쟁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위험에 빠진 오토를 구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친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토는 자기 가문의 땅인 이곳 ‘풀링스블룸’의 영주가 되었고 전후 갈 곳이 없던 그녀의 아버지를 이곳에서 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결혼하고 그녀를 낳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프레야를 낳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토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것 이였다. 영주이면서 문맹인 오토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그는 거의 3년가량을 투자해야 했다. 다행히 지금은 오토 혼자서 글을 쓸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딸 프레야의 문제였다. 어느새 그녀가 16살이 되어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나 그녀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수많은 상대를 소개해줘도, 심지어 영주 오토가 소개해주는 남자들도 거절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혼기를 놓치면 어쩔 거냐는 그의 말에 프레야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상대가 나올 때까지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여기까지 온 그녀였다. 한가로이 강가를 걷던 그녀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으… 뭐야?”


자신을 넘어지게 한 물체를 보았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 살아 있는 건가?”


남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자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 남자를 일단 자신의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몇 시간 뒤, 소년이 정신을 차렸다. 충격을 심하게 받은 듯 눈이 한동안 초점을 잡지 못했고, 계속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프레야가 소리쳤다.


“아빠, 일어났어요!”


그러자 프레야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소년이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프레야의 아버지가 되물었다.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네, 자네는 누구고 왜 강에서 떠내려 온 거지?”


“제 이름은 아인, 아인 발터입니다. 강에서 떠내려온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면 됐다. 아인, 그리고 혹시 저 무기 네 거냐?”


남자가 검과 방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아마도.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거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널 이리로 데려온 후 저걸 네 몸에서 때려고 하는데 네가 어찌나 그걸 안 놓으려 하는지 네 몸에서 때어낸다고 욕 좀 봤어.”


아인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는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근육을 지니고 있었으며 피부는 멋지게 탄 갈색이었다. 남자가 잠시 아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뭐 보아하니 너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 집에 머물지 않겠니?”


“...네, 그렇게 하죠.”


아인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해버린 탓에 당황하거나 놀란 사람은 오로지 프레야 뿐이었다.


“네? 아빠 갑자기 생판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걸 제안해도 되요?”


“저 녀석 눈빛이 나쁜 짓은 할 만한 눈이 아니야. 넌 앞으로 거기서 지내면 된다. 아인”


남자가 떠나자 지하실에는 프레야와 아인, 둘만이 남았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끝에 프레야가 입을 열었다.


“난 프레야, 프레야 프로스트블룸.”


아인이 프레야를 바라보자 긴 흑발의 그녀 역시 갈색 눈으로 아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꽤나 예쁜 얼굴이었다.


“프로스트블룸, 서리꽃이라는 뜻이구나. 좋은 성이네.”


어렸을 때부터 딱히 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서 그런 칭찬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프레야는 얼굴을 붉혔다. 프레야 조차도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느낌이 자라나고 있었다.


“뭐... 앞으로 잘 부탁해”


아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둘 중 어느 누가 먼저 사랑에 빠졌을 까, 그건 둘 다 알지 못했다. 아무튼 젊은 두 남녀 사이에 오래지 않아 사랑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아인이 마을에 정착하고 꼭 2년째 되는 날 아인의 청혼으로 둘은 결혼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프레야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평화로운 나날이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괴성과 함께 평화는 무참히 무너졌다. 


“뭐… 뭐야?”


아인이 당황하던 그때, 갑자기 프로스트블룸 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는 갑옷을 입고 자신의 무기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아인! 당장 네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와라!”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용이다! 용이 나타났어!”


“네? 앗!”


아인의 머릿속에 최근 들어 심심찮게 자신의 꿈속에 나타났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괴수,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 아인은 머리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아인 괜찮아?”


프레야가 아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나갈게요.”


아인은 프로스트블룸 씨의 예비용 누비갑옷을 입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과 방패를 들었다. 병사들이 모인 성문 밖에 나갔을 때는 전투가 한창이었지만 전황은 이제야 겨우 말을 하는 아이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단 한 마리의 용, 그 용을 상대하는 병사들은 10명이 넘었으나 그 누구도 가죽에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용은 입에서 불을 숨 쉬듯이 내뿜으며 숨결 한 번에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용을 보자마자 아인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정신을 다잡고 앞으로 나서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상처라도 입힐 수 있을까?’


아인이 온갖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용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용의 시야의 밖에서 용의 오른쪽 눈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지만 용은 칼이 자신의 눈에 닿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제서야 아인은 비늘에 덮이지 않은 눈이 유일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직감했고, 뒤이어 아인은 용의 눈을 노린 남자가 프로스트블룸 씨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동시에 성문이 열리더니 중무장을 한 기병들이 나타났다. 


“영주의 정예병 들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의 선봉에는 영주 오토 레오폴트가 있었다. 


“전원 돌격! 우리들의 마을을 지켜라! 우리들의 가족들을 지켜라!”


그 말에 아인은 우리가 무너지면 이 마을도 끝임을, 마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프레야와 볼프강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용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모든 병사들도 다시 사기를 올려 비늘이 덮고 있지 않은 눈과 입을 향해 활을 쏘고 창을 던졌다. 아인은 용이 자신의 시선을 계속 교란시키는 기병들을 노리고 불을 쏘아 대는 동안 몰래 용에게 다가가 빠르게 용의 눈을 찔렀다. 눈구멍에서 검은 피가 솟구쳐 아인에게 쏟아지자 아인은 환호했다.


“성공이다!”


그 순간, 용의 앞발이 기쁨에 잠시 취해 있던 아인의 가슴을 강타하고, 아인은 공중으로 3미터나솟구쳤다가 땅에 쓰러졌다. 용은 오른쪽 눈이 있던 자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망할 놈! 죽여주마!”


아인은 용이 자신을 향해 점점 커지는 불덩이를 담고 있는 시뻘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방금 얻어맞고 쓰러진 충격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죽는 거야? 안 돼, 이렇게 죽을 수…’


용이 아인에게 화염을 쏘자 아인은 끝을 직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인은 자신이 몸이 타는 것과 불길이 자신에게 닿지 않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뜬 순간 경악했다. 프로스트블룸 씨가 아인의 앞에 달려와 아인 대신 그 뜨거운 불의 숨결을 맞고 있었다. 불의 숨결이 그치자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인은 허겁지겁 프로스트블룸 씨에게 달려갔다. 단 몇 초가 몇 년은 되는 기분이었다.


“아저씨!”


“아인…! 내 딸아이를, 프레야를 잘 부탁한다. 만약, 그 아이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널 죽여 버리겠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정도 상처쯤은 금방 나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아인이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뜨거운 화염에 녹은 프로스트블룸 씨의 갑옷은 다시 차갑게 식으며 그의 피부에 엉겨 붙어 있었고, 그 멋진 수염도 머리카락과 함께 한줌 재가 되어 있었다. 이미 치명상이었다. 그리고 절망의 그 순간, 아인은 마침내 기억해 냈다. 지난 3년간 잊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자신의 부모님, 그들의 죽음, ‘검은 날개의 용’. 이인은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이럴 수가!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야… 내가 부족해서 부모님에 이어 또 소중한 사람을 잃었어! 이제까지 잊고 있었지만… 이젠 알 수 있어! 이놈들은 적이다! 이 세상에서 모두 쓸어버려야 할 최악의 적!!’


“다른 놈이 맞아버렸군, 상관없다. 사이 좋게 보내주마!”


용은 다시 숨결을 내뱉을 준비를 하자 아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어느때 보다도 크게 소리쳤다.


“덩치만 큰 도마뱀 자식! 죽여 버리겠어!


용이 다시 불의 숨결을 내뱉자 아인은 본능적으로 방패를 치켜 들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든 것을 살라버리던 용의 화염이 아인의 방패를 태우지 못한 채 막혀 버린 것이다. 아인도, 주변의 병사들도, 심지어 용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인은 정말로 놀랐지만 자신의 방패가 어떤 물건인지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화염이 약해지자 아인은 곧바로 칼을 치켜들어 용에게 달려들었다. 용은 자신의 앞발을 들어 아인을 내려찍었지만 아인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그 공격을 피한 뒤 칼로 용의 앞발을 내리쳤다. 놀랍게도 용의 앞발이 가볍게 잘리며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인은 직감했다.


‘용의 가죽을 베었다면… 놈의 목을 칠 수 있다는 뜻!’


용이 고통에 울부짖자 아인은 빠르게 용의 등에 올라탔다. 용은 자신의 등에 그가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는 몸을 흔들어 그를 떨어뜨리려 들었지만 아인은 중심을 잡으며 용의 머리 위로 다가가 칼을 들었다.


“죽어라 괴물!”


아인이 용의 정수리를 깊게 찌르는 순간 용의 머리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용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대고 허공을 향해 세찬 불을 뿜어 뎄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저 마지막 발악이라는 것을.


“말도 안 돼! 한낱 인간 따위가 나를!! O minuta magno! Tibi defuit…(위대하신 분이시여! 저는 실패했습니다 )”


용은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땅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곧이어 모두가 천지가 떠나가라 환호했다. 그러나 환호 속의 한 사람, 아인은 웃지 못했다. 아인은 칼이며 방패며 전부 내던지고는 쓰러진 프로스트블룸 씨에게 달려갔다. 그의 곁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의 전우 레오폴트 영주가 무릎을 꿇고는 울고 있는 것을, 프로스트블룸 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그 날카롭던 눈도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말았다. 용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아인은 화염에 사라진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인은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모든 용들을 죽이겠다.’



------절취선------

고딩때 수능 끝나고 썼던 습작 다시 꺼내서 손만 조금 봄 어딘가 익숙하다면 그때 한창 와우 하고 진격거 보던 때라 와우나 진격의 거인에서 따온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