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용이 날고.


대지는 괴물들이 뒤덮으며.


강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용틀임이 있던 시기가 있었다.


낯선 여행자를 받아들인 마을은 하루아침에 이름 없는 폐허로 무너지고.

번영하던 비단길을 가던 대상들은 땅을 파헤치는 지룡의 한 입속으로.

위대한 군주들의 깃발이 휘날리던 요새들은 불에 타 사라지던 때가 있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이 크나큰 욕심에 불과할 때에.

이름 모를 들판에 스러져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어질 때에.

유해를 거둘 이조차 없어, 백골이 펴 발라진 대지가 더는 이상하지 않을 때에.


그런 때에도 내일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 있었다. 영웅들이 있었다.


다른 모든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한 자들이.

괴물들에게 복수해 나가기를 맹세한 자들이.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나가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한 자들이.



그리하여 마침내, 왕으로부터, 군주들로부터 버려진 열 두 개의 자유도시가 황무지를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괴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고 뿔피리를 길게 불어 모든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았다.


모든 괴물로부터 무고한 이들을 수호하기로 맹세한 순찰대가 첫 번째였다.

끊임없는 훈련과 강철같은 규율로 무장한 채, 도시를 잇는 대로들과 곳곳의 요새를 지키기 위해 순찰대들이 모였다.


괴물에게 복수를 맹세한 사냥꾼들이 두 번째였다.

초월적인 힘을 다루는 선택받은 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냥꾼들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를 하기 위해, 가장 거대한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 모였다. 짝을 지어 흩어져 다니며, 순찰대와 도시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들을 사냥하기 위해 사냥꾼들이 모였다.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기로 맹세한 기사들이 세 번째였다.

스스로 믿는 가치를 가장 이상적이라 여기던 자들이. 황무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던 자들마저 그들의 신념을 위해 모였다. 검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무기 한 자루만을 손에 쥔 채. 져가는 노을 너머에서 다가와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 기사들이 모였다.


그렇게 열 번의 보름이 지나갈 때까지 순찰대와 사냥꾼과 기사들은 싸웠다. 괴물에 맞서 사람을 지켰다. 땅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지룡을 사냥하고, 하늘을 맴도는 은빛 날개의 매를 끌어 내렸다. 황무지에 내려온 여덟 마리의 용은 어느덧 다섯만이 하늘을 날 뿐이었다.

하지만 피 또한 흘렀다. 네 개의 자유도시가 용의 불길에 타 사그라졌다. 도시가 불에 타고 성벽이 무너져 내리자, 도시의 해자와 하수도를 가득 메울 정도로 들어찼던 괴물들은 해일같이 밀려들어 안을 휩쓸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없었다.

그 이상의 피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괴물들을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폐허로 가득 찬 황무지를 되찾는 것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위대한 기사와 잔혹한 사냥꾼과 용맹한 순찰대들은 황무지의 한가운데로 나섰다. 괴물들이 기어 나온 끝없는 산맥의 둘레. 깊은 숲이 시작되는 곳으로. 한때 드넓은 농지들이 펼쳐지고 땅 위로는 대상들이 오가던 평야의 끝자락으로.

감히 괴물들의 아가리 앞에 나서 지루한 싸움을 끝내고자 했다. 감히 자신을 미끼로 던져 황무지의 모든 괴물들을 끌어모으려 했다. 다섯 마리 용을 불러내 대지 위에 길게 쓰러트리려 했다.


황무지의 요새와 대로에서 이천 오백의 순찰대가 모였다.  무모하고, 가망 없었지만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황무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긁혀진 방패와 달아빠진 가죽 손잡이의 창을 지니고 나섰다.

폐허로 변해버린 요새와 마을, 그리고 그 누구도 오가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삼백의 사냥꾼이 모였다. 그들이 갈망했던 복수를 하기 위해. 하늘을 지배하며 불을 내뿜는 용을 사냥하기 위해. 그들이 사냥한 괴물들의 뼈로 만든 활과 도끼를 든 채 나섰다.

여덟 개의 자유도시와 황무지 바깥에서  오백의 기사들이 모였다. 더 나은 선을 위하고자 하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부족한 이를 지키고자 했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여제들의 대장장이가 제련해낸 검과 은빛의 갑옷을 입고 나섰다.



아홉 번 태양이 지고, 아홉 번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싸움은 이어졌다. 수없이 전설이 다시 쓰였고 삼천 삼백 명의 영웅이 나타났다.

날뛰는 지룡의 아가리에 들어가 창을 꽂아 넣은 사냥꾼이 있었다. 괴물들에게 습격받은 동지들이 다시 전열을 추스르게 하기 위해 몸을 던져낸 순찰대가 있었다. 홀로 용에 맞서 검을 빼 든 기사가 있었다.



영웅들이 싸우는 곳에서 족히 보름 거리는 떨어져 있는 자유도시에서조차 그들이 싸우는 불빛이 보였다. 용의 불길이 대지를 사르고 은빛 매와 지룡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황무지의 모두가 손을 모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없었지만, 이 모든 걸 관장하는 누군가에게 빌었다. 출신지도, 언어도, 종족마저 달랐지만, 그들이 간청하는 것은 같았다. 괴물들에게 무너진다면, 그들 앞에 남은 건 파멸 뿐이었다.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폐허만 남겨 절망 속에서 말라 죽어갈 운명 뿐이었다.



그리고 열 번째 해가 땅을 비추던 날.

드디어 아흐레간 황무지를 뒤덮었던 괴물의 울부짖음은 멈췄다. 대지를 불사르던 불길도 잦아들었다. 갈색 평야에서 깊은 숲으로 향하는 마지막 요새에서, 요새의 수비대가 나섰다. 전투의 행방을 알기 위해. 그들에게 남은 게 파멸인지, 승리인지를 알기 위해.


푸르렀던 평야는 불타올라 갈색의 흙이 드러나 있었다. 순찰대들이 돌과 모래로 쌓아 올린 요새는 형체 없이 무너져내려 있었다.

곳곳에 괴물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가장 끔찍한 악몽 속에서 등장하던 괴물들이 아무 반응 없이 땅 위에 길게 누워있었다. 그리고 영웅들 또한 누워있었다.


끔찍한 전장의 가장 깊숙한 시체 더미 속에서, 수비대는 다섯의 생존자를 찾아냈다. 그 이상의 생존자는 없었다. 둘의 순찰대와 하나의 사냥꾼, 그리고 두 명의 기사.


그들은 말했다. 전쟁은 승리했다고. 다섯 마리 용은 모두 쓰러졌다고. 서른 마리 지룡과 은빛 매도, 스무 마리의 아홉 꼬리 여우도, 쉰 마리의 시체 먹는 괴물의 왕들도 모두 쓰러졌다고. 앞으로 황무지는 괴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갈라지며 사방에 불길이 가득한 공포 속에서 등을 보인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고.


그렇게 아홉 날 동안 이어진 삼천 삼백의 영웅들의 이야기는 열흘째 아침에 마무리되었다. 아직 황무지에 괴물들은 남아있었지만 이제 살아남은 이들은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하늘을 날던 용들은 사라지고.


대지는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차며.


강은 오가는 배들로 들끓었다.


낯선 이를 경계하던 마을들은 다시 여행자를 받아들이고.

비단길은 오가는 대상들로 분주해졌으며.

길게 늘어선 요새들은 다시 위대한 도시의 깃발을 휘날렸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한 희망이 당연시되고 번영하는 불빛으로 도시가 가득 찰 때에.

과거 영웅들의 이야기가 잊히고 전설로만 남아 희미하게 전해져 내려올 때에.


자신들이 잊힐 미래를 위해 싸운 자들이 있었다.

잊히기 위해 나선 영웅들이 있었다.


다른 모든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한 순찰대가.

괴물들에게 복수해 나가기를 맹세한 사냥꾼이.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나가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한 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