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하얀 함박눈이 내리고, 귀를 자르는 칼바람이 옷결을 스쳤다.


그 무성한 추위에도 나는 코트 자락을 여미지 않았다.


척박한 만주의 겨울조차 조국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아픔에 비할 수 없었다.



나의 결의, 우리의 결의, 조국의 결의.


조선의 독립.



품에 안은 낡은 피스톨 한 정의 무게가 유독 묵직하게 느껴졌다.


딱 내 행동의 책임감 만큼의 무게이리라.



서서히 더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마치 나를 가로막는 듯 하였다.


나는 벌판 한 가운데 우뚝 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이했다.



코가 찌릿할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에도, 그 어느 것도 실려오지 않았다.


유서 깊은 조선의 왕조도, 정다운 조선말 소리도.


척박한 만주 땅에 어렵사리 심어 놓은 밀의 풀내음 만이 스쳤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향 땅을 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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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춥지? 어서오게. 차라도 내어주겠네."


"하룻밤만 지새우고 갈건데 뭘 그리... 되었네 받은 셈 치세."



내 걸음의 종착지는 황해도 개성, 어느 허름한 골목의 낡은 집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향한 나의 한 걸음.


그 걸음을 향한 마지막 안식처로는 오래된 고향 친구의 집이면 충분했다.



함께 앉아있는 식탁 위를 겨우 밝히는 조명들,


지금 우리 조선의 현실과도 같은 암울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 분위기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촛불 하나, 화려한 빛이 아닌 오래된 권총 한 정이면 충분했다.



"자네는 내일 큰 일을 해야 하니 술 한 모금도 하지 못하겠지만, 오늘 만큼은 나라도 한 잔 해야겠어. 술에 흠뻑 취하지 않으면 도저히 내일을 맞을 자신이 없네."



친구는 부엌 아래 판자를 들어올려 먼지 묻은 술 병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한 잔, 두 잔.


변변찮은 안주조차 없이 빈 속에 술을 들이키는 친구가 걱정되었지만, 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주당도 아닌 친구가 이렇게 선뜻 먼저 술을 마시는 까닭은, 


분명 무언가 기쁜 일이 있을 때나 무언가 슬픈 일이 있을 때 뿐이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 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친구와 함께 술잔을 나누고, 오랜 회포를 풀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그저 술잔을 기울여 술에 비친 숨 가쁜 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안되겠나?"



침묵의 술자리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적막하고 불안했던 소음이, 친구의 한마디와 함께 잦아들었다.



"늙은 어머니는 어디 두고 혼자 먼 길을 떠나려 하는가?..."



술주정이었는지, 어쩌면 술에 취한 척 진심을 고해하는 것인지,


친구는 바닥을 기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 추운 만주 땅에서 아들의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늙은 나의 어머니.



그의 말에 눈물이 맺혀 눈 앞에 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메여오는 목에,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붙잡고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이 그렇게나 썼다.



"자네가 오고가다 한번씩 챙겨주게. 나라고 안 슬프겠는가? 여태껏 간신히 참아왔거늘..."



이내 친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그 숨결에서 찬 술 냄새가 풍겨왔다.



친구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잔에 술을 채웠다.



"상해에 임시정부도 세워지고, 대한의 독립을 위해 결사하는 단체들도 생기기 시작했네. 꼭 자네가 아니어도 대한독립을 위해 항쟁할 목숨은 많아. 

근데 왜 자네가 나서는가? 어느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흔한 조선인 하나일 뿐이면서... 왜 그리 고된 길을 가려고 하는가?"


"단체에 속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흔한 조선인 하나조차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 각오가 있다는 것을 그 놈들에게 보여야지.

이 흔한 조선인의 이름 하나가, 후손들의 미래를 목놓아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보여야지..."


"그런다고 역사에 자네 이름 한 글자라도 남을 줄 아는가? 조선이 얼마나 썩어빠진 나라인줄을 잘 알면서도... 알면서도..."



친구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밤이 친구에게는 너무나 무서웠던 것인지, 친구는 자면서도 눈치를 보며 코를 골았다.


나는 그런 친구를 방 한 구석에 조용히 눕혔다.



"자네라도 내 이름을 기억해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유년은 날아드는 유채꽃잎처럼 금세 저 멀리, 저 멀리를 향해 날아가고,


우리는 어느새 친구의 죽음을 앞두고 눈물 대신 술을 흘릴 나이가 되었구나.



친구의 처량한 모습에는 나의 기억들이 알알이 서려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언젠가는, 천국에서라도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



끼익거리는 바닥을 짓누르고 나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탁 위에 놓여있던 술 잔과 병을 대충 치우고, 서랍장에서 종이와 붓을 꺼냈다.


나는 종이 위에 담담히 유서라고 글을 쓰고, 천천히 내 죽음을 내리 적었다.



어머니, 친구 놈 집에서 마지막으로 글 올립니다.


혼사를 치를 만큼 나이를 먹었는데도, 저는 아직 애인가 봅니다.


아직도 어머니 얼굴이 그립습니다.


저는 천하에 다시 없을 불효자입니다.


저에게는 천륜보다도 조선의 독립이 먼저입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보다 먼저 죽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당당하게 어머니에게 제 죽음을 알렸습니다.


이 불효막심한 놈을 감히 자식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설령 자식이라는 것이 그리운 날이라도 오시면,


제 친구놈을 불러다 자식이라고 앉혀 놓고 어루 만지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변덕이라도 생겨 지옥에 가야 마땅할 이 놈을 천국에 보내겠다고 하신다면,


그 곳에서 아버지와 만나 못 나눈 술 한잔 들이키며 기다리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등골이 뒷산 고개만큼 휘어질 적까지 건강하십시오.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가 감히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어머니, 부디 건강하십시오.



마지막 글씨가 번졌다.


나는 그 자국과 내 얼굴에 흐른 자국을 옷소매로 급히 닦았다.



어느새 저 너머에는 풀이 잔뜩 죽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종이를 고이 접어 화분 밑에 개어두고 집을 나섰다.


어둠은 물러갔는데도 아직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좁은 골목길에는 나른한 국수 냄새가 퍼지고, 포근한 돼지고기 냄새가 울렸다.


고향과도 같은 정겨운 향수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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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주무십니까? 도착했습니다요."



지긋한 목소리가 어느새 잠에 빠진 나를 깨웠다.


긴장감과 졸음이 몸을 뒤섞으며 싸웠는지,


기차에서도 졸았고 지금 인력거에서도 졸았다.


괜한 사소한 졸음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서둘러 눈을 비비며 잠을 달랬다.



"저 값은..."



인력거꾼이 어물쩡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값을 어느 정도로 치뤄야 하는지 잘 몰라 당황했지만,


미련함이 잔뜩 묻어나는 인력거꾼의 손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내 지갑인데, 안에 있는 돈하고 지갑 값까지 치루면 모자르지는 않을걸세. 이거면 충분하겠는가?"


"아이고, 아이고 너무 많습니다요!!"


"부족하지 않으면 되었네. 어차피 더 이상 쓸일도 없어."



내가 인력거에서 내리자 인력거꾼은 연거푸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그런 인력거꾼에게 대충 손을 흔든 다음 거리로 나섰다.



경복궁을 가리는 늙은 살쾡이 같은 조선 총독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붉은 일장기에 눈에 흩날렸다.


마치 저무는 태양 같은 아찔한 모습에 나는 눈을 지푸렸다.



예정된 거행시간은 오전 10시 35분.


마코토 총독이 매일 같이 정시에 총독으로 행차하는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인 회중시계가 오전 10시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작 8분 여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딱히 몸을 어디 숨길만한 은신처도, 건물도 없었기에 나는 거리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괜히 행동가짐을 수상하게 했다가 순사에게 붙잡히면 일은 모두 꼼짝 없이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본래는 경복궁의 고풍스런 자태가 한 눈에 보여야 할 자리에,


미련한 총독부의 모습이 저렇게 남아있으니 새삼 마음이 어지러웠다.



거리에는 일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이 즐비했고,


정다운 조선말 대신 알아듣지 못할 일본말들이 나불거렸다.


대한제국의 국기는 그 어느 곳에도 자리하지 못했다.




곧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거리로 들어섰다.


일본 경찰들이 마차를 둘러싸며 낭인들을 거리 구석으로 내몰았다.



분명 총독의 마차였다.



한 순사가 나를 거리 한 쪽으로 내모는 순간, 나는 곧바로 인파들 사이를 비집고 거리 한 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낡은 권총 한 정은 품이 아닌 내 손에 들려있었다.



거행은 찰나였다.


망설임은 곧 실패였고, 결의는 성공이었다.



굳게 다진 내 결의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거리는 고요했다.


말들은 거친 울음소리를 내뱉었고,


마차 안에서는 총독의 돼지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거리는 고요했다.



나는 곧바로 권총을 다시 조준하고 마차를 향해 몇 발을 더 발사했다.



두 발 째에는 총독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고,


세 발 째에는 총독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네 발 째에는 총독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이..이...이 미친 조센징이!!!"



한 발 늦은 순사들이 총칼을 들이밀고 나를 둘러 쌓았다.


무려 총독을 저격했음에도, 내 손에 아직 권총이 장전된 채 들려 있어서인지


그들은 쉽사리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거행은 찰나였다.



겨울 하늘은 파랗다기 보다는 하얬고, 구름은 그 순백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권총을 입에 물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끌려가서 갖가지 고문을 받고, 비참하게 죽을 바에는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자결하는게 낫다.



총독 저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결국 죽은 총독은 금세 또 다시 새로운 총독으로 바뀌고,


일본어 투성이인 신문에는 총독에 관한 이야기만이 잔뜩 실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는 고작 몇 줄로, 그것도 일본어로 적혀질 것이다.



역사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임시정부에 소속되지도, 대한의 독립을 수호하는 단체의 일원도 아니었다.


흔한 조선인인 나를, 역사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빛은 오리라.


그 빛이 내가 아닌, 먼 미래의 후손들을 힘껏 비출지라도 결국 빛은 오리라.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