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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은 더 필요 없다."


 낭군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자수를 뜨던 설화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갓을 벗고 망건만 쓴 도포 차림의 남편, 강씨 대감의 아들인 강총운이 자못 근엄한 얼굴로 병풍 앞에 앉아있었다. 


 그가 굳은 결심을 한 어조로 다시금 못을 박았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그만 낳거라."


 "그만이라고 하셔도......고작 아들 하나를 낳았을 뿐인데요?"


 "하나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 심지어 아들이라 대도 이을 수 있으니 충분히 만족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기뻐하시니 이만 끝내자."


 뜬금없는 억지에 설화는 비단 옷고름을 매만지며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제법 철이 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총운이었지만,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피우는 건 여전했다. 


 살며시 자수를 내려놓으며 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으십니까, 서방님?"


 "흥,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더냐? 아이가 많아서 무엇할까? 하나만 있어도 피곤하고 귀찮은 게 자식이거늘."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그런 상태로는 설득력이 없는데.


 말은 험하게 하면서도, 정작 품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총운이었다. 멋모르고 아비의 허벅지 위에서 버둥거리는 유아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녀석이지만, 대갓집 도련님답게 비단옷을 입히니 제법 의젓해 보였다. 


 제 엄지 손가락을 쭉쭉 빨던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팔을 내밀며 버둥거렸다. 설화를 쏙 빼닮은 눈동자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아바, 아바바."


 "그래, 그래."


 아직 말문을 트지 못한 혀 짧은 소리로 아버지를 찾자, 총운은 그런 아들을 둥게둥게 안아올리며 놀아주었다. 워낙 외모가 닮은 부자다 보니, 그 광경은 참으로 기이한 대조를 자아냈다. 장성한 총운이 갓난아기인 총운을 안고 있는 형국이나 다름없었다. 


 허공에 붕 뜬 아이가 꺄아,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자 총운이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봐라. 얼마나 귀찮으냐?"


 솔직하지 못한 남편을 보며 설화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무사히 순산을 한 후 제일 감격했던 것도, 그 후로 아들과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총운이다. 오죽하면 엄마 품이 그리울 작은 아이가 어미보다 아비를 더 좋아할 지경이 아니던가?


 "맘마, 맘마."


 다시 내려놓던 차, 부부의 어린 아들이 이번에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자 설화는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안아주었다. 슬슬 모유를 먹일 시간이었다. 


 옷고름을 풀고 한쪽 가슴을 풀어헤친 뒤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그러자 아이는 그 조막만한 입술로 오물오물 젖꼭지를 빨며 모유를 마셨다. 꼴깍꼴깍, 어미에게 의지하는 작은 생명의 맥동이 피부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설화는 조용히 따사로운 표정으로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내 몫은 남겨라. 나도 목이 마르구나."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아들의 먹을 것을 뺏어 먹는 아비가 어디 있습니까?"


 장난스럽게 선을 그으며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총운은 진심으로 억울한 낯을 띄며 궁시렁거렸다.


 "불효자식 놈......"


 "하아암, 아므마......"


 실컷 모유를 먹은 아기가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설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방 안을 걸어다녔다. 


 정성이 어린 그녀의 손길에 아이가 끄윽, 잠결에도 트림을 했다. 그러면서 어미의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 들었다. 포동포동한 볼 살이 설화의 어깨 위에서 말랑거렸다.


 완전히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며 설화는 가만히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설화의 어머니가 설화를 위해 불러준 단란한 곡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진 아이가 고로롱고로롱 코를 골았다. 


 미리 펼쳐 둔 자리에 살포시 눕히며, 설화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설화를 한 삼할 정도, 총운은 칠할 정도 빼닮은 둘만의 결실이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총운이 종전의 안건을 도로 꺼냈다.


 "어쨌든 더 낳는 건 사양이다."


 "서방님을 닮은 아들입니다. 참으로 예쁘지 않습니까?"


 "핫, 날 닮아서 예쁠 게 무엇일까? 최소한 성격은 널 닮았기를 기도해라. 아니면 맘고생을 심하게 할 테니."


 총운 스스로도 얼마나 양친의 속을 썩였는지는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 고충은 갓 며느리가 된 설화도 익히 들은지 오래였다. 시어머니와 독대할 적마다 툭하면 나오면 이야기가 그것이었으니.


 그나마 설화를 품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청산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총운의 그런 극적인 변화야말로 평민 출신인 설화가 가문에서 인정 받은 계기 중 하나였다.


 "크흠, 흠. 그리고 무엇보다......"


 살짝 민망한 낯을 하며 총운이 헛기침을 했다.


 "회임을 하면 색사를 못하지 않느냐?"


 역시 임신 기간 내내 비슷한 불평만 하던 사람다웠다.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던 설화였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주 명백한 모순점을 품은 불평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설화가 그 모순점을 지적했다.


 "매일 그렇게 하시는데 어찌 소첩이 회임을 안 합니까?"


 혼례를 치른 후로도 설화와 총운은 예전 못지 않게 뜨거운 관계를 유지했다. 임신과 몸조리 기간에는 어쩔 수 없었으나,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자 바로 달려들어 혀를 섞었던 낭군이었다. 


 설화 또한 나름 많이 참고 있었기에 서방의 열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낮이고 밤이고 서로를 탐하며 열정적으로 어우러진 것이다. 


 한데 그러면서 임신을 멈추자는 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요구인가? 자고로 손뼉도 맞아야 치는 법이건만.


 그러자 총운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


 "그, 그거야......방도를 찾으면 그만 아니냐?"


 "가령 어떤 방도 말씀이시죠? 색사 횟수를 줄이시렵니까?"


 "음, 뭐......그건 싫고......"


 풋. 예상 그대로인 반응에 설화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몰래 웃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사내였다.


 "그럼 어찌 하시렵니까?"


 "크흠, 그것이......밖에 싸면 되지 않겠느냐? 안에 싸지만 않으면 아기는......"


 그 순간 설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살짝 부끄러워 하며 고개를 숙이는 부인을 보며 총운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소, 소첩은 그......"


 잠시 머뭇거리던 설화가 마침내 말을 맺었다.


 "안에 싸는 게......훨씬 기분 좋은데......"


 "......더 낳자."


 "아, 알겠습니다."


 수줍게 대답하는 설화를 보며 총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아내가 된 아리따운 여인. 그녀와 함께 보낸 벽촌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되새겨 보면 총운은 유난히 그 고을을 질색했다. 사람이며 건물이며 음식이며,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시골 구석이었다. 근방에 광산이 있어서 그런지 공기도 탁한 느낌이었다. 


 그곳을 뒤로 하고 한양으로 이사를 할 때 가장 후련해 했던 집안 구성원도 단연 총운이었다.


 그 궁벽한 촌구석에서 얻어낸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부인이 되어 곁에 남은 설화뿐이었다. 설화의 서방이 된 것이 그나마 그 고을에서 챙긴 유일한 소득이었다.


 ......서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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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으음, 아흠, 도련님."


 총운의 품에서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며 설화가 뇌쇄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복부를 문지르는 사내의 성기, 그것을 어루만지며 설화가 말했다.


 "사랑해요, 도련님. 도련님 자지, 빨리 설화 안에 넣어주세요."


 여느 때처럼 알몸이 되어 함께 드러누운 둘이었다. 그의 어깨를 베개 삼아 기댄 설화는 땀으로 젖은 어깨를 가만히 움찔거렸다. 


 그녀의 머리 뒤에서 옥비녀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총운에게 완전히 함락된 직후, 설화는 댕기와 비녀를 번갈아 착용하며 생활했다. 밖으로 나다닐 때는 댕기를 묶었고, 집에 있을 때는 비녀를 꽂았다. 


 그럼에도 총운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같았다. 언제나 그를 갈망하며 그를 애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총운으로서도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설화야."


 "네?"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는 여인. 


 그 모습을 보자 총운은 그만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언사라 내뱉기가 껄끄러웠다. 


 자신을 물끄러미 주시하는 소녀의 자태에 관자놀이가 당기고 뱃속이 근질거렸다. 


 "너는 그......그러니까......"


 "도련님?"


 "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괜히 부루퉁한 낯으로 시선을 피하는 총운. 


 그런 그를 말없이 주시하던 설화가 슬그머니 그의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근심이 있으시면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설화 보지에 마구 박아주세요."


 너 때문에 생긴 근심이다.


 내심 중얼거리며 총운은 설화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사찰에서의 정사 직후, 그에게 완전히 굴종한 설화였다. 몸도 마음도 그를 위해 바친 그의 계집이었다. 거리낌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비녀를 끼나 댕기를 묶으나 동일해진 계집이었다.


 한데 왜인지 끝까지 그를 서방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무슨 심경인지 이제는 비녀를 낀 상태에서도 그를 도련님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자존심이나 오기가 남은 결과물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그녀는 총운을 진심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녀가 속삭이는 사랑의 말은 결코 거짓이나 꾸밈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젠장.


 괜히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속이 불편한 건 여전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태 고집을 부린다는 말인가?


 "도련님?"


 "오늘은......오늘은 더 할 필요 없다."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총운이 말했다. 그대로 설화가 폭, 가슴에 얼굴을 묻자 총운이 가만히 속삭였다.


 "오늘은 그냥 내 품에서 자거라. 절대로 나와 떨어지지 않도록."


 "네, 도련님."


 또 그 빌어먹을 놈의 도련님. 


 순순히 대꾸하며 방긋 웃는 설화의 얼굴을 총운은 괜히 흘겨보았다. 


 "날 사랑하느냐?"


 "네. 설화는 도련님만을 사랑해요."


 허면 왜 서방님 소리는 안 하는 것이야? 


 구태여 걸고 넘어지자니 창피하고 추해서 얌전히 있었지만, 총운은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람둥이 호색한의 악명에 걸맞지 않는 너저분한 태도인 건 알았다. 하지만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 총운의 낯을 조용히 바라보던 설화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따스한 가슴팍, 그 위에서 잠을 청하며 홀로 상념에 젖었다. 


 총운의 입장에서는 야속하겠지만, 막상 설화의 입장에서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당신은 내 서방님이 아니야.


 총운의 온기를 만끽하며 설화는 중얼거렸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아. 결국 다른 여인과 결혼하고, 다른 여인과 행복을 찾을 거야. 


 그때가 오면 난......


 "......"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날, 그 슬픔과 비통함을 견디기 위해 미리부터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강총운은 양반인 강씨 대감의 아들이고, 자신은 그저 하찮은 평민 계집. 부모도 없이 비루하게 자란, 흔하디 흔한 어염의 소녀.


 그러니까......그 날이 오기 전까지만 나를......


 "사랑해요, 도련님."


 살짝 물기로 젖은 음성으로 속삭이며 설화는 그를 꼬옥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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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한양으로 떠난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설화를 불러낸 도련님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산들바람이 부는 초록의 뜰, 싱그러운 풀 냄새가 자욱한 맑은 날씨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설화의 마음 속에는 이미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그러......신가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설화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총운이 말을 이었다.


 "영영 이 고을로 돌아올 일은 없다. 한양으로 떠나면 이곳과의 연은 바로 끊는다는 뜻이다."


 "......"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이별의 순간이 올 것임을 미리 예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현실의 여파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그저 머릿속으로 그리기만 하던 시기가 닥쳐오자 가슴이 먹먹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눈물을 보이고 싶은 생각도,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 생각도 없었다. 


 "잘 됐네요. 도련님은 이 고을을 싫어하셨으니까요. 한양 생활이 몸과 잘 맞으실 거에요."

 

 "......내 호오는 중요한 게 아니다."


 의미 모를 발언이었지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슬픔을 참으며 겨우겨우 물었다.


 "그래서......작별 인사를 하시러 온 건가요?"


 "내가 작별 인사 따위나 할 인간으로 보이느냐?"


 그래, 그렇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설화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런 종류의 남자가 아니지. 


 서글픔에 잠긴 소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로 내려갔다.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는 설화의 모습을 총운은 말없이 주시했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더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지금껏 이 한가지도 밝히지 않았으니.


 "......"


 사실 나......도련님의 아기를 뱄어요.


 당신을 닮은 생명이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어요. 


 매일같이 하고 싶던 고백이었으나 억지로 참고 또 참았다. 해봐야 예정된 이별을 앞당기는 결과 밖에 기다리지 않을 테니. 


 차라리 모른 척 덮고 넘어가는 편이 나았다.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홀로 아이를 기르며 살아갈 요량이었다. 


 그래,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그냥 이설화로 살아가는 것뿐이야.


 당신이 내게 뿌린 씨를 안고, 예전처럼 혼자 꿋꿋하게.


 "준비하실 게 많겠네요. 어서 가보셔야죠. 대감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내게 할 말이 없느냐?"


 할 말......


 싱긋, 총운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설화가 손을 모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사랑해요, 도련님. 안녕히 가세요."


 말을 마치며 설화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더는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질 것만 같았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나며 설화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차츰 어룽거리는 눈가의 물기를 훔치며 홀로 둘의 관계에 매듭을 지었다.


 안녕, 강총운.


 "빌어먹을, 이설화!"


 그 순간, 갑자기 총운이 설화의 팔을 낚아챘다.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도련님의 얼굴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벌써 눈물 범벅이 된 소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총운이 말했다.


 "일단 울음부터 그쳐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라는 격언도 못 들어봤더냐!"


 "도, 도련, 흐흑, 도련님, 으흑......"


 "그 망할 도련님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며 총운이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부서져라 끌어안고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끌어당겼다. 설화는 그저 그의 품 안에서 계속 눈물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도련님의 입술. 달콤하고 뜨거운 입술. 이 입맞춤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함께 굳어버렸으면.


 야속하게도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입술을 떼며 총운이 말했다.


 "알고 있다. 네가 이 고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는 걸. 네 벗들도 지인들도 모두 이곳에 있지. 한양으로 가면 좀 외롭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있으니 괜찮지 않겠느냐? 내가 외롭지 않게 보살펴 주면 그만인 문제 아니더냐?"


 무슨......무슨 말을 하는 거야?


 멍하니 도련님의 얼굴을 응시하며 설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그녀의 댕기머리가 흔들거렸다.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슬픔이 너무 커서 내 멋대로 곡해해서 듣고 있는 건가?


 "도......련님?" 


 "아아, 젠장할! 도련님 소리는 집어치워라! 내가 왜 도련님이냐? 도대체 몇 번이나 눈치를 줘야 이해하는 것이야!"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이며 총운이 화를 냈다.


 "난 네 서방님이다, 이설화!"


 서방님. 서방님. 총운 도련님이 내 서방님. 강총운이 내 서방님.


 강총운이 이설화의 서방님.


 딴에는 혼신을 다한 고백이었는지, 총운이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운 쇳소리를 냈다. 그가 설화의 어깨를 붙든 채 횡설수설을 했다.


 "내가......내가 고집을 좀 많이 피웠다. 반드시 너와 혼인을 하겠노라고. 아니면 과거 공부도 다 때려치운다고. 기껏 정신을 차린 아들이 그런 선언을 하니 부모님도 당황하셨지. 아아, 이 부분은 설명을 안 해줬던가? 최근 들어 다시 경전을 읽고 있다. 나도 언제까지고 놀고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일단 널 볼 면목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 어느 정도는 네 덕분에 시작한 공부인 셈이다. 그건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느니라."


 조리없이 마구 떠들어대는 총운을 설화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뒤이어 울컥, 복받치는 감정이 내부로부터 폭발했다. 그 감정은 곧 습기가 되어 그녀의 눈가 밑으로 펑펑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으로 인해 흘리는 낙루가 아니었다. 


 오직 감격과 기쁨으로 인해 흘리는 행복한 눈물이었다.


 "우, 울지 말라니까! 이것 참! 여, 여하튼 네게 물을 것이 있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괜히 짜증을 부리며 총운이 헛기침을 했다. 약간 뜸을 들이던 서방님이, 꽤나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가마 타는 거 좋아하느냐?"


 "......푸흡."


 엉뚱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설화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음과 울음이 섞이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손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설화가 대답했다.


 "생전 타 본 적도 없는 걸요."


 "아, 음, 그래. 그렇겠구나. 뭐, 뭐 어떻느냐? 앞으로 많이 탈 텐데. 마음에 안 들면 말이라도 타면 되는 노릇이지."


 짐짓 호탕하게 말하는 총운. 그 품에 설화가 다시 안겼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감싸쥔 채, 설화가 방긋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 백옥처럼 빛나는 얼굴. 환희와 사랑이 섞인 천상의 선녀와도 같은 미소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서방님."


 큭큭, 총운이 살짝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 서방님 소리 듣기 참 힘들구나. 내 하루이틀 단서를 남긴 게 아니거늘."


 "이제부터......이제부터 매일 불러드릴게요. 사랑해요, 서방님."


 "......나도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며 총운이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남녀는 영원히 하나가 될 기세로 각자를 놓아주지 않았다.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총운이 말했다.


 "이제 정말로 비녀를 꽂게 되었구나. 그 옥비녀는 버려라. 마음에 드는 걸로 새로 사주마."


 설화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생긋,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대꾸했다.


 "전 그 옥비녀가 가장 좋아요."


 "크흠, 마음이 바뀌면 말하거라. 옥이 아니라 황금이나 산호로 만든 것이라도 구해줄 테니."


 나름대로 호기를 부리며 총운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로서도 참으로 익숙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살아생전 여인을 대하면서 이리 부끄럽고 속이 근질근질한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총운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싹트게 한 여인을 쓰다듬으며 총운이 속삭였다.


 "나와 한양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자, 설화야."


 그러자 설화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네, 서방님.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  

 

 


 "무얼 하느냐?"


 해가 떨어진 저녁, 이부자리를 깐 부부의 넓은 방. 홀로 작은 궤짝을 들여다 보던 설화에게 총운이 물었다. 


 그러자 알몸의 설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잠시 예전 기억을 곱씹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무슨 보물이라도 넣어두었느냐? 꽤나 자주 그러는 구나."


 보물이라. 나름대로 맞는 말일지도.


 궤짝 속에 담긴 물건은 다름아닌 설화의 낡은 댕기였다. 


 비녀를 꽂게 된 후로 쓸 일이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부모님이 딸에게 남긴 유산 중 하나였으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총운이 가만히 그녀의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부인을 등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기를 낳은 후 더욱 풍만해진 유방, 그것을 정성스레 애무하며 목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눕자꾸나. 밤은 생각보다 짧다."


 "아음, 서방님."


 자신을 어루만지는 서방의 손길을 만끽하며 설화는 궤짝을 도로 닫았다. 그것을 다시 원위치시킨 이후, 총운과 입을 맞추며 이부자리 위로 쓰러졌다. 


 그와 한몸이 되어 어우러지며 설화는 황홀한 숨결을 내뱉었다. 그를 위해 허리를 놀리고 혀를 놀리며 뜨거운 쾌락 속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그 정염의 불길이 겨우 꺼진 것은 새벽별이 반짝이는 이른 시간대였다.


 땀과 체액으로 흠뻑 젖은 채, 두 남녀는 서로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뻣뻣한 자지를 보지에 넣은 상태로 설화는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주르륵, 음부 아래로 흘러내리는 정액이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행복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임신했을까? 이번에도 서방님의 아기가 내게 깃들었을까?


  "......나는 싫다."


 돌연 총운이 투덜거리며 그녀를 포옹했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영 가지지 말라는 말은 안 할 테니......한동안은 가지지 말 거라. 최소 몇 년은 이렇게......"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낭군의 뺨을 감쌌다. 설화가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했다.


 "잉태 여부는 소첩이 결정할 수 없는 걸요."


 "그래, 그랬지. 쩝......"


 살짝 아쉬워하는 서방을 위해 설화는 가만히 입을 맞추어 주었다.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사내를 위해 진심을 담은 한순간을 선사했다. 


 총운 또한 설화에게 팔을 감으며 부드럽게 호응을 했다. 고요에 잠긴 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두 남녀의 안정된 숨소리뿐이었다.


 "후우......"


 영겁과도 같던 입맞춤이 끝나고, 둘의 얼굴이 떨어졌다. 상냥하게 웃음을 짓는 자신의 부인을 보며 총운이 말했다.


 "사랑한다, 설화야. " 


 설화의 눈에 영롱한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가만히 서방님의 뺨을 쓰다듬으며 설화가 대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서방님."




- End





드디어 완전하게 설화와 총운의 이야기가 끝났다. 뭐 이딴 게 이렇게까지 오래 갔는지 원......


사실 원래는 그냥 전형적인 색마 도련님의 여성향 여주 조련물이었는데, 가다 보니 또 로맨스 해피엔딩으로 틀었다. 내가 쓰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러다 보니 캐릭터가 너무 확 달라진 것 같기도 함. 말 그대로 개처럼 따먹다가 갑자기 사랑놀음이라니......


하여간 시험기간이라 이제 다른 작품 출품은 못할 듯하다. 도리 대회는 암컷의 도리 하나만으로 끝일 듯


읽어줘서 고맙고, 재미있었으면 덧글과 추천을 부탁이 아니라 구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