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598948?category=%EB%8C%80%ED%9A%8C&p=1
1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627381?category=%EB%8C%80%ED%9A%8C&p=1

2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685625?category=%EB%8C%80%ED%9A%8C&p=1

3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720661?category=%EB%8C%80%ED%9A%8C&p=1

4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845748?category=%EB%8C%80%ED%9A%8C&p=1

에필로그: https://arca.live/b/novelchannel/39868337?category=%EB%8C%80%ED%9A%8C&p=1





 "어머니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색동옷을 차려입은 작은 소년이 대뜸 외쳤다. 


 그 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후원을 노닐던 부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행여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주변을 살피던 아버지가 물었다.


 "설마 내게 하는 말이냐?"


 그러자 소년이 끄덕끄덕 고갯짓을 하며 작달막한 주먹을 옹송그레 쥐었다. 


 여즉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순진한 동자건만, 어머니를 닮아 씩씩하고 호방한 아이였다. 벽을 짚고 아장아장 걷던 녀석이 어느새 듬직하게 자란 후였다. 아직 젖살 투성이지만, 벌써부터 아버지를 빼닮아 얼굴에서 제법 수려한 용모가 드러났다.


 그러자 세 살배기 딸을 안고 있던 어머니, 설화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영아,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언제 괴롭혔다고......"


 "소자, 어젯밤에 다 들었습니다! 목이 말라서 깼다가 전부 들었습니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앓는 소리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므무, 무, 뭐라고?"


 기겁한 설화의 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열기로 후끈거리는 이마가 펑 터질 것만 같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꾸에 입조차 뻥긋할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던 품 안의 귀여운 딸이 검지로 뺨을 콕 찌르며 옹알이를 했다. 제 오라버니와는 반대로 모친인 설화 쪽을 많이 닮은 어여쁜 아이였다. 


 "어마, 개로뼈?"


 "그, 그으......자영아, 그건 괴롭힌 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지학도 안 된 소아에게 음양정사를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이런 쩔쩔매는 태도가 오히려 확신을 주었는지 자영이 콧김을 뿜으며 아버지, 총운을 쏘아보았다. 


 "부인을 괴롭히는 것이 어찌 남편의 도리입니까, 아버지? 어머니를 울리지 마십시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오해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총운이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무언가 방책을 떠올렸나 싶어 남편을 바라보는 찰나, 설화는 불길함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특유의 교활하고도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총운이 자영을 내려다 보며 이죽거렸다. 


 "오히려 그게 남편의 도리를 다한 결과라는 생각은 못한 것이냐?"


 낭군의 언사에 그만 딸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대, 대체 아들을 붙잡고 대체 무슨 소리를......


 겨우 정신을 다잡는 동안 두 사내의 신경전은 점점 팽팽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영이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강하게 대들었다.


 "그, 그런 엉터리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께서 우는 소리를 들었단 말입니다!" 


 "글쎄, 좋아서 울었을 수도 있지."


 "그건 모순입니다! 사람은 아프고 슬플 때 우는 것입니다! 자고로 여인을 울리는 건 사내의 도리가 아니라 했습니다!"


 자영이가 벌써 사내의 도리를 언급할 나이였던가. 


 홧홧한 이마를 짚으며 총운을 툭 쳤다. 대충 둘러대고 넘어가라는 암시였으나, 총운은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그가 큭, 실소를 터뜨리며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아주 자랑스럽게 아들에게 말했다.


 "부인이 좋아서 울게 만드는 게 남편의 의무고 특권이다. 너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라고요?"


 제, 제발 그만하라고! 


 차마 머리로 따라갈 수 없는 대화에 현기증을 느끼던 찰나였다.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외마디 호통과 함께 크악, 총운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허벅지를 문지르며 비칠비칠 물러났다. 


 불쑥, 건장한 체구의 그림자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를 본 자영의 낯이 돌연히 밝아졌다.


 "할아버님!"


 "대, 대감씩이나 되시는 분이 뭐 하시는 겁니까? 아들한테 발길질이나 하고!"


 그러자 단정히 감투를 쓰고 있던 엄준한 인상의 노인이 눈을 부라렸다. 


 덥수룩한 수염을 말쑥하게 기른 체통 있는 사대부의 표본. 가문의 주인이자 강총운의 아버지, 그리고 설화의 시아버지인 강송양 대감이다. 


 허나 아들을 상대할 때만은 사대부가 되지 못하시는 안쓰러운 분이었다.


 그가 총운에게 삿대질을 하며 받아쳤다.


 "그래, 말 잘했다! 대감이 되서 아들한테 발길질까지 하는 아비 심정은 헤아릴 줄도 모르느냐, 이 못난 놈아!"


 "아버지 말 듣거라, 인석아. 넌 진짜 혼이 좀 나야해, 쯧쯧."


 뒤이어 나타난 상대를 본 설화의 딸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까르르, 어미의 품에서 꼼지락대며 옹알거렸다.


 "함무이!"


 "에구구, 그래. 우리 예쁜 소율이. 할미가 안아보자."


 인자한 인상의 노부인이 흐뭇하게 말하며 설화에게서 딸아이를 받았다. 공손한 자세를 갖추며 설화도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 오셨어요?"


 "그래. 저 녀석 떠드는 소리가 앞뜰까지 들리더구나. 늘 네가 고생이 많다, 아가."


 못마땅하게 아들을 흘겨보며 노부인이 대꾸했다. 


 강씨 대감의 부인이자 강총운의 어머니, 그리고 설화의 시어머니인 허씨 부인이었다. 대감과 더불어 굉장히 기품 있게 늙은 정숙한 반가의 여인이었다. 


 언젠가는 설화도 총운과 함께 이런 현숙한 형태로 나이를 먹게 되리라. 


 자영이 쪼르르 강 대감 쪽으로 달려오더니 말했다.


 "할아버님, 아버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부인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허허, 물론이다. 이 할애비가 따끔하게 꾸짖어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하마."


 손주를 달래며 자애롭게 머리를 쓰다듬는 강씨 대감. 그 모습을 부루퉁하게 흘기며 총운이 투덜거렸다.


 "아니, 소자가 언제 괴롭혔......"


 "시끄럽다, 이 놈아. 우선 그 입부터 다물어라."


 단단히 찍혔는지 강 대감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조부의 손을 잡아끌며 자영이 신나서 말했다.


 "할아버님, 소손이 금일도 새로운 글귀를 읽었습니다. 예전만 해도 어려워서 못 읽던 부분을 이번에는 잘 읽었습니다."


 "호오, 역시 우리 손주구나. 이 할애비를 닮아서 참으로 똘똘해. 어디, 방으로 가서 직접 보자꾸나."


 "네!"


 활기차게 대꾸하며 강 대감을 끌고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설화는 기특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독서를 즐기고 품행이 바른 모범적인 아이였다. 총명한 두뇌와 영민한 재주는 덤이었다. 오죽하면 시부모님도 매일 견부호자라며 칭찬을 하실까? 


 가뜩이나 늘그막에 얻은 늦둥이 아들은 동네방네 악평이 자자한 망나니로 성장했으니, 정반대인 손주는 수 갑절 사랑스러울 터였다.


 "아가, 율희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마실이나 다녀오거라."


 허 부인이 온후하게 말했다. 그러자 설화는 면구스러운 낯으로 대꾸했다. 


 "아니에요, 어머님. 피곤하실 텐데 괜히......"


 "할미가 손녀를 보는데 무엇이 피곤할까? 걱정 말고 다녀오너라. 요새 애들 때문에 둘만 보내지도 못하지 않았느냐?"


 가문의 일원이 되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순조롭게 적응하는데 성공한 설화였다. 


 총운의 아내로서 필요한 교양과 덕목을 열심히 배웠고, 지극정성 시부모를 봉양하며 예쁨을 받았다. 하인과 노비들도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늘 친절한 마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그녀의 출신 성분을 지적하는 사람은 가문 내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녀는 강총운의 부인인 이설화일뿐, 그 이외의 꼬리표는 스리슬쩍 자취를 감추었다.


 허 부인이 율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아이구, 이쁜 것. 엄마는 잠깐 나갔다 온다니까 할미랑 같이 놀자꾸나."


 "응! 함무이 조아!"


 앙증맞게 방싯거리는 율희의 뺨을 어루만지며 허 부인도 대감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갔다. 


 멀어지는 일가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설화는, 가만히 불퉁거리는 서방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궁시렁댔다.


 "하여간 아들 키워서 쓸 데가 없구나. 아기 때는 말이라도 잘 듣더니, 이제는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고."


 "아기였으니까요."


 낭군의 팔을 안으며 설화가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인의 온기가 전해지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총운도 심통 가득하던 표정을 풀었다. 


 이럴 때 보면 여전히 철이 없는 사고뭉치 도련님이었다.


 장난스레 그를 잡아끌며 설화가 속삭였다.


 "그럼 마실부터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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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젊은 부부는 한양 한복판의 장터로 걸음을 내딛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장의 유동이 활발한 느낌이었다. 점포를 연 상인들이 앞다투어 제 상품을 홍보하며 손님을 모으느라 열성이었다. 


 낭군의 곁을 지키며 설화는 반짝이는 눈으로 장터의 물건들을 구경했다. 


 벽촌 출신인 설화에게 한양은 참으로 신기방기한 장소였다. 몇 년을 이곳에서 보냈건만, 여전히 나날이 새롭고 신선한 곳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들어온 물류는 물론, 청나라와 왜국의 기물들까지 두루 섭렵한 시장이 아니던가? 


 초가집에서 홀로 살던 댕기머리 소녀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별천지였다.


 "구미가 당기는 게 있느냐?"


 설화를 보며 총운이 넌지시 물었다. 바깥이라 대놓고 애정을 표현하지만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와 최대한 가깝게 붙어있는 그였다. 


 그러자 설화는 배시시 웃으며 도리질을 했다.


 "소첩은 그저 눈요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쯧, 가끔은 사기도 하거라. 이 강총운의 부인씩이나 되서 굳이 청렴할 필요는 없으니."


 서방의 말에 설화는 그저 서글서글한 자태만을 유지했다. 


 때마침 그들이 지나치는 곳은 방물을 파는 가게 앞이었다. 금은보화로 치장한 장신구와 빗, 비녀, 은장도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부인의 옥비녀를 응시하던 총운이 제안을 했다.


 "비녀라도 바꾸는 게 어떠냐? 너무 오래 쓴 것 같은데."


 "소첩은 이 비녀가 가장 좋습니다."


  "거 참 특이한 취향이로구나. 모양도 재질도 밋밋하기 짝이 없거늘."


 그러자 설화가 슬며시 총운의 손을 그러쥐었다. 여인의 온기가 사내의 피부로 퍼지는 찰나, 그녀가 가만히 속삭였다.


 "서방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정물이 아닙니까? 그래서 더 각별합니다."


 내심 감격했는지 총운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음, 크흠......그래도 좀 사거라. 나도 네가 새 비녀를 꽂은 모습 정도는 보고 싶구나."


 "그럴까요?"


 생긋, 서방을 위해 상냥하게 웃으며 설화가 대꾸했다. 


 젊은 양반 부부가 멈춰서자 방물 가게의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나와 손을 비비며 해실거렸다.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여우요, 손짓은 비굴하게 싹싹거리는 파리인 불혹의 남정네였다. 


 메기처럼 두툼한 입술을 뻐끔거리며 가게 주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역시 양반 나으리들답게 안목이 높으십니다! 전부 정승 집의 귀부인들도 껌뻑 죽는다는 물건입죠! 때마침 들어온 신상품들입니다!"


 "흐음,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추천할 만한 종류가 있나?"


 "물론입죠, 나으리! 이건 산호 재질에 홍옥수를 박아서 젊은 마님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고, 이건 황금 바탕에 원앙새를 돋을새김해서 금실이 좋은 부부들이 선호하지요! 그 외에도 보시면 여럿이 있습니다!"


 총운이 적당히 가게 주인을 상대하는 동안, 설화는 천천히 가게의 장신구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가지각색의 진귀한 상품들 천지라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물이나 버섯은 기가 막히게 구별하는 그녀였지만, 이런 방물들의 가치는 감정하기 힘들었다. 


 좌우간 낭군의 권유대로 적당히 끌리는 물건을 고르던 차였다.


 "얘, 저 사람 맞지?"


 갑자기 근처에서 들려오는 소근대는 소리. 노골적으로 비웃음이 섞인 여인들의 뒷담화였다.


 "맞아, 그 여자네. 몸으로 대갓집 도련님 낚아서 팔자 고쳤다는."


 "하여간 천한 것들은 발상이 뻔하다니까? 얼마나 여우 짓을 했으면 저런 도련님이 홀라당 넘어갔을지."

 

 "쯧쯧, 강 대감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저런 천한 계집을 며느리로 들이고."


 우뚝, 방물을 매만지던 손이 정지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으며 설화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돌아보지 마. 


 구태여 저속한 도발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응해서 득 볼 것도 전혀 없었다. 


 그냥 한 귀로 넘겨, 이설화. 


 그러자 깔깔깔, 대놓고 들으라는 듯한 폭소가 뒤를 따랐다. 


 "됐어, 신경 끄자. 어차피 저런 년들 말로가 뻔하지. 나중에 서방한테 버림받고 나앉는 처지 아니겠어?"


 "풋, 끈 떨어지고 독수공방하다 보면 주제를 깨닫겠지. 천것들은 다 천것인 이유가 있다니까?"


  "본성이지, 본성.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구걸해서 입은 비단옷으로 마님 행세라니, 나 참."


 실컷 설화를 조롱하던 여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이윽고 완전히 사라지자, 설화는 조용히 옷고름을 어루만지며 심호흡을 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다. 평민 계집이 대갓집 도련님과 혼례를 올릴 때부터, 그를 따라 한양으로 상경할 때부터 이런 류의 험담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낭군에게 사랑받고 시부모에게도 인정 받은 그녀지만, 외부의 시샘까지 모조리 피해갈 길은 없었다. 


 그래, 이건 당연한 일이야.


 그렇지만......역시 상처 받는 건 어쩔 도리가 없네.


 "흐음, 서방님. 소첩은 이게......"


 일부러 활짝 웃으며 가락지 하나를 집어들던 차였다. 


 서방의 일그러진 표정을 발견한 설화는 그만 기겁하며 숨을 멈추고 말았다. 


 "저 찢어죽일......"


 여인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며 총운이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버럭 화를 낼 때도, 냅다 짜증을 부릴 때도 보인 적 없는 살벌한 얼굴. 벌떡 선 목과 이마의 혈관, 다 드러난 희번득한 흰자위, 으득 맞물린 치아, 잔뜩 긴장된 턱 근육. 정말 안광만으로도 사람을 꿰뚫을 수 있을 법한 무시무시한 낯이었다. 


 자칫 돌발 행동을 벌이기 전 재빨리 소매를 붙들었다.


 "서방님. 참으세요."


 "참으라고? 저것들이 방금 널더러......"


 "서방님."

 

 굳센 어조로 속삭이며 손을 잡았다. 그대로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설화의 말에 총운도 조금씩 분노를 눅잦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분이 풀리지 않는지 까드득, 어금니를 악물며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눈을 부라렸다. 


 둘이서만 오붓하게 나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노비나 머슴들을 대동하고 나왔다면 당장 저 여인들을 잡아오라고 하명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니.


 둘을 바라보던 가게 주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아이고,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한양 바닥이 바닥이다 보니 온갖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차라리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요, 암."


 "후우, 됐네. 아까 그거나 주게."


 "아, 옙! 여기 있습니다, 나으리!"


 판매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의 발로인지 가게 주인이 연신 벙글거렸다. 


 그가 내민 것은 알록달록한 보석과 귀금속으로 치장한 순백색의 비녀였다. 진주와 보옥, 산호의 조화가 흰 표면과 맞물려 신비로운 매력을 자아내는 정묘한 작품이었다. 비녀 끄트머리에는 색색의 꽃망울이 풍성하게 영글어 있었다. 


 그 비녀를 설화에게 선보이며 총운이 물었다.


 "이건 어떻느냐? 네게 꽤 어울릴 것 같다만."


 서방이 주는 비녀를 받으며 설화는 요모조모 모양새를 뜯어보았다. 


 눈썰미가 탁월한 총운이 고른 물건이라 그런지, 매우 고급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방물이었다. 설화의 머리에 꽂으면 희고 갸름한 목과 굉장히 잘 어울릴 성싶었다.


 가게 주인에게 비녀를 건네며 설화가 말했다.


 "마음에 드네요. 이걸로 주세요."


 "예이, 이리로 오시지요. 물건 값을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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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최소 정승까지는 해볼 것이다. 영의정이 못 되볼 것은 또 무어냐?"


 까악까악, 노을 지는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까마귀를 보며 총운이 말했다. 


 난데없는 발언에 그 옆을 따르던 설화는 아리송한 낯을 띄웠다. 


 장터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매한 물품들이 두 부부의 수중에 가득했다. 부부를 위한 물품, 아이들을 위한 한과와 엿, 시부모님을 위한 간단한 선물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리 될 줄 알았으면 머슴이라도 서넛 대동하고 나올 것을. 둘만 있고 싶어서 몸종조차 없이 단란하게 나선 것인데.


 "못하실 건 없지요. 한데 갑자기 왜 그런 다짐을 하십니까?"


 과거에 급제했지만 도통 조정의 사무에 관심이 없던 그였다. 이른바 부전자전, 강 대감 못지 않게 영특하고 빠릿빠릿한 사내였으나 성실성과 의욕은 현저히 부족했다. 그나마도 설화를 만나며 겨우 생긴 것이니 원래는 어떠했을지 불 보듯 뻔했다. 


 자연히 이런 화제를 꺼낸 적도 없는 사람인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총운이 흘깃 설화를 곁눈질하며 대꾸했다.


 "내가 정승이 되면 자동으로 너도 품계가 오르지 않겠느냐? 그럼 아까처럼 함부로 구는 것들도 사라지겠지."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설화가 말했다.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습니까?"


 "네가 이상한 거다. 그런 말을 듣고도 어찌 그리 차분하느냐? 나였다면 당장 주둥이를 칼로......"


 "서방님, 정승이 되시겠다면서 어찌 언행을 삼가지 않으십니까?"


 총운은 그저 팩 콧김만 뿜을뿐,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설화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각오하던 일이었습니다. 소첩의 출신이 비천한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굳이 따지고 들어서 좋을 것도 없고요."


 "그걸 비난거리로 삼는 건 또 다른 문제가 아니더냐? 감히 누구 멋대로......"


 킥킥, 씨근덕거리는 낭군의 태도에 설화가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설화가 심한 짓을 당했지만, 그래도 총운의 반응은 지나치게 과격했다. 만약 시비가 붙었더라면 자연히 가문에 누를 끼쳤을 터. 총운에게나 그녀에게나 나쁜 결과만 남았으리라. 


 차라리 대놓고 외면하는 쪽이 훨씬 현명한 처사였다. 설화도 이를 알기에 낭군을 뜯어말린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기뻤습니다."


 "음? 뭐가 말이냐?"


 "후훗, 비밀입니다."


 노발대발한 총운의 살벌한 표정. 


 그것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진 설화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의 진심이 생생하게 전달된 것이다. 


 그녀를 욕한 자들에게 저리 뜨거운 노기를 표출하는 모습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짓궂은 설화의 답변에 총운은 실소를 흘리며 이죽거렸다.


 "거 우스운 비밀도 다 있구나. 기쁜 이유가 비밀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사뿐히 서방의 어깨에 기대며 설화는 천천히 들숨 날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총운이 말했다.


 "내가 반드시 널 지킬 것이다. 아무도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 것이야. 네 서방의 말이니 믿거라."


 "당연히 믿어요."


 설화의 상냥한 대꾸에 총운이 슬며시 낯을 붉혔다. 


 "슬슬 셋째도 만들자꾸나. 자영이, 그 녀석보다는 덜 배은망덕한 녀석으로."


 후훗, 즐겁게 웃으며 설화가 고갯짓을 했다.


 "네, 서방님."


 서로의 온정에 의지하며 총운과 설화는 화목하게 집을 향해 돌아갔다. 


 그들의 위로 낭만적인 한양의 노을이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 END





미안하다,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뇌절을 해버렸다. 분명 전편으로 끝날 이야기였는데 1절에서 못 끝낸 내가 미친 놈이다


유종의 미를 안 거두고 뇌절을 거듭한 대학생에게 불세례를. 기말고사 준비나 똑바로 할 것이지......


그냥 저 커플과 관련해 몇 가지 장면을 더 쓰고 싶어서 후일담이랍시고 써버렸다. 


어쨌든 이걸로 진짜 끝이다. 더는 뇌절 따위 없을 테니 눈갱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읽어줘서 고마웠고, 괜찮았으면 추천과 덧글을 구걸합니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