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거스라고 하는 종족은 기이하게도 무언가로 의태 가능한 부정형의 신체를 가지고, 이상하게 메이드의 일을 하기 좋아하는 종족이라는 인상이지. 가끔 독신인 주인한테 건방지게 흑심을 품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어느 시대에 딱히 메이드가 하고 싶지도, 지금 모시는 주인에 대해서 연애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뭔가 종족적인 의무감으로 어느 저택에서 메이드로 일하던 쇼거스가 있었어.


쇼거스는 어느 날 주인님이 손님을 맞이할 응접실에 걸어두게 그림을 좀 사오래서 화가들이 모여있는 언덕길로 갔다가어.


그런데 여러 그림을 걸어두고 고객과 흥정하거나, 지금도 초상화를 바쁘게 그리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그려둔 그림이 아무 것도 없는데다 아무도 관심 하나 가지지 않는 어느 한 화가에게 관심이 생겼지.



쇼거스가 그 화가에게 왜 아무 것도 안 팔면서 나와있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는 미리 그려둔 그림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림이 아닐 거라고, 자기는 누가 그려달라고 해야 그리기 시작하는 화가라고 설명했어.


근데 부러진 다리에다 판자를 못질 해놓은 낡은 이젤도 그렇고, 손잡이에 때가 탄 붓도 그렇고, 허름한 옷가지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이 화가의 그런 철칙이 벌이에 미치는 영향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어.



그래도 주인님이 주신 돈이 좀 넉넉했던지라, 쇼거스는 응접실에 걸어야 할 목적이라면서 대충 풍경화나 신화 속 한 장면 같은 걸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어.



그러자 화가는 쇼거스의 주인님은 뭘 하는 사람인지, 평소에 오시는 손님이 어떤 분인지, 응접실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천장까지의 높이, 응접실에 이미 걸려있는 그림의 크기나 내용, 색까지 물어보더니, 물감 값이 필요하다면서 상당히 큰 돈을 요구했어.



만약에 이 화가가 처음부터 이 액수를 불렀으면 아마 쇼거스는 그냥 다른 사람한테서 그림을 샀을 거야.


하지만, 굉장히 소소한 정보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고, 그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태도에서 이 화가가 가진 진심을 쇼거스는 느낄 수 있었지.


결국 쇼거스는 화가에게 거금을 주었고, 나머지 돈으로는 하는 수 없이 조금 싸구려틱한 그림을 사갔어.




아가씨 시절에 그림을 그리셨던 저택의 마님은 자세히 보면 어리숙한 그림들을 보고 투정했지만, 은행대출업을 하는 주인님은 자기가 젊은 예술인에게 투자하는 사람처럼 보일 거라면서 흔쾌히 넘어갔지. 화려함은 쇼거스가 주문했다는 그림으로 커버될 거라면서 말이야.




쇼거스는 부디 자신이 그 화가를 믿었던 게 실수가 아니기를 빌었어.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어 쇼거스가 다시 찾아갔는데, 쇼거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어.


그 화가가 그림이 완성이 안 됐다는 거야. 해외에서 수입되는 물감을 사려는데 선박 하나가 해적질을 당해서 염료값이 올라서 예산이 초과됐대.


그러면서 돈을 더 달라고 했는데, 이쯤 되자 쇼거스도 이 화가가 사기꾼이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지.



근데 사기꾼이면 좀 사기쳐서 번 돈을 지 좋을대로 쓸 거 아니야?



이 화가한테서는 자기한테 돈 쓴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어. 밥 잘 먹고 못 먹은 것처럼 꾸민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술냄새가 나지도 않는데다가, 자세히 보니 손톱 사이와 지문 사이, 붓과 앞치마에는 지난 번에는 보지 못한 물감자국도 가득했지. 그림에 손 안 대고 의뢰금만 먹튀할 사기꾼이라면 이 정도로 공을 들이진 않을 거야.



하지만 쇼거스가 화가를 믿고 돈을 더 주거나 물감을 구해다주려고 해도, 염료상인의 '아이고 손님이 사가신 것 때문에 이제 남은 하나가 더 희소해졌으니 가격을 올리겠습니다요.'라는 신박한 주장에 쇼거스가 가진 돈을 다 털어도 화가가 말하는 값을 지불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어.


주인님한테 가서 돈을 더 달라고 해? 물론 수중에 돈이 많은 주인님에게 이 정도 돈이면 사치로 넘길 수 있지만, 메이드 된 입장으로 그걸 대놓고 부탁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었지.



결국 쇼거스는 자신이 물감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어.



쇼거스는 청소할 때 정도나 썼던, 의태와 분리를 이용해서 화가의 앞에서 자신의 신체를 염료로 바꾸어주었지.


화가는 마치 보석이라도 감정하듯 쇼거스가 변한 염료를 햇빛에 비춰보고, 만져보고, 물감자국이 가득한 이젤의 다리에 슥 문질러보더니, 혀를 찼어. 이건 점도가 너무 묽대. 그러면서 다시 만들라는 거야.



그렇게 쇼거스는 아침부터 자그마치 반나절을 화가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물감 만들기를 반복했어.



어떤 색은 좀 더 푸르게, 어떤 색은 검지만 그것이 타서 눌러붙은 검은색이 아닌 어두운 고양이와 같은 색으로, 어떤 빛은 푸른 것에 붉은 빛이 섞이며 보이는 어슴푸레한 보라색으로.


화가는 해괴한 표현으로 두루뭉실한 느낌을 쇼거스에게 설명하고는, 쇼거스가 힘들게 내놓은 물감 색이 마음에 안 드니, 이건 너무 질척하니, 이건 너무 옅으니하며 불평했지,


이짓을 반나절 하자 결국 쇼거스가 폭발했어. 작작 좀 하라고 쇼거스 답지 않게 화를 냈지.


근데 쇼거스가 어처구니 없는 건, 오히려 화가 쪽도 이만큼 설명했는데도 왜 못 알아듣냐면서 화덩달아 폭발한 거였지.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짐까지 내버려두고는 화가가 쇼거스의 손을 잡아끌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거야.





당황하던 쇼거스가 화가의 손에 거칠게 이끌려서 해질녘의 언덕 위로 올라가자, 탁 트인 풍경이 보였어.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와, 닻을 접은 배들이 정박한 항구, 멀게 이어진 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펼쳐진 붉은 하늘과, 그 사이로 지고 있는 태양이 보였지.



화가는 쇼거스에게 똑똑히 잘 보라고 하더니, 언덕 벤치 앞에 서서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어.





"푸른색은 저기 주황색 하늘과 검은 하늘이 만나는 낮은 하늘에 뜬 구름의 밝은 면처럼."


"검은색은 져가는 태양의 그림자가 지며 먼저 밤이 찾아온 건물 뒤 골목의 바닥처럼."


"보라색은 푸르러보이는 구름 너머로 주황색 빛이 지나가며 보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화가가 가르킨 광경을 주의깊게 보자마자, 쇼거스는 화가가 설명하던 것을 한 순간에 이해했어.



그것들은 푸르거나, 어둡거나, 보랏빛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러나 그 누구도 이름을 붙이지 않은 색들이었지.



직접 보고 난 뒤 쇼거스가 새로 만들어낸 물감도 화가는 점도가 어떠니, 말랐을 때의 질감이 저떠니 하면서 몇 번 더 불평하긴 했지만, 색에 대해선 불평하지 않았어.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뒤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하더니 쇼거스가 만들어준 물감을 받아갔지.



이미 인적이 사라진 언덕 아래로 둘이 같이 내려가자,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는 메이드를 걱정한 저택에서 보내준 마차가 있었어. 메이드 그거 산업혁명기에 젠트리 계급이 막고용한 것 때문에 막노동 하녀노예 이미지인데 그래도 나름 제대로 된 귀족들 있는 시기까지는 하급귀족이 하던 고급노동일이었음. 막대하면 귀족사회 평판 개쓰레기됨 큰일남.



마차는 먼저 화가를 거처에 내려주고 난 뒤,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음. 화가는 도시의 낙후된 지역으로 가달라고 말했고, 범죄자나 거지들이 자주 모일 것 같은 싸구려 여관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몇 주가 더 지나고, 화가가 약속한 날에 쇼거스는 다른 하인들이 받아온 그림을 보게 되었어.






도착한 그림은 총 세 점이었는데, 결과는 놀라웠지.




하나는 고대 신화의 유명한 장면인, 생명의 여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최초의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이었어.


몽환적이고도 아름다운 여명을 배경으로, 생명의 여신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인간을 품에 안고 내려다보며, 다른 신들과 동물들이 그 모습을 주위에서 집중하여 보는 광경이 벽을 압도하는 크기로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웠지.




다른 하나도 같은 신화에서 나온 장면이었는데, 신과의 약속을 어긴 어느 인간이 지옥의 사냥개들에게 사냥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었지.


어리석은 인간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지만, 구름 위에 선 신들은 그를 냉담한 시선으로 내려다볼 뿐이었어. 그림자와 어둠을 어찌나 잘 표현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 표정을 얼마나 생생하게 그렸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정도였어.






이 두 그림과 함께 도착한 주인님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테이블과 의자의 위치를 바꿔서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에게는 창세신화를 등지고 앉고,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을 독촉할 때는 사기꾼의 죽음을 등지고 앉으면 좋을 거라는 첨언이 적혀있었어.



주인은 매우 흡족하였고, 처음에는 쇼거스를 믿지 못하였던 부인마저도 너무나 멋진 화가를 찾아내었다면서 칭찬 일색이었지. 어느 정도였냐면은, 마님이 주인님한테 원래 약속했던 보수에 더해서 추가로 돈을 지불하라고 기분좋게 부탁할 정도였어.




그리고 하인들이 가지고 온 마지막 그림은 쇼거스에게 주는 것이었지.




작은 초상화 사이즈의 그림이었지만, 그 그림은 메이드복을 입은 쇼거스가 화가의 언덕에서 고양이랑 대치하는 장면이었어. 쇼거스가 처음 화가의 언덕을 방문하던 날에, 이질적인 느낌 때문이었는지 이 언덕에 살던 고양이 한 마리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서 쇼거스가 당황하던 순간이 있었지. 이 그림은 그 순간을 언덕 위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내었어.




이건 오래 고생시켰던 쇼거스에게 주는 서비스라면서, 주인님과 마님 모르게 하인을 통해 받은 그림을 본 쇼거스는 감동하였어.


그것이 자신을 향한 선물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이 화가가 만들어내고 그려낸 이 단 한 순간에서마저, 쇼거스는 살아숨쉬는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한듯한 기운을 느꼈거든.


마치 정지된 시간의 공간을 이 작은 캔버스 안에 옮겨둔 것만 같았지. 거기다 그 위대한 예술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니, 이래서 그 부인들이 자신만을 위한 초상화에 그렇게 껌뻑 죽었구나 이해가 됐지.






이후에도 쇼거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화가를 찾아가곤 했어.



화가는 그림을 그려준 이후에도 언제나 그렇듯 화가의 언덕에서 죽치고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있었지만, 과거와는 다르게 쇼거스가 찾아와 화가에게 말을 걸곤 했지.


그리고 쇼거스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화가는 가끔씩 색이 없는 스케치화를 대충 그려서는 쇼거스에게 주곤 했어. 보통 그건 말할 때 웃거나, 집중하거나, 화가가 잠깐 말 걸지 말라고 해서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리거나 하는, 쇼거스의 모습이었지.



쇼거스는 요즘 유행하는 연애소설처럼 그 화가가 자신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망상해보곤 했어, 그는 멋진 화실을 가지고, 자신은 그 옆에서 물감을 만들고,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멋진 그림을 함께 파는, 주인과 메이드라기엔 애매한 관계였지만 그렇게 함께 산다면 어떨지를 일하면서 상상하곤 했지.



어느 극작가가 말했지.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버리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고 말이야.




쇼거스는 망상을 거듭하던 끝에 화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주인님의 응접실에 걸린 그림이 손님들 사이에서 소문을 타며, 화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생겨났어.


화가는 안 그래도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진득하게 작업하는데다, 미리 그려둔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주문이 폭주하자 거의 매일을 바쁘게 그림을 그렸어. 쇼거스가 화가의 언덕이 아니라 여관방에 있는 그의 하숙집으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 정도였지.


재료비랑 의뢰비가 두둑해서 돈도 더 이상은 부족하지 않은데다, 이름이 알려지며 염료상인조차 굽신거리게 되었음에도, 화가는 자신이 쓰던 낡은 붓과 다리가 부러진 이젤, 그리고 퀴퀴한 하숙방을 고집하였어.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염료상인에게서도 원하는 색이 없고, 다양한 염료를 섞어봐도 원하는 색이나 질감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화가는 쇼거스에게 물감을 부탁하곤 했어.


쇼거스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가도, 그런 부탁을 받으면 흔쾌히 화가의 주문대로의 물감을 만들어줬지.



그런데 쇼거스가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는 쇼거스에게 별 말이 없었어.


쇼거스가 은근히 자신의 유능함 같은 걸 언급하며 메이드로써 어필해도 '그거 대단하군.' 한 마디하고 끝이라거나.


이렇게 맞춤형으로 물감 제작해주는 유능한 아내면 완전 화가의 드림와이프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들이밀었더니, 노발대발하며 '화가는 조개랑 산호 쪼갠 걸 기름이랑 물에 섞어서 천이나 종이에 발라놓고는 그게 음식이 되길 기대하는 미친놈들이고, 작가는 실제 있지도 않은 어설픈 망상과 거짓말로 돈을 버는 기본적으로 사기꾼 같은 족속이다! 심지어 자기가 한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는 면에서 정신병자들이지!' 하면서 호통을 쳐서 쇼거스가 겁에 질리기도 했었어.



몸을 들이밀어 유혹하는 건 화가가 워낙 매번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에, 쇼거스가 손 하나 대기에도 어려운 기운을 풍겨서 그럴 수 없었지. 말 거는 것조차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시도해서 가능했던 거야.


쇼거스의 종특으로 불리는 물건 바꿔치기? 이 미친 화가놈은 빵 사러 나갈 때도 자기 붓이랑 이젤을 들고 다녔어. 캔버스는 아무리 그래도 놓고 다녔다지만.


집을 미리 바꿔버리기? 여기 하숙집이야…… 나중에 화가가 방 빼면 감당 안 돼.



거기다 나중에는 물감은 고마운데 말 거는 것 때문에 작업을 못 하겠어서 부탁인데 나가줄 수 있냐면서 떠밀리기까지 해서 화가가 쇼거스랑 만나는 건 진짜 몇 달에나 한 번, 화가가 마침 어디 갔다 오는 길에 쇼거스가 미리 하숙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 정도였어. 이쯤되면 거의 그냥 물감셔틀이었지.




쇼거스는 저택 내 숙소에서 화가가 자신을 그려준 그림들을 펼쳐두고는, 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지 발을 동동 부르면서 분해했어.



뭔가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야하나? 그런데 갑자기 내가 다르게 꾸민 거 가지고 오히려 어색해하거나 기분나빠하면 어쩌지?


쇼거스는 고민이 많아졌지. 내가 부족한가? 만약에 부족한 게 없다면, 왜 나한테 고백을 안 하지?



그러다가 문득, 쇼거스는 반년이 넘은 짝사랑 끝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





화가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건 자신의 망상이었단 걸 말이야.




가끔 사랑에 눈이 멀면 일어나는 일인데, 망상을 사실로 착각해버리곤 하지. 쇼거스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은 화가가 자길 좋아해서 자기도 '아 화가 정도면 나도 좋지' 하면서 좋아하게 된 거였는데, 실제는 그냥 쇼거스의 망상에서 시작된 짝사랑일지도 몰랐던 거야.


쇼거스는 자신이 화가를 짝사랑한다는 걸 의식하자 너무나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어. 상대가 먼저 관심있어서 응해준 거랑, 내가 먼저 좋아하는 건 자존심에 있어서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쇼거스가 그러는 동안에도, 겨울은 다가왔지.



아무리 도시에 살아도 겨울을 앞두고는 할 일이 많아졌어.


빨래를 널면 얼어버리니까 미리미리 빨래할 것들을 모아서 왕창 널어야했고, 저택에서 쓸 장작과, 주인님 일가와 하인들이 먹을 음식들도 미리 창고 가득 채워두고, 여름용 옷들 중 안 입는 건 겨울 사이에 삭지 않게 손질하고, 옷장 속 깊이 잠들어있던 겨울용 옷들은 미리 꺼내놔야했지.


언 땅이나 눈이 쌓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마차도 수리가 한참이었고, 말들이 사는 마굿간에도 평소에는 안 쓰던 보온용 덮개와 가림막을 치고, 건초까지 수북히 쌓아놓느라 할 일이 엄청 많았어.





당연하지만 쇼거스도 정신없이 일해야 했지.


손을 열 개로 늘릴 수는 있어도 여러 명으로 분열은 못 한다는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할 일이 너무 많았어.


거기다 쇼거스가 다재다능한 걸 아는 사람들이 툭하면 쇼거스에게 이거 해달라, 저걸로 변해달라 부탁하는 통에 일은 몇 배로 더 힘들게 느껴졌지. 심지어는 바퀴 치수가 주문한 게 맞나 보게 이 바퀴랑 똑같은 사이즈로 변해서 바퀴집까지 다녀오라는 심부름까지 있었다니까.




거기다 하필 평소엔 쇼거스랑 은근히 다투면서도 메이드장으로 할 일은 다 하던 키키모라가 도련님의 아이를 임신해버린 탓에 메이드들마저 '쇼거스 메이드장 대리님~'을 시도때도 없이 찾았으니, 쇼거스로써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쇼거스가 유달리 바빴던 겨울준비를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자 겨울이 한창일 때가 되었지 뭐야.




정신을 차린 쇼거스는 창을 닦고 있다가 갑자기 창밖에 눈이 내리자 벌써 눈이 내린다며 빨리 빨래 걷어야한다고 알리러 갔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쇼거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며 기겁했지.




사람들 말로는 겨울준비가 거의 끝난 어느 날, 쇼거스한테 잠시 쉬라고 휴게실에 눕혔더니 갑자기 눈을 감은 채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 와중에도 청소나 세탁 같은 평소하던 일은 잘 했는데,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그런데 뭐 해달라 하면 또 그건 다 해내니까 저택사람들도 걱정했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못했었어.


쇼거스도 자신이 그렇게 돌아다녔다는 지난 1개월간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였지.




그러거나 말거나, 쇼거스는 가벼워진 기분으로 휴가를 받아서 신나게 도시로 내려갔어. 몸은 날개를 만들면 바로 날아갈듯했고, 머리는 너무나 맑았지.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자 사랑고민에 대한 답도 바로 떠올랐고.






'내가 먼저 좋아하면 좀 어때? 그럼 내가 고백하면 되지!'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차이면 강제로 덮쳐버릴 작정으로, 그러면서도 내심 화가가 거절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 쇼거스는 화가의 집으로 향했어.




그런데, 화가가 사는 하숙방에는 아무도 없었어.




겨울이라 어디 나갈만한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거기다가, 화가가 매일같이 써대서 마를 틈이 없던 넓은 팔레트 판자 위 물감은 가루가 될 정도로 말라붙어있었고, 늘 물이 찰랑이던 물감을 씻는 물통도 바싹 말라있었지. 집을 오래 비워둔 느낌이었어.



쇼거스는 하숙집 주인에게 가서 물어보았지만, 하숙집 주인도 집세를 냈으니 방은 안 뺐는데 화가가 몇 주째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고 하였어.



쇼거스에게 불안감이 엄습했어.



쇼거스는 도시를 뛰어다녔어. 화가의 언덕에서 아무 화가나 무작정 잡고 화가를 보았는지 물어보고, 화가가 자주 가던 빵집에서 화가의 모습을 설명하고, 염료상인에게 찾아가 화가가 어디 있냐고, 혹시 네가 숨겼냐면서 탈탈 털어버리기까지 했지.



하지만, 화가는 없었어.





다들 화가를 본 적이 없다고 했어. 한 번 작업에 몰두하면 몇 주치 먹을 걸 사들고 들어가서 죽치고 그림만 그리기도 하니까, 다들 화가가 그러고 있을 거라 짐작하고만 있었지.




쇼거스는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진 화가의 흔적을 찾아서 도시의 모든 골목과 거리, 상점을 돌아다녔어. 화가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화가를 찾는 쇼거스의 소문만 퍼져서 사람들이 쇼거스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미안한데 모른다고 대답하기까지 했어.



쇼거스는 화가가 석양을 보여주었던 언덕의 정상에 앉아, 바다가 얼기 전 마지막으로 입항하는 배들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혹시 해외로 나간 건 아닐까? 뭔가 멋진 걸 보고 오겠다고, 이름없는 색을 찾아보겠다고 여행을 떠난 건 아닐까?'



쇼거스는 그림만 관련되면 괴짜 같아지던 그가 어디로 갔을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언덕에서 내려왔어.



눈이 살짝 녹은 길거리는 바다가 얼기 전에 배로만 수송되는 상품들을 사고, 옮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렸지. 부인들은 좋은 모피를 어디서 구했냐며 담소를 나누었고, 겨울 휴업 전 마지막 장사를 앞둔 식료품점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어.






그런 거리를 지나다가, 쇼거스의 눈에 문득 밟히는 것이 있었어.



처음에 쇼거스는 화가를 너무 찾아헤맨 나머지 자신이 드디어 미쳤나보다 싶었지,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얼굴의 두 눈을 손으로 비비고, 몸에서 돋아난 눈을 촉수로 비비고 다시 봐도 그건 자기가 본 것이 맞았어.




그 순간 쇼거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지.










저 멀리, 항구 노동자들이 몸을 녹이려 피운 불 사이에서, 부러진 것을 판자로 덧대 고정한 이젤의 다리가 보였어.




쇼거스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어.






길을 지나던 남자가 어깨를 부딪치며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집 앞 계단에 모여있던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아도,




대로를 지나던 마차와 부딪치려는 순간에, 온몸을 변형해 진흙탕에 뒹굴면서까지 말발굽과 마차의 바퀴를 피해가며,




막 들어온 생선이 진열된 가판대와 부딪치고,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치여서 해외에서 들어온 모피 가판대 위에 엎어졌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서,





안 된다고, 태우지 말라고 멀리서 소리치고 울부짖으면서.




놀라서 쳐다보는 덩치 큰 뱃사람들을 밀쳐내고.









쇼거스는 불타는 불쏘시개 더미 아래에서 화가의 이젤을 뽑아내었어.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이 불탄 이젤은 쇼거스가 뽑아내는 순간 위쪽은 가루가 되며 무너져버렸고, 무너지지 않는 곳도 새까맣게 타들어가있었어. 머리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니, 다리들은 제멋대로 장작처럼 바닥을 뒹굴었지.




딱 하나, 아무 손상없이 멀쩡한 곳은 튀어나와있던 다리 하나 뿐이었어. 쇼거스는 그것밖에 알아볼 수 없었어.






뒤늦게 가판대의 상인들이 진흙 투성이로 상품을 더럽힌 쇼거스에게 책임지라며 소리를 빽빽 지르고, 선원들이 모닥불의 주춧돌을 빼서 무너트린 쇼거스에게 미쳤냐며 따질 때조차, 쇼거스는 다리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젤 앞에서 망연자실해서 일어설 수 없었어.






화가는 이젤을 빵집에 갈 때조차 들고 다니던 사람이야. 그 이젤이 여기서 불타고 있다는 건…….





"이봐! 내 모피 어떻게 할 거냐니까!"




황금빛으로 요란하게 빛나는 피부를 가진 크리핑 코인 하나가 쇼거스의 어깨를 잡은 순간, 쇼거스의 어깨가 물텅하고 무너졌어.




"어, 어어?"




크리핑 코인이 당황하며 주춤하자, 쇼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크리핑 코인을 바라보았지.




"힉-!"




그건, 그것은, 심연 그 자체였어. 녹아내린 혼돈의 기원이자 가슴 속 가장 깊은 어둠의 공포를 자극하는, 혼돈의 마물이 바닥에 낮게 깔려있던 그 부정형의 몸을 천천히 부풀렸어.




"죄, 죄송해요! 사실 싸구려라 괜찮아요오!!"




크리핑 코인은 뒷걸음질치다 내달려서 도망쳤고, 그 다음에 쇼거스의 눈이 향한 건 선원들이었지.




"뭐, 뭐야?"




선원들도 두려움에 떤 것은 마찬가지였어. 눈앞에 있는 그것은 분명 메이드였고, 쇼거스였지. 하지만 그것은 인간과 어둠 그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으며, 한 때 인간이 가졌던,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촉발되었어.



" , 요?"


더 이상 사람이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선원들은 주춤했지만, 그 뜻이 '이 이젤을 어디서 찾았냐'는 뜻인 것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어. 들어서 이해하지 않았으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경험은 선원들이 눈앞의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지.




"우리도 몰라! 이 녀석이 가져온 거야!"

"뭐?! 그걸 왜 나한테 떠넘겨?"

"우리가 왔을 때는 이미 불 붙인 뒤였잖아! 그러니 가지고 온 것도 너겠지!"



뻐드렁니가 있는 선원이 지목되자, 쇼거스의 고개가 기묘한 움직임으로 돌아가며 그 선원을 바라보았지.


쇼거스와 눈을 마주한 선원은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이까지 덜덜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어.




"가, 강가의 쓰레기장에 있던 걸 주워온 거야! 난 정말 그것 뿐이야! 미안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제발 살려줘!"




강가의 쓰레기장. 그 말을 들은 쇼거스는 비정상적인 움직임으로 몸을 돌리더니, 불에 탄 이젤을 소중하게 감싸안은 채로 강가를 향해 미끄러져갔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쇼거스를 마주한 사람들은 전부 겁을 내며 물러섰고, 마차에 묶인 말들은 본능적인 공포에 날뛰었지.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심지어 평소의 쇼거스를 아는 사람이 쇼거스를 지금 마주하더라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걱정보다는 두려움이었겠지.




강가의 쓰레기장에 도착하자, 버려진 가구 같은 걸 분해해서 장작으로 만들던 일꾼들도 두려움에 슬금슬금 물러났어.


그들은 쇼거스가 이젤의 다리를 보여주며 이것을 어디서 났냐고 묻자 모른다고 대답했으나, 쇼거스가 정말로 모르냐며 다시 묻자, 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모아오는 부랑아에게 받았다며, 그 아이에게 물어보라고, 제발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지.




쇼거스는 도시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건물 사이의 뒷공간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불을 피우고 몰려있던 부랑아들에게 다가갔어. 그들은 쇼거스를 마주하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쇼거스와 눈이 마주치지 않은 몇몇은 조심스레 도망치려 하다가, 쇼거스의 어깨와 등에서 나타난 눈동자가 자신들을 바라보자 다른 아이들처럼 힘이 풀려 주저앉았지.


쇼거스가 아까 쓰레기처리장에서 들은 설명대로의 남자아이에게 이 이젤을 어디사 났냐고 묻자, 아이는 너무나 겁에 질려서 울지도 못하는 채로 숨을 히끅거리면서 화장터에서 땔감으로 쓸 쓰레기를 모아둔 곳에서 훔쳐왔다고 말했지.






화장터는 도시 외곽에 있는 대학의 시설이었어.



말이 화장이지, 실제로는 노숙자나 무연고자, 혹은 장례비용이 없는 불우한 자의 시체를 발견하면 의대에서 교육용으로 해부를 한 뒤, 모조리 모아서 태워버리는 곳이었지. 그것 때문에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의 시체를 보관해두기 위해서 내부에 존재하는 안치시설과, 쓸모없거나 사용이 끝난 시신을 한꺼번에 불태우기 위한 소각로는 매우 거대했어.



시체가 은근히 비싸기 때문에 도둑도 들기 마련이라, 화장터의 정문에서 경비를 서던 오우거는 멀리서 다가오는 쇼거스를 보고 교수의 메이드인가 생각했어. 오우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 불길한 년들한테 자기 연구자료를 믿고 맡기는 놈들이 있긴 하니까.



하지만 쇼거스가 가까워지자, 오우거는 쇼거스가 내뿜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는 즉시 초소에 세워뒀던 할버드를 쥐고 뛰쳐나왔어.



-웬놈이냐!




오우거는 머릿속에서 용맹하게 외쳤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태풍을 벨 수 있나?


산불을 죽일 수 있나?


그림자랑 싸울 수 있나?






그런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대로, 오우거의 몸은 눈앞의 상대와 싸운다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굳어버리고 말았던 거야.




입구 앞에서 할버드를 든 채로 굳어버린 오우거의 옆을 쇼거스가 지나쳐간 뒤에, 오우거는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어.




쇼거스는 안장실과 연결된 화장터로 들어갔지.





태울 시체가 너무 많아서 천장에서 지상까지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높이가 달라지는 안치대가 가득하고, 그 곳에 천조차 덮지 않은 다양한 사람의 시체가 늘어서있어서 섬뜩한 그 장소에서, 시체를 장작처럼 소각로로 밀어넣는 인부들의 앞에 쇼거스가 나타났어.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각로의 소리에 처음에는 인기척을 못 느끼던 그들은, 어쩐지 공기가 변한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지. 쇼거스의 모습은 그들이 자주 꾸는 소각로와 관련된 악몽이 동화책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고 불길했어.




"무 많, ."

?



" ."

?




"여기, 이 주인 있나요?"

거야?




이런 곳에서 일하다보면 며칠 차이로 가끔 태워버린 시체의 가족들이 뒤늦게 찾아올 때도 있었는데, 인부들이나 직원들은 그러면 못본척 잡아떼라고 교육받았어.


이미 태워서 강에다 버린 걸 되돌릴 수도 없고, 나쁘게 말하면 진짜 그 시체 주인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보상금 얘기 같은 거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하지만,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 아닌, 영혼의 밑자락에서 직접 전해지는 듯한 말조차 아닌데 전해지는 물음은 그런 사소한 것따위 잊어버리게 만들었지.



벌벌 떨면서 주저앉은 인부 중 한 명이 힘겹게 말했어.




"그, 그거, 그림 쓸 때 쓰는 그거……."




" 요?"




"며, 며칠 전에 아-안치소에서 일할 때! 새로 들어온 시체가 가지고 있었어요!"



쇼거스가 직접 쳐다보자, 인부는 자신의 눈을 두 손으로 가린채 벌벌 떨며 말했어



"기, 길가에서 기침을 하다 쓰러져 죽었다는 남자였는데…… 이름이고 뭐고 신원을 알아볼만한 것도 없는데다, 따-딱 봐도, 노숙자였던데다, 진짜로 가지고 있는게 다 낡은 거라 노숙자 같았어요! 아는 사람이었으면 미, 미안해요…… 하, 하지만 진짜 나는 아무 것도 몰랐어요!"



"는데?"

어.



쇼거스의 추궁하는 듯한 물음은 마치 그 자리에 선 모든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어. 지금 느껴지는 것이라곤 공포뿐이었는데, 아득한 그 공포에 심장조차 빠르게 뛰는 것을 잊고 덜덜 떠는 것만 같았지.




"하, 한참 전에 화장했어요……. 재, 재도 뿌려서 이미 늦었어요……."




거의 울 지경으로 덜덜 떨면서 비는 인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쇼거스가 정지했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건 아까와 똑같았지만, 그것이 정지된 상태라는 건 그 공간 안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어.


사람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과 같이, 부정형의 생물체가 정지했어.




진짜로?

그사람이?




고작?

그런 이유로?




두려움에 시선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인부들이 무언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에 하나 둘 눈을 뜨고 쇼거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저 수십, 수 백에 달하는 시체들이 책장처럼 줄비한 평소대로의 화장터였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쇼거스는 비틀거리며 화장터에서 걸어나왔어. 아까 마주했던 오우거는 할버드를 놔두고 도망쳤는지 흔적도 없었지.


쇼거스의 몸이 오우거가 버려둔 할버드의 위를 지나자, 몸이 겹친 곳만큼 할버드의 일부가 소실되었어.



쇼거스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 화가의 언덕 위에서 태양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지.



밤이 되자 먼 바다에서부터 수면이 얼어붙고, 회색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모든 걸 하얗게 덮어갔어.




눈의 하얀색과 밤하늘의 하얀색, 바다의 하얀색과 지붕의 하얀색은 어떻게 다른 걸까?


쇼거스는 그 차이를 느꼈지만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어. 그것을 설명하라면 쇼거스는 분명 하얀색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겠지.



깊은 밤이 되어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지자, 쇼거스는 화가의 집으로 향했어.



몸 위에 눈이 잔뜩 쌓인데다, 딱 봐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쇼거스의 모습에 일어난 집주인은 떨면서도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쇼거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화가의 하숙방으로 들어갔지.



그곳에는 자르다 만 캔버스가, 만들다 만 액자가, 그리다 만 그림이 가득했어.



공원에서 알몸으로 밀담을 나누는 연인의 그림이 있었고, 서재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어느 귀족이 있었고, 은행건물 앞에서 양산을 든 모습이 자연스러운 구도로 그려진 귀부인이 있었지. 그런 것들 말고도 천에 덮혀있는 그림들이나, 간단한 종이에 미리 스케치를 해둔 것까지 합치면 수십 점이 넘는 그림들이 화가의 방 안에 널부러져 있었어.




쇼거스는 그 중에서 딱 하나, 화가가 마지막까지 그리고 있었는지 의자 위에 둔 채 천을 덮어둔 그림을 향해 손을 뻗다가, 망설였어.



평소에 쇼거스가 그림을 만져보려고 하면, 창작자인 자기 외에 처음으로 그림을 만지는 건 반드시 그림을 시킨 주인이어야 한다고, 너는 자기가 시킨 음식이 다른 손님 입에 들어갔다 나오면 좋겠냐면서 화가가 괴팍한 고집을 부렸기에, 자신도 모르게 생긴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던 거지.



하지만 이제 쇼거스에게 호통을 칠 화가는 없었어.



쇼거스가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캔버스를 집어들고, 의자에 앉으며 천을 벗겨냈어.



샤륵거리며 천이 떨어지자, 쇼거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지.







너무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이런 하숙방의 빈 벽에나 걸면 적당히 어올릴 것 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진 건……




쇼거스였어.






이 그림은 메이드복을 입은 쇼거스가 보라색 벽 앞에서 비스듬히 서서, 그림을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구도였어.


단어로써 보라색 기반의 쇼거스가 보라색을 배경으로 하고 서있다고 설명하면 단조로운 색감처럼 느껴졌지만, 미묘하게 다른 질감과 톤이 느껴지는 초상화에서는 역동적인 질감과 쇼거스를 향한 집중이 느껴졌지. 마치, 무대 위에 선 사람에게 비추는 조명이 그림 속에서도 쇼거스를 비추는 것 같았어.


어딘가 장난스러우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짓고, 메이드복처럼 보이나 자신의 신체인 말단에서는 노란빛 눈동자와 빗자루를 쥔 촉수가 뻗어나온, 쇼거스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었지.




놀란 가슴으로 그림을 천천히 보던 쇼거스는 너무나 작게 그려져서 놓치기 쉽지만, 정성을 들여서 세심하게 그려진 작은 사물을 발견했어.





-아…….




반쯤 부정형으로 녹아내렸던 쇼거스는 그 그림에 그려진 것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인간의 목소리로 탄식했어.




"아아……."




하지만 그 얼굴은 곧 울음을 참기 위해 일그러지고, 탄식은 신음이 되고




"아아아아아……!"




마침내, 쇼거스는 그림을 부여잡으며 울었어.






화가가 그려낸 쇼거스의 그림 속, 장난스레 웃어보이는 쇼거스의 손가락에는 은빛 반지가 끼워져있었어.





그랬던 거야.


왜 평소에 나를 그렇게 집요하게 그리나 했었는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뭘 자꾸 습작이라면서 날 그리나 했는데.


나 혼자 좋아하는줄 알았는데, 내가 고백하려고 했는데.





쇼거스의 눈에서는 보랏빛 눈물이 쏟아졌어. 그림에 그려진 벽지보다는 진했고, 그림 속 쇼거스보다는 연한, 보랏빛 눈물이 그림을 타고 흘렀어.



쇼거스는 그림을 끌어안은채 바닥에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목놓아 울었어.





만약에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강을 흡수한다면


강과 연결된 모든 바다를 흡수한다면


그렇게 내가 모든 것을 보랏빛으로 물들인다면


수많은 재 사이에서 당신을 모을 수 있을까?


당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당신을 살려낸다면,




당신은 '이거고 저거고 다 똑같은 보라색으로 만들어? 이제 뭘 보고 그리라고!' 라면서 나를 혼낼까?


아니면 '이건 또 새로운 보라색이군. 저기 구름이랑 하늘 경계색으로 물감 좀 만들어봐.' 라고 입맛을 다실까?


아니면, 아니면…….




나한테 '사랑해' 라고 말해줄까?

















19세기 미술사에 특이한 이야기가 있어.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알지만 생전에는 무명이었던 화가.


쟝-엑토르 아세트의 일화지.




그의 유년기나 청년기가 어땠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았지만, 가난한 화가였던 아세트는 말년에 그 특유의 생생한 색감과 섬세한 형태를 가진 그림으로 유명해졌어.


하지만 그 전성기가 막 시작되려던 찰나, 한겨울에 누군가를 기다리듯 매번 거리에 앉아있다가 폐렴에 걸려서 죽어버렸다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법한 초상화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내용이 사실상 그에 대해서 알려진 이야기의 전부야.



여기까지면 그냥 불운했던 예술가의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정말 신기한 건 다음부터야.




아세트가 죽은 뒤, 갑자기 그가 그렸던 그림들의 색이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거야.



장엄한 여명의 창세는 색을 바꿔 석양이 되었고, 깊은 새벽의 칠흑같은 어둠은 해가 떠오는 새벽 같이 변했지.


이 기묘한 현상이 불길하게 여겨져서 그렇게 변한 그림 중 많은 수가 소실되어버렸지. 특히나 심하게 색이 변한 그림 중에서는 더 이상 지구의 풍경 같지도 않은, 보랏빛으로 그려진 세상이 보는 사람에게 불길함을 전달하는 그림들도 있었어. 이런 그림 중 현대까지 잘 보존된 것들은 초현실주의적인 매력이 있다고 높은 평가를 받고도 있지.



아세트의 그림 중 최고가로 거래된 그림은 역시 '석양의 창조'였지. 원래는 여명의 창조였으나, 절묘하게 색이 바뀌며 석양처럼 변한 그 그림은 크기도 엄청나게 크고, 그 시대의 작품 중 석양을 배경으로 창세신화를 그린 작품은 그게 유일했거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해서 현재는 아세트가 태어난 나라의 미술사 박물관의 대표전시품이야.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비싸다고 알려진 그림도 있어.



소재나 주제가 특이한 건 아닌데, 이 그림이 유명한 건 그 화가의 후기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색이 변하지 않아서였어.


여러 수집가들이 제발 팔아달라고 엄청난 돈을 제시했었는데도 주인이 안 팔아서 최고가로 거래된 건 아니지만, 그 가치는 가히 최고라고 쳐지는 그림이었지. 심지어 비공개라서 어떤 그림인지도 알려져있지 않아.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게 보라색 배경에 보라색 메이드가 그려진……




















요즘 입시를 준비하는 장붕이는 부모님의 등쌀에 죽을 맛이었다.


자기가 그리려는 그림이랑 다르다고 말하는데도, 자기들도 이해 못하는게 눈에 보이면서도, 자꾸만 '좋은 작품을 봐야 좋은 걸 그린다'면서 억지로 여러 미술관, 특히나 장붕이가 관심도 없는 현대미술 전시장에 끌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미술이 전부 싫은 건 아니다.


방부제 처리해서 커다란 수조 안에 박제된 거대상어, 초록색 네온사인으로 RED라고 써둔 개념미술, 난잡한 페인트칠처럼 보이는데 어느 장소에 서면 그게 딱 합쳐지면서 그림으로 보이는 설치미술, 장붕이가 봐도 절로 '오' 소리를 할 만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장붕이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딱히 관계가 있진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미술 회화로 가면 점입가경이었다.


얀디 몬티홀로 대표되는 팝아트 시대 이후로 장붕이가 보기에 현대미술 회화는…… 진짜 인터넷에 떠도는 말대로 탈세수단인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뭐?! 이게 그 가격이라고?!' 싶은 게 많았다. 한 수천만원까지는 그렇다고 치겠는데, 50억짜리 그림이 프린트로 뽑아낸 몬카콜라 캔이라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정상이었다.


거기다 설치미술이라고 다 정상도 아닌게, 별모양 비키니를 입은 커다란 가슴 조형물에다 대고 물대포를 쏘게 만들어둔 것에 대체 무슨 예술성이 있다는 건지 장붕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붕아. 우리 미술관 오니까 너무 좋다. 그치?"



하지만 오늘도 장붕이는 부모님과 함께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 점심 즈음,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눈을 떴고, 게으른 사람들은 눈을 슬슬 뜰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장붕이네 가족이 탄 승용차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는 교각의 위를 달리고 있었다.




"와 너 무 좋 아 신 나 요."


장붕이는 뒷좌석에서 영혼없이 답하고는,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봤다.


장붕이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력이 뛰어났는데, 특히나 색감을 보는 능력이 뛰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아니 소방차 빨간색 말고 딸기 빨간색! 딸기 빨간색 차 탈 거야!!' 같이 어른들이 이해 못할 투정으로 부모님, 친척, 보육원 선생님까지도 당황시켰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오목조목 따지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어른들도 있었다.




이게 얼마나 능력이 뛰어났냐면, 처음에는 장붕이의 눈에 이상이 있는 줄 알고 찾아간 국내 최고의 색각이상 전문가인 리치 교수님이 진행한 일반 검사는 전부 통과했고, 아예 장붕이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려고 따로 검사를 개발해왔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장붕이가 검사를 통과 못해서 장붕이가 그냥 남들보다 조금 인지능력이 좋을 뿐이라고 결론지었지만,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프린트기가 검사문항을 제대로 인지 못해서 같은 색으로 출력해서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였다.




결국 나중에 제대로 재검사를 했고, 그걸로 색감천재라며 방송도 탔다는데, 너무 어릴적이라 장붕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우쫄해질 법도 하지만, 장붕이는 자기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칭찬을 받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눈이 좋다고 칭찬을 받는 건 고맙기는 하지만 기쁘지는 않은, 성취감이 없는 느낌이었다.



'왜 다들 이걸 못 볼까?'



그보다 장붕이가 가장 자주하는 생각은 답답함이었다.


장붕이 눈에는 멀쩡히 보이는 차이를 남들이 이해 못하는 상황은 어릴 때부터 숱하게 겪어왔고, 장붕이가 머릿속에 떠오른 색을 설명해보려 해도 그 색을 칭하는 용어가 딱히 없어서 매번 비유를 해서 설명해야하는 것도 피곤했다. 거기다 그렇게 설명해준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다.




잘못하면 나르시스트나 관심종자로 컸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일상에서의 답답함이 장붕이를 자기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게 키워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붕아 다 왔다~ 일어나야지."


"나 안 잤어!"




아무튼, 오늘도 장붕이는 미술관에 도착했다.



국립예술관,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3개층 규모의 상설전시관에다가 2개층 규모의 기획전시관이 딸려있는 초거대 미술관이었다.


장붕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이 미술관에 자주 오곤 했다. 그 탓에 상설전시관의 전시품은 거의 다 외울 지경이었고, 보통 장붕이가 이곳에 온다고 하면 기획전시를 보러 오는 경우였다.




야외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술관으로 걸어가면서 장붕이는 과거에 보았던 전시들을 떠올렸다.



'몬무스의 전통문화전'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다양한 종족의 몬무스 모델들이 다양한 의상을 입고 나타났는데, 문제는 그게 신체구조까지 같이 보여준다면서 반쪽은 알몸, 반쪽만 전통복장을 입은 민망한 전시회였다. 어린아이였던 장붕이가 가족이 아닌 사람의 알몸을 본 것도 그 날이 처음이라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났다.


그 외에는 해외의 인어 사진작가가 연 '심해의 사진전'이 있었는데, 특수제작한 수중용 필름카메라로 담아낸 바다 아래의 다양한 풍경과 색감은 장붕이가 그림이 아닌 예술 중에서는 최고로 치는 전시회였다.



미술관 밖에 걸려있는 오늘의 메인 기획전시는 '해외의 명작전', 미술관이 몇 달에 한 번씩 인물을 바꿔가며 개최하는 정기적인 기획전시였다.



이건 장붕이도 꽤 좋아했는데, 현대미술보다는 보통 고전적인 과거의 화풍을 가진 작가를 위주로 작품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섬세한 붓터치의 기법 차이나, 물감의 질감, 미묘하게 다른 색감의 차이 같은 것을 자세하게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이번 해외의 명작전의 주제는, 바로 쟝-엑토르 아세트였다.



막 뜰려던 찰나에 폐렴에 걸려 죽은 걸로 유명한 화가인데, 자화상 하나 남아있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 살아있을 때 친구도 없어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자세히는 알 수 없다는 미스테리한 화가인데, 그가 그린 초창기 그림들은 감각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색채로 유명했고, 후기 그림은 그가 죽은 뒤에 기묘하게 색을 바꾼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소문으로는 피를 물감에 섞어서 나중에 색이 변한 거라는 설이 있었지만, 검사결과 그건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튼 '감각적이면서도 극사실적인 색채'가 주로 장붕이가 기대되는 부분이었다. 장붕이는 기분좋게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아빠랑 먼저 다음 전시관으로 갈게. 천천히 보고 와~."


"아니다, 장붕아. 보기 싫으면 빨리 보고 나와도 돼. 나오고 나서는 엄마랑 아빠한테 전화 꼭 하고……."


"빨리 가요 여보~."



왠지 모르게 들뜬 느낌으로 부모님이 다른 기획전시인 '성의 해방과 자유전'을 향해서 간 뒤, 장붕이는 차분하게 아세트의 그림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시간대 순서대로 이어지게 의도된 기획전은 아세트의 일생(이래봤자 알려진 게 없다는게 거의 주된 내용이지만)에 대해서 한 번 소개한 뒤, 그가 무명이었던 시절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후기 그림으로 나아갔다.


전시된 그림 중에서는 장붕이가 보기만 해도 제목을 알 법한 그림도 있었던 반면, 처음 보는 생소한 그림이나 노트 같은데서 뜯어낸듯한 연필스케치들도 있었다.




"아……."



그리고 장붕이는 그가 채색한 첫 그림을 본 순간부터 깨달았다.


자신같이 색을 보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그가 그린 그림이 일반인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장붕이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다. 이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을 표현하려 한 사실주의 기법의 정점에 다른 작품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곤 하지만, 질감이란 색의 일종이다. 유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면 불투명해지고, 매끄러우면 투명해지듯이, 비슷해보이는 색이더라도 다른 재질이나 두께, 형태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비내리는 항구'라는 그림에서 회색 구름의 회색을 여섯 가지 색으로 역동적으로 표현하려 한 점이나, 비오는 거리, 창문을 등진 여인의 등 뒤 창문에 반사된 풍경에 비치는 풍경의 색은 단순히 원래 사물의 색을 전체적으로 톤다운한 것이 아닌, 유리에 더 잘 반사되는 색은 살짝 더 선명하게, 잘 반사되지 않는 색은 흐리게 표현하는 디테일까지도 장붕이는 숨쉬듯 캐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작품을 차지한 연습장 스케치들은 채색이 안 되어있으니 색감을 느낄 일은 없었지만, 기획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연습장의 스케치를 따라서 걷다보면 완벽하게 전시된 완성작이 딱 나타나는 기획전의 연출은 장붕이가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세트가 직접 옆에서 그림을 기획하고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래 살아서 작품을 뽑아냈어야 하는 건데…….'



젊은 나이에 단명했다는 그 역사를 떠올리면 얼굴도 모르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장붕이는 이 날의 기획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장붕이는 매료된듯 전시관을 세 번이나 돌고는, 맨 마지막의 '아세트처럼 칠해요! 아동용 색칠놀이 체험코스' 앞 의자에 앉아서 여운을 즐겼다.



아쉽게도 그 유명한 색을 바꿨다던 후기 그림들은 없었지만, 그런 후기 그림 중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을 정도라니 여기 없어도 어쩔 수는 없었다. 그 정도 그림이면 보기 위해서 직접 해외로 가야하는 물건이었다.



전시를 다 돌면 연락하라던 아빠의 당부가 생각났지만, 엄마나 아빠야 뭐 전시관 다 돌고 나오면 알아서들 올 거고, 장붕이는 벌써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장붕이는 지금 떠오른 영감을 스케치해서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만땅이었다.



장붕이는 늘 메고 다니던 슬링백에서 작은 화판과 연습장을 꺼내고, 오래 써서 길이가 제각각으로 변해버리거나, 같은 색이어도 다른 브랜드의 것까지 섞여있는 색연필통을 꺼내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지금 그릴 것은 방금 본 작품의 영감과, 오면서 보았던 철교 위에서 바라본 강의 풍경화였다.



멀리 보이는 도시, 푸른 하늘, 보는 각도가 달라지며 그 색을 달리하는 강의 깊은 색과, 푸른 하늘이나 철교를 반사하며 다른 빛으로 일렁거리는 물결,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과 강에 반사된 다양한 빛을 받으며, 처음 보는 검붉은색으로 우뚝 선 철교를 장붕이가 열심히 색으로 칠하였다.




스케치 없이 바로 색부터 깔면서 형태를 잡는 방식은 장붕이가 색연필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선호하던 방식이었다. 장붕이에게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색이 곧 형태이자 질감이었기에, 둘은 큰 차이가 없었다.


이 버릇이 입시미술에서는 안 좋을 수 있다고 해서 학원에서 스케치도 배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장붕이는 미대 같은 곳에 큰 미련이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처럼 크로키를 배우고 있었다.



"어머, 너도 색칠놀이 하니?"



그림에 열중하고 있던 장붕이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장붕이가 화판에 쳐박고 있던 시선을 올리자, 뭔가 정장을 입고 있긴 한데, 실제 정장은 아닌듯한 질감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눈앞에 서있는 건 미술관 관계자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쇼거스였다. 메이드복으로 주로 알려진 외형과 다르게 정장으로 외형을 의태한 모습은 어엿한 직장인 느낌이었다.



장붕이는 기분이 팍 상해서 대꾸했다.



"저한테 색칠은 놀이가 아닌데요."



장붕이가 엄청 어렸을 때, 장붕이가 이 색이랑 이 색이 어떻게 같냐고, 아무리 봐도 확연히 다른 보라색 크레파스 때문에 다른 크레파스 세트를 사달라고 했을 때도 부모님은 '장붕아. 색칠놀이할 때는 그냥 아무 색으로 칠해도 돼.'라면서 얼버무린 이후로, 장붕이는 색칠놀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심지어는 그 말을 일반인도 아니라 미술관 직원이 하다니! 장붕이는 분명 이 쇼거스가 미술에 대한 존중따윈 없이 대충 아동코너 관리나 맡은 알바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붕이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쇼거스는 장붕이의 날이 선 대답이 귀엽다는듯이 웃더니, 장붕이에게 눈높이를 맞춰주며 말했다.



"불편하게 거기 앉아서 그리지 말고, 책상 쓸래? 애기들 책상 말고 네가 앉을 수 있는 책상도 있어."



쇼거스가 가르킨 쪽에는 직원들이 앞에 앉아서 쉬거나 하는 용도인지 과자랑 물, 그리고 팸플릿이 놓인 책상이 있었다.



어디 으슥한 곳도 아니고, 딱 봐도 책상에 앉아서 그리는게 더 편하겠다 생각한 장붕이는 쇼거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붕이는 화판을 내려놓으며 사무용 의자에 앉고, 비슷한 색의 색연필이 비정상적으로 꽉꽉 들어찬 색연필통을 옆에 펼쳐둔 채, 화판 위의 그림을 차근차근 완성시켜갔다. 비록 지금 하는 건 단순한 메모 같은 것이고, 나중에 커다란 종이를 써서 제대로 그릴 예정이긴 했지만, 대충 그림을 그리기는 싫었던 장붕이는 집중하여 연습장 속의 풍경을 칠해나갔다.



그림에 정신을 집중한 장붕이의 모습을 쇼거스는 옆에서 지켜보더니, 자신도 그 맞은편 의자에 앉고, 원래부터 그 앞에 펼쳐져있던 작은 연습장에 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붕이는 자신의 연필이 아닌 다른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쇼거스의 앞에 연습장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누나도 그림 그리세요?"


"응. 좋아하는 사람이 그렸거든."



연습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연필을 세밀하게 움직이며 한 말이 장붕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본인도 그림 그린다는 사람이 남의 그림을 색칠놀이라고 불러?'






장붕이는 평소에 현대회화를 합법적 탈세에 가까운 무언가가 개입된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실 어쩌면 그게 진짜 부자들의 취향일 수도 있고, 그걸 만드는데 정말로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그림을 보고는 색칠놀이라고 대놓고 말했던 쇼거스의 평판은 장붕이의 안에서 또 한 단계 추락했다. 미술에는 관심도 없고 대충 애들 돌보는 직원에서, 지 그림만 독특하고 최고인줄 아는 힙스터 예술충으로.




그런데, 쇼거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어쩐지 보기 좋았다.



자세가 좋기 때문일까? 그림을 내려다보면서 살짝 깔린 눈과, 턱을 당기며 살짝 미소짓는듯 보이는 입술, 연필을 세밀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하얀 연습장 위에 압력에 따라 다르게 뭉개지며 연한 회색에서 진한 회색까지, 넓은 선에서 얇은 선까지 연필 한 자루로 다양한 선을 그려내는 쇼거스의 그림은 지켜보고 있으면 뭔가 차분해지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저런 연필이면 다 번지겠지…….'




연필과 저런 스프링 노트형 연습장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조화가 있었는데, 바로 세밀하게 그려둔 그림이 노트를 닫은 사이에 이리저리 앞장과 비벼지면서 번져버리는 사태였다. 장붕이도 그림을 그릴때 고통받던 부분 중 하나로, 기껏 세밀하게 색을 잘 깔아두고, 형태도 잘 잡은 그림을 나중에 다시 보려고 펼쳤더니 엉망이 되어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난다.


장붕이는 쇼거스가 그린 그림도 그렇게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살짝 아쉬웠다.


쇼거스가 그리는 그림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남자의 인물화였는데, 이 주변에서 비슷한 사람은 없으니 아마 쇼거스도 자신이 영감을 받은 무언가를 가지고 그려내고 있는 것일 거라고 장붕이는 생각했다.




"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니?"




갑자기 쇼거스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어왔다.


장붕이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에 장식처럼 달려있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있는 것을 깨달자 쇼거스가 어떤 종족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람처럼 보이긴 해도 사람도 아니고, 눈도 한 쌍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아, 아니요. 그냥 잘 그린다 싶어서요."



장붕이가 놀랐다는 부끄러움을 숨기려 갑자기 그림에 열중하는 척을 하며 답하자, 쇼거스는 가볍게 웃었다.



"사실 오랜만에 그려보는 거야. 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니까 떠오른 게 있어서."


"엥? 그럼 그거 설마 제가 모델이에요?"




장붕이는 그림 속의 고집불통에 괴팍해보이는 인상의 외국인이 자길 보고 그린 그림이었다면 좀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영감을 얻은 건 네 모습이었지만, 그리는 건 다른 사람이야. 처음에 말 했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서 그림을 시작했었다고. 그 사람이야."



'와 존나 오글거린다.'


"와 그거 엄청 로맨틱하네요."




아까 그냥 지나가듯 말할 때는 그런 생각 안 들었는데, 쇼거스가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수줍게 말하자 장붕이는 살짝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다 큰 어른이 저런 말을 하다니, 역시 예술한다는 것에 도취된 사람들은 감성이 좀 이상하다.



그 때, 갑자기 쇼거스는 연필을 멈추더니 자신의 얼굴에 달린 인간과 같은 두 눈으로 장붕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장붕이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혹시 멋대로 소재로 삼아서 싫었니?"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자마자, 묘하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드는 풍으로 쇼거스가 물어왔다. 장붕이는 쇼거스가 생각이라도 읽었나 놀랄 정도였다.


장붕이는 조심스레 쇼거스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제가 영감이 돼서 좋은 그림이 됐다면 됐어요."




으, 장붕이는 자신까지 이런 유치한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옆에 있다보니 장붕이까지 물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장붕이의 대답에 쇼거스는 싱긋 웃고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붕이도 다시 자신의 스케치에 집중하여, 철교 바로 아래의 강에 반사된 철교의 어두운 부분이 직접 철교의 그림자 속에 들어가있는, 그 미묘한 질감과 입체감을 가진 회색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심했다. 장붕이는 연필을 쥐고 연습장 구석에 다양한 압력으로, 방향으로, 심지어는 다양한 경도와 브랜드로 바꿔가며 선을 그어보았다.




하지만 어떤 색도 장붕이가 원하는 색과는 달랐다. 그 미묘한 회색의 톤에 맞추자니 존재감이 없어서 구름이 반사된 것 같고, 그렇다고 철교의 존재감에 맞추자니 햇빛이 물 속을 따라 근처에서 비춰주며 느껴지는 그 미묘한 밝은 느낌이 없이 딱딱하고 검은 고체가 수면 아래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장붕이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는 사이에, 쇼거스는 세밀하게 압력을 달리 하며 색의 형태로 선을 부각시키는 기술로 남자의 눈동자와 눈매의 선, 눈꺼풀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다르게 만든 흰자와 같은 것을 표현하고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쇼거스는 자신의 손 끝을 칼날의 형태로 만들더니, 연습장에서 자신이 방금 막 그린 그림을 마치 제단기로 자른 것처럼 잘라내고는, 장붕이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선물."



시선을 의식한 장붕이가 고개를 들자, 쇼거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장붕이에게 건네주었다.


연습장에서 뜯어낸 것이라고는 언뜻 믿기 어려운, 마치 그림엽서처럼 깔끔하게 잘려진 그림을 받자 장붕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되게 오랜만에 그려본 거야. 그 좋아하는 사람이 미완성작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떠나버려서 내가 마저 그려서 세상에 알려주겠다면서 시작했는데……."


"……누나."


"응?"


"여기 이 회색. 눈동자에서 흰자랑 눈꺼풀 경계선 같은 회색으로 여기 좀 대신 그려줄 수 있어요? 아, 바로 그림에 그리진 말고 여기 테두리에다 칠해보세요."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자기가 건네준 그림과, 화판 위에 놓은 그림을 가리키며 장붕이가 한 말에 쇼거스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장붕이가 시킨대로 자신이 그린 회색을 따라서 그려봤다.





"아니 이건 너무 연하잖아요! 이렇게 안개같은 회색 아니잖아요!"


"어, 어? 그럼 이렇게?"


"아니 압력을 주는 게 아니라 색을 진하게 하라고요! 눈동자가 쇠에요? 돌이에요? 이 뭉근한 회색! 석상인지 사람인지 알기 어려운 이 회색이 안 보여요?"


"아, 알았어. 이렇게?"


"아니 그렇다고 소재의 질감만 살리면 어떡해요…… 이건 너무 어둡잖아요."


"자, 잠깐만, 색 있는 그림은 오랜만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맞지? 나 감 잡았어."


"아니 아까까지 잡아둔 거 어따 날려먹고 이건 뭔데요! 미세먼지 솜사탕 색이에요?!"




장붕이가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쇼거스는 당황했어. 아까까지만 해도 얌전한 애 아니었나? 요즘 애들 사춘기가 무섭다더니 이런 건가?


근데 왜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지?





"아 답답해서 안 되겠다! 누나 따라와봐요!"


"어, 어어 어? 자, 잠깐만, 있잖아, 나 기획전 후원자라 여기 있어야……."


"아 그게 중요해요 지금? 다행히 아직 하늘 색 크게 안 변했을 시간이니까 지금 옥상 올라가면 다리 보이거든요? 이건 말로 표현 못 하니까 보는게 더 빨라요!"




쇼거스는 성이 잔뜩 난 장붕이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며 층계를 올라가자, 당황하면서도 그 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쇼거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색은 그곳에 있다.



세상은 여전히 이름없는 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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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무스 챈에서 와서 참가함.


작중 등장하는 종족 등은 켄코크로스(신)의 마물소녀도감 기반이므로 혹시 모르겠다면 이 위키를 보면 아마 이해가 될 거야.


원래 연출 했던 거가 아카라이브 업데이트로 풀려서 좀 다르게 글자 연출해놨어. 원래는 글간격을 극단적으로 좁혀놔서 글 겹쳐지게 해서 깨지는 효과로 만들었었는데..... 흑흑



긴 글인데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마지막으로....


켄코크로스는 신이며 마물소녀도감은 그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