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 삑, 삑, 삑


이번 주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마무리하던 나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현관을 바라보았다.

부모님께서 방문한다고 하셨으면 무조건 연락을 주셨을 텐데?

그 외엔 비밀번호를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는 아싸의 삶을 살아왔기에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온다는 게 소름이 돋았다. 신종 범죄인가?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도구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전기인두를 손에 쥐고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삑, 삑. 띠로리로링.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문을 박살 내버릴 듯한 굉음이 들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있는 건 선글라스를 쓴 은발의 외국인 여자?

2D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신비한 외모의 양녀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 미녀가 날 보러 올 이유가 있나?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지?


"어...... 으......"


"최상위 명령권자 확인.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요."


목표를 포착했다는 듯이 다가와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들이미는 양녀.

아름답지만 어딘가 색채가 옅은 눈으로 내 이곳저곳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굉장히 당황스러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도어락을 열고 나타난 미모의 여성을 앞에 두고도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한심한 남자, 그게 바로 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길에 더욱 자괴감이 든다.


"그...... 누구......"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로봇입니다."


뜬금없이 자신을 로봇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을 보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한숨을 쉬며 외투를 벗기 시작하는 그녀.

곧이어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남의 집에서 왜 옷을 벗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큰 실례를 저지를 것 같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요즘 민심이 워낙 흉흉해 갑자기 성희롱으로 고소당할지도 모른다.


"똑바로 보세요. 눈 돌릴 생각하지 말고."


그 말을 듣고 호기심과 약간의 성욕을 이기지 못해 조금씩 눈을 떴다.

그리고 단추를 적당히 푼 그녀가 블라우스를 젖히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맨살, 그녀의 심장이 있어야 할 위치엔

푸른 빛을 내며 아름답게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장치가 있었다.

홀린 듯이 다가가 쓰다듬어보려는 찰나에 손을 강하게 맞았다.


"어허! 어디서 허락도 없이 숙녀의 몸에 손을 대려 하시나요!

그보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듣긴 했는데 진짜 중증이시네요.

혈기 왕성할 젊은 남성이 눈길을 준다는 게 젖도 아니고 코어일 줄이야."


옷을 여미는 그녀를 보고 그제야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방금 본 푸르스름한 예술이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그 코어라 불리는 기계장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평소에 상상으로만 그리던 무언가를 구체화한 완벽한 구조.

그녀를 만든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봐도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로봇이니까.

오히려 봐줬으면 하는 목적으로 여기 온 거예요."


"예......?"


"제가 로봇이라는 걸 이해하셨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미래에서 온 안드로이드예요.

이 시대에서 볼 수 있는 도라에몽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 그 도라에몽이 왜 날 도우려고 찾아온 거야?"


"주변에 여자라곤 어머니 한 분밖에 안 계시는 환경에서 자라와

XX 염색체와는 말 한마디도 섞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과거에서부터 갱생시키기 위해 로봇을 과거로 보냈다는 한심한 이유와

자신의 이상형으로 그리던 외모를 안드로이드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해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어서 보냈다는 찌질한 이유 중에 어느 게 마음에 드시나요?"


"어..... 아무래도 전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실제로는 둘 다니까요."


"......그러면 미래의 내가 너를 만들었다고?"


만들어진 본인의 입에서 말을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방금 그 정교한 과학의 산물이 미래의 내가 만든 작품이라니.

내가 만들었다고 하니까 비로소 그녀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는 태그를 빅데이터로 모은 듯이 완벽하게 내 취향에 적중한 미인이다.

조금이나마 납득이 가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실례가 안 된다면 네 설계도를 내가 볼 수 있을까?"


"그건 안 돼요. 제 목적은 이 시대의 발전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당신 같은 괴짜에게 넘겨줬다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몰라요.

아니다, 목표를 달성한다면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네요."


"그 목표가 네가 말했던 내 성격을 고치는 거고?"


"맞아요. 역시 이해가 빨라서 좋아.

성격이 고쳐졌다고 판단되면 제 설계도를 제공할게요.

그때 되면 구워 먹든 벗겨 먹든 알아서 하시면 돼요."


평소에도 내 성격을 한심하다고 자신도 생각한 적이 있었고

겸사겸사 내 지적 욕구를 채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그녀의 지도하에 성격을 교정하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솔루션으로 들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에요.

당신의 성격은 여자를 앞에 두면 극단적으로 소심해져요.

저같이 여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것에겐 말을 잘하시는 것 같은데

당신은 자신을 이성에게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나는 말도 잘 못 하면서 외모도 별로고......"


"아뇨! 이게 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거예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을 엑스트라라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인드.

제가 책임지고 당신을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자존감이 천원을 돌파하는 이 시대의 남성상을 목표로."


그녀는 다시금 선글라스를 쓰며 자신 있게 외쳤다.


"가장 먼저 스텝 원! 패션의 완성은 얼굴! 작전입니다.

그래도 원재료는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살짝 양념을 쳐보죠.

제가 당신을 위해 이 시대 미용계의 백종원이 되겠습니다.

이미 샤워는 하신 것 같으니 바로 미용실로 가시죠. 돈은 가지고 계시는가요?"


그대로 옷도 입는 둥 마는 둥 둘러 입고 손을 잡혀서 끌려나가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인외의 마경, 미용실에 도착하게 되었다.

고작 머리 치는 거에 드는 비용치곤 너무 부담스러워 꺼려지는 것도 있긴 한데

원장님도 여자고 손님도 다 여자라 들어가면 굉장히 눈치가 보인다.

지금도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눈길에 당장 탈주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머, 여자친구분이랑 오셨어요? 너무 잘 어울리신다……."


"아, 이 사람 남자친구가 아니고 사촌오빠예요.

저 나이 먹도록 여자친구 하나도 없는 슬픈 인생이라

제가 오늘 사람 만들어서 여자친구 끼고 다니게 해 주려고요."


순간 화를 내려고 했지만 이럴 때 화를 내면 더욱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소가 어색하게 보였는지 더욱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작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뛰어들고 싶다.


"학생은 이렇게 깔끔하게 자르니 인물이 훤하게 사네."

앞으로도 싸게 잘라줄 테니 우리 가게로 자주 와."


"감사합니다......"


언제 친해졌는지 금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그녀,

그 와중에도 나를 향하는 손님들의 수많은 시선,

머리를 자르면서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원장님의 질문에

네, 네, 하면서 영혼 없이 대답하자 어느새 커트가 끝났다.


"머리 다 잘랐는데 이만 갈까?"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어렵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다가가자 침묵하고 날 바라보는 사람들.

이래서 여자들이 많은 곳은 정말 가기 싫었다.

끔찍한 시간이 끝나고 미용실을 탈출하자 숨통이 트였다.


"스텝 투! 로 넘어가고 싶긴 한데 상태를 보니 영 안 되겠네요.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고 기지로 복귀하도록 하죠."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스텝 1.5라면서 커피를 주문하게 시켰다.

자신 몫까지 주문해달라 부탁을 하면서 오더를 내렸는데

난 그렇게까지 주문이 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난해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언어를 숨 쉬듯이 처리하는 알바가 존경스럽게 보였다.

믹스커피보다 한없이 비싼 무언가를 마시며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침대를 차지하고 날 책상으로 밀어냈다.


"생각보다 여성 공포증이 중증인 것 같네요. 누가 봤으면 게이라고 착각하겠어요.

하루아침에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고쳐야겠는데

위조 신분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창조주로서 제게 붙여주고 싶은 이름이라도 있나요?"


평소에 게임 이외엔 작명해보질 않아 자신은 없지만

그녀를 보면서 받은 느낌을 대답하기로 했다.

눈같이 새하얀 머리와 잡티 없이 말끔한 피부, 귀여운 얼굴.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정이 깊은.......


"흰둥이?"


"돌았어요? 사람 이름을 흰둥이로 짓는 미친놈이 어딨어요?

아니다, 그러니까 로봇 이름을 춘식이로 짓지......

삶의 풍파로 인해 망가진 센스인 줄 알았는데 선천적인 재능이었네요."


"춘식이? 그게 네 이름이야?"


"예! 당신이 직접! 프로그래밍해서 입력한 이름이에요!

어떻게 아리따운 처자의 이름을 춘식이라고 지을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지은 게 아니잖아...... 그러면 춘식이 대신 봄이라는 이름은 어때?"


"......그래도 춘식이보단 마음에 들어요.

최상위 명령권자에 의해 개체명이 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춘식아."


순간적으로 눈앞에 불똥이 튀고 머리엔 혹과 통증이 느껴졌다.

설계할 때 탑재된 로봇 3원칙은 미래에 두고 온 게 틀림없다.

그래도 오랜만에 외출하고 여자와 대화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음엔 국물도 없어요."


"고마워."


"네? 혹시 마조히스트예요?"


"그게 아니고 날 도와주는 거 말이야.

난 네가 없었으면 오늘도 계속 기계나 만지고 있었겠지."


"그러라고 만들어졌는데 뭘 새삼스럽게 감사해요.

고마우면 저녁이나 차려봐요. 슬슬 출출한데......"


"아까 커피도 마시긴 했는데 밥도 먹어? 소화기관이 있나?

동력은 그 코어에서 나오는 거 맞지?"


"밥이나 차려요. 이 답도 없는 철박이야......"


TV 리모컨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봄이를 뒤로하고

나는 저녁 반찬을 준비하러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사람은 혼자선 변하지 않는다. 나도 사람이라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으면 충분히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절대 고칠 수 없는 질병 같은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봄이와 함께라면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