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업 중이던 작품을 저장해두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옆집에 사는 그녀였다.

그녀가 손에 든 검은색 비닐봉투를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한 잔 하실래요?"




책상 위에 그녀가 사온 맥주캔을 늘어놓았다.

봉투 하나에 들어있던 맥주는 여섯 캔. 다른 봉투도 있으니까, 대충 어림잡아도 열 캔은 넘을 것이다.


"자, 건배라도 할까요."

"좋죠. 어떤 걸로 하시게요?"

"이번 제 신작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어때요?"

"그럼 우리 위대한 작가님의 새 작품을 위하여."


가볍게 맥주캔을 부딪힌 뒤 몇 모금 흘려넣었다. 알싸한 특유의 향이 입 속에 퍼졌다.

술은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와 같이 있으면 몇 잔이고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것저것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빈 맥주캔이 여럿 쌓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리고 취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요, 여러모로."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그쪽만 신세진 것도 아니고."

"당신이 없었으면 이런 삼류 작가가 이렇게까지 잘 나가진 않았겠죠."

"저도 당신이 없었으면 평범한 회사원이 번역 일을 다시 잡진 않았겠죠.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나요."

"후후…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그녀도 취기가 돌았는지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로 약간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그쪽 출판사에선 어떻다고 하던가요?"
"여전히 좋게 평가하고 있어요. 빨리 신작 내놓으라고 닦달을 하던데."

"괜히 죄송스럽네요. 불똥 튀게 만들어서."

"죄송하신 줄 알면 빨리 쓰기나 하시죠?"


피식 웃으며 살짝 질타하는 말을 건네자 그녀도 멋쩍은 듯 쿡쿡 웃었다.

어째, 그 뒤로 대화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고 둘 다 말없이 술만 넘기기 시작했다.


여섯 캔을 다 비웠을 무렵,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사랑도 번역이 될까요?"


온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심장을 꽉 움켜쥐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당신이 말했죠,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 단어를 옮기는 게 아니라고.

그 나라의 말에 담긴 문화와 정서를 읽어내서, 그 미묘한 의미를 잡아내고, 그것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진짜 번역이라고."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슬슬…."

"제 말 다 안 끝났어요."


퇴로를 막혔다.

더 이상 도망칠 방법은 없다.

여태 그 말 하나 듣기가 그렇게 두려워 도망쳐 왔는데.


"…사랑도 번역이 될까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그 말 속에 담긴 감정마저도 번역이 될까요?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언어에 담겨 있는 그 나라의 정서를, 이국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내 나라의 말로, 설령 당신의 나라 말로 사랑한다고 해도, 당신은 그 말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난 알지 못한다.

대학을 나오고, 회사생활을 하며 이 나라에서 지낸 지 6년이 거의 되어간다.

그 동안 이 나라의 문화를 이해했다고 내심 자부했지만,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의 마음 하나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취기에 쓰러질 듯한 몸짓으로, 그녀는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나의 모국어였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양쪽 다 마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진작 눈치챘다.

그녀가 반쯤 놓아주고자 했던 소설가의 꿈을. 

내가 마음 한 켠속에 정리해 두었던 번역가의 꿈을.

서로가 서로의 포기했던 꿈을 다시 이루게 해줬던, 그 특별한 관계가 틀어지는 게 내심 무서웠다.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다.


밤새동안 고민하고 겨우 마음을 굳히자, 창문 너머엔 아침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녀도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네에…."

"어젯밤 일은…."

"어거지로 대답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다.

난 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녀도 같은 고민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털어놓은 그녀를 봐서라도,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대답을 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어제 하신 말이 맞아요.

이 나라에서 몇 년을 살았지만, 전 아직도 이 나라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 나라의 문화도 정서도.

당신이 하는 말에 담긴 의미도 전 알지 못해요.

당신이 어제 내게 우리 나라 말로 해줬던 말도 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아무리 당신이 절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은 번역할 수 없을 겁니다."


고개가 점점 내려가고,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그렇겠죠. 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지도 못하는데.

당신이, 제 마음을 이해하는 건, 어렵겠죠."


힘겨운 듯 내뱉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다.

평생을 살아간들 타국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완벽한 번역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듯, 그녀의 말에 담긴 마음을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말로 하든, 내 나라 말로 하든.


"…그래도."


그래도 하나 있지 않은가.

만국공통어라는 게.


"말이 아닌 행동이라면, 어쩌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들어올린 그녀를, 살짝 껴안았다.




와 씨발 소설쓰는새끼들 글 어케쓰노 ㅈㄴ 빡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