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오래 산다는 것, 수명이 길다는 것. 미적지근하디 지루한 삶.

 

단명, 짧게 산다는 것, 그만큼 화려하게 불태운다는 것.

 

불멸,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영원하다는 것.

 

필멸,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미래, 덧없는 끝.

 

 

마신. 모든 마를 지배하는 것을 넘어 초월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성. 기본적으로 장수종인 마족과 비교해서도 압도적인, 수 천 년을 살아가는 말 그대로 신(神)과 같은 존재. 그게 바로 나다.

 

마기가 응축되어 있는 뿔, 허리까지 내려오는 군청색의 장발, 조금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이목구비, 그와 반대되는 이 매혹적인 여체를 가진 나. 마신 비르타. 수 천 년을 살아가며 해 보지 않은 즐거움이 없는 바로 내가 그 마신이다. 


수 천 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루함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지루함.

 

필멸의 존재라면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 채 사라진다는 것을 너무 아깝게 여기겠지만, 나 같은 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수십, 심지어는 100배 이상의 삶을 살아가는 내가, 누리지 못한 즐거움은 없었다. 화려한 유희도, 수수하게 살아가는 유희도, 망나니로 살아가는 것도,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도 다 해보았다. 모든 유희는 나에게 있어 즐거움을 주긴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래퍼토리가 전부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같은 유희를 해도 저번과 같은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힘들었다.

 

지루함, 압도적인 지루함만이 나를 감싼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영원불멸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이제는 부질없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 자가 나타났으면, 그 자를 위해 내 삶을 내던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오늘도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한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마신님!”

“…………허?”

 

아니, 지금 이 자가 뭐라 하는 건가? 결혼? 결혼이라고?

 

내 모든 유희를 돌아 보건대, 내가 결혼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눈에 차는 자가 없기도 했고, 할 이유도 못 느꼈으니까.

 

그런데 뭐라? 이 자는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 마신인 나와 결혼해달라고?

 

“그대, 혹시 미쳐버린건가? 만약 내 부하들로 인해 세뇌가 걸린 거라면 지금 당장 풀어주겠노라.”

“저는 멀쩡합니다 마신님!”

“아니, 내가 보기에는 멀쩡하지 않다. 돌아가서 재정비라도 하고 다시 오거라, 생각이 바뀔 테니.”

“첫눈에 반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마신님!”

“아니, 음마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군. 지금 당장 해주를 시작하지.”

 

이건 음마의 소행이다. 껄끄러운 자식들. 감히 이런 짓을 저질러서 수치를 줘? 지금 당장 해주하고 족치러 갈 것이다. 그런데-

 

‘왜 해주가 안 되는 것이지? 진짜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설마…’

 

“그대,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가?”

“그렇습니다 마신님!”

“잠깐,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만…… 나에게 시간을 주거라.”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신님!”






 

온몸에 열이 오른다. 열병은 아니다. 마신인 내가 병에 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렇다면 이 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세상에서 유희를 했을 때 이런 시답잖은 고백은 여러 번 받았었다. 물론 대답은 거절이었고, 끝까지 달라붙는 녀석들에게 마신의 형태로 현현하니 무서워서 바로 도망쳤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용사는 어떤가? 마신의 형태로 있는 내 눈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사랑을 고백했다. 아주 열정적으로.

 

필멸의 존재가 태우는 강렬한 불꽃을 본 적이 있는가? 한없이 짧지만 그렇기에 강렬하고 기억에 오래토록 남는 불꽃이다.

 

지금 나는 용사에게 그 불꽃을 봤다. 사랑이라는, 연심이라는 감정을 불태우는 화려한 불꽃을.

 

‘지루했던 삶을 살아가던 차에 이런 유희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랑 놀음에 어울려주지. 용사.’






 

“용사여, 있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신님!”

 

한결같다. 처음 본 용사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사람이 너무나도 한결같다. 올곧고, 대쪽같고, 그러기에 겁 없이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런 한결같은 사람.

 

“그대의 연심을 내 허락하노니, 그대와 나는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을 내 마신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라. 이의는 없는가? 용사? 혹시라도, 그 마음이 거짓된 것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어지려던 말을 끊은 것은 용사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느껴진 당혹감.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진 말이 그 당혹감을 진정시킨다.


“줄곧…. 줄곧 당신이 그 말을 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제 사랑은 거짓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제가 죽는 날까지 사랑하고, 이 필멸의 존재가 당신에 대한 연심으로 화려한 불꽃을 태울 것이니, 제가 멸하는 날까지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제 심장에 맹세합니다.”

 

갑작스러운 포옹이었지만, 진실된 마음이 담겼으니 상관 없나. 게다가…… 내 취향으로 잘 생겼으니,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진짜 부부가, 연인이 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연인이 되고 난 후, 용사와 나는 도시와 조금 떨어진 변두리에서 살게 되었다. 애초에 인간 세상에 유희를 몇 번이나 온 나다. 지형지물과 도시구조를 잊어버리기도 힘든 이 기억력은 내가 원하는 장소에 나를 인도한다.

 

“이것이 내 집이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집이 될 곳이다. 용사. 예전에 인간 세상에서 유희생활을 할 때 만들어놓은 집이다.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을 때 만들었던 곳이지만 마법으로 오랫동안 유지되게 만들었지.”

“역시 제 아내님. 유능해요.”

“읏…. 낯부끄러우니 칭찬은 조금 자제하도록.”

“분부 받들겠나이다. 여보.”

“그대는 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것인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이건…”

 

 

갑작스럽게 용사가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멈춘 듯 하였다.

 

‘???’

“부부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것 아닌지요? 아내님?”

“그대는 너무….. 능글맞도다……..”

“그래도 절 용서해주실 아내님이잖아요. 사랑하는 마신님.”

“으으으….. 내 아무리 오래 살아왔다지만 결혼은 처음이다. 조금만 배려를…”

“배려해준 건데요? 사실 지금이라도 마신님과 함께—“

 

뒤에 나올 말이 예상되었기에 나는 황급히 용사의 입을 막았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말거라! 짐승 같은!”

“…. 네. 마신님.”

 

하지만, 약간의 소망을 담아, 뒷이야기를 꺼낸다.

 

“……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그대와 함께 그대가 말하려 했던 것을 하고 싶구나.”





 

마신. 불멸의 존재, 영원의 존재.

 

인간. 필멸의 존재. 순간이지만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존재.

 

영원할 것 같았던 이 유희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필멸을 맞이했다.

 

내 마법으로 외모까지는 계속 늙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늙은 모습도 사랑하지만, 기왕이면 젊게 사는 것이 좋으니까.

 

하지만 수명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수명이란 존재에 묶인 이는 그 끈이 헐거워질 때 현세에서 사라지고 멸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사랑했던, 수 천 년의 몇 번의 유희 안에서도 나를 제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리고 사랑을 알려주었던 필멸의 존재, 용사를 보내주어야 한다.

 

“이게….. 이게 뭐야…. 마신이라면서..... 마신이라면서 왜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거야……”

“저는 필멸의 존재, 마신님은 영원의 존재. 저희의 헤어짐은 당연한 거예요. 슬프지만 이게 현실인 거예요. 마신님.”

“사랑하는 사람 하나 붙잡지 못하는 게 마신이라면, 나는 마신을 포기하고 너와 함께 사라질거야.”

“마신님은….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능글맞고 당신을 놀리기 좋아했던 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을-“

 

이어지던 말을 억지로 끊었다. 뒷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 작은 고집이고, 욕심이었다.

 

“안 나타나… 그런 사람….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

 

내 짧디 짧은 유희에 어울려 준 걸 넘어서, 내 본 모습을 사랑해주고, 내가 무엇을 해 주던 간에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 살아 준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결심을 담아, 진심을 담아 그에게 전한다.

 

“작별인사 없이 떠나지 말아줘….. 용사…….”

 

감정의 변화가 있더라도 우는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던 그 마신님이, 용사에게 엎드리며 흐느낀다. 떠나 보낼 수 없다는 듯이,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런 마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용사는 몇 번이고 전했던 진실을 다시 전한다.

 

“당신과 함께 해서 행복했어요. 당신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당신에게 진실된 사랑을 주고 진실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갔어요. 영원이 아닌 필멸의 삶을 산 저였지만, 당신 덕분에 더 화려하게 타올라 당신에게 더 빛나는 저를 보여줄 수 있었기에, 저는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용사는 마지막의 마지막을 담아서, 그의 사랑하는 아내이자, 마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한다.

 

“수 천 년을 사는 당신이, 필멸의 존재인 저를. 몇 백, 몇 천 년이 지나더라도 기억해주고, 다시 찾아주세요. 그때까지 저는 당신을 계속 찾을게요. 그리고 다음 생에도…. 저를 사랑해주세요”

 

그 말에 마신은, 이 말이 용사가 듣는 마지막 말임을 깨달으며, 전하고 싶은 말을, 그가 들릴 수 있도록 명확하게, 다시 없을 정도로 진심을 담아 전한다.

 

“수 백 년이고, 수 천 년이고, 나는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꼭 와. 내가 제일 사랑했던 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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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를 제공해준 ㅇㅇ님. 쓰는데 1시간 걸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