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미포 3천)
애매하긴 한데 위험한ㅇ 이고 용사ㅇ 이니까 조건엔 들어맞겠지...?
창작문학채널 놀러와!

*



"한번만 더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휘황찬란한 갑옷을 무겁게 두른 남자가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

곁에 있던 비쩍 마른 여자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모래사장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저희 세계에는 옛날 옛적부터 수없이 많은 고비가 있었고 그때마다 이세계에서 용사님들을 소환해서 그 위기를 벗어나는 식으로 살아왔다고요."

"거기까진 이해 됐어요."

"저희 왕국이 세워진 이래로 지금까지 소환된 분들은 총 10분이 계시다고요."

"제가 11대라는 거잖아요?"

"용사들은 각각 소환된 시기의 위기를 해결해내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요."

"근데."


갑옷의 남자, 11대 용사가 말을 끊었다.

용사는 눈꼬리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그거랑 내가 해야 한다는 그... 식량 문제 해결이랑은 뭔 상관이냐고요."

"식량 문제가 해결되어야 악신을 그나마 쉽게 잡을 수 있거든요."

"악신이 누구라고요?"

"기아의 신이요."


11대 용사는 다시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 그... 다시 설명해 주실래요?"

"기아의 신은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강력해지는 신이고요. 지금 아사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리고 깔렸으니 기아의 신을 최종적으로 이기기 위해선 식량 문제 해결이 불가피한..."

"아니, 밥을 먹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식재료가 방금도 보니까 널리고 깔렸더만!"

"못 먹는 거만 널리고 깔렸으니까 그렇죠!"


그 말을 들은 11대 용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뭔 소리에요 저기 저 논밭의 곡물은 뭔데요?"

"못 먹는 거죠."

"그럼 저기 저 여물 먹는 소는!"

"그것도요."

"방금 보였던 닭장의 닭은!"

"못 먹어요."

"먹으면 되는데 왜?!"


여자는 그 말에 바로 옆에 떡하니 있는 유적을 가리켰다.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유적을.


"그걸 얘기하려면 역대 용사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요. 좀 들어가요."


여자가 가리킨 유적, 그곳에는 역대 용사들의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



"초대 용사, 역대 용사들 중에서도 가장 자애로운 용사셨던 이 분은 그 특유의 자애로운 성격으로 인해 붙은 별명이 있어요."


여자가 맨 처음 가리킨 벽화는 금색의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남자의 아래에는 난생 처음 보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შესაძლო მწერები]


"무슨 뜻이죠?"

"가능충."


11대 용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 개의치 않고 여자는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지만, 아마도 초대 용사님의 인자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을까라고 다들 추측하고 있어요."

"아니 그건 그런 뜻이 아니고..."

"초대 용사님이 한 일은 여러가지 있는데 가장 큰 일이라고 하면 그거에요. 마물들의 생존권 보장."

"그러니까 그 별명이란 게..."

"설명 좀 들으세요 용사님."


깨갱. 11대 용사가 억울한 눈으로 쭈그러들었다.


"이전까지 마물들은 그저 마물이라는 이유로 배척 받았어요. 그저 조금 기분 나쁘게 생겼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마물을 죽이라는 퀘스트가 내려지곤 했고, 아무 이유 없이 그것을 수행하곤 했죠.


그러다 초대 용사님이 마왕과 혼인을 하게 되며 마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나서신 겁니다. 그 이후로 마물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법으로 엄금하고 있죠. 이제는 감히 꿈도 못 꾸고요."
"그럼 그후로는 잡몹 사냥도 쉽게 못하게 된 거에요?"
"그런 셈이죠. 참고로 지금은 잡몹이라고 말하면 뭇매 맞으니까 조심하세요. 참고로..."


여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두루마리를 하나 꺼냈다.

"참고로 이때 초대 용사님이 남기신 말씀이 또 명문으로 역사에 남았어요."

두루마리 속에는 남자는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수두룩하게 적혀 있었다.

여자는 이 세계의 글을 못 읽는 남자를 위해 두루마리의 글을 해석해주었다.


//

153년 3월 2일

초대 용사께서 이르시되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있다.

하늘은 주먹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주먹 센 놈이면 하늘도 그 녀석을 밀어준다는 말인데, 지금 주먹 센 놈이 누구이던가.

인간인가? 그렇지 않다.

신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악마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다. 용사다.


그러니 비난을 감수하고 감히 선포하겠다.

마족 여자가 더 꼴린다.

꼴린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던가? 아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던가? 아니다.

그렇다. 꼴린다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즉, 꼴리기만 하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무죄다.


마물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는 달리 마물들은 천성이 식인이고 강간이니까 말이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역안 꼴리잖아. 꼬리 꼴리잖아. 날개 꼴리잖아.

꼴리면 무죄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마물을 죽이는 행위는 일절 금한다.

이상. 꼬우면 나 찾아오도록.

//


"이게 뭔..."


11대 용사가 두루마리에서 힘겹게 눈을 뗐다.


"이 명연설에 당시 사람들은 가슴이 벅차올라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져요."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눈물이 나온 거겠죠."

"지금은 소리만 전해지는 사어死語가 많아서 아직 저희는 자세히 뜻을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틀림없이 당시의 시대상을 통렬하게 꼬집는 비판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추정 중이고요."


용사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근데 이게 기아랑 무슨 상관..."

"그 전까지 고기는 대부분 마물을 죽여서 손에 넣었거든요."

"다른 먹을 것도 많이 있잖아요. 방금 보니까 뭐 많던데."

"여기서 2대 용사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여자가 지팡이로 가리킨 끝에는 은색 갑옷을 두른 대검의 여성 그림이 있었다.

이번에는 11대 용사도 아는 문자가 그림의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2대 용사님의 이명은 현재 '모피' 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아니 씨 저거 [FURRY] 잖아."


벽에 당당히 새겨져 있는 5글자를 보고

용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마 2대님은 모피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읽는 방법은 '푸리' 로 추정되고 있고요. 역시 사어死語라서 확언은 못하겠지만요."

"저거 furry 라니까요?"

"예, '모피' . 아니에요?"


여성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눈에는 어떠한 순수한 무언가가 있었다.

11대는 뭔가를 깨닫고 눈을 돌렸다.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네,그렇죠. 모피. 모피네요..."

"?"

"아뇨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아..."

"... 초대님 만큼은 아니지만 2대님도 사랑이 넘치기로 유명하셨는데, 특이하게도 파티원이 하나도 없으셨던 걸로 유명해요."

"그럼 단신으로 마왕을 잡은 거에요?"

"그렇죠. 몇 마리 동물만 데려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ㅅ발 역시나."

"데려간 동물은 타고 다닐 숫말과..."

"숫말! 취향 알만 하네."

"수캉아지 3마리, 전투용 수컷 오랑우탄 한마리..."

"설마 얘도 동물이랑 결혼했다 뭐 그런 거에요?"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분은 용 수인이랑 하셨다고 알려져 있어요. 당시로써는 파격적이게 수인과 혼인을 하신 거죠.
이후 두분 부부가 함께 동물들의 권리를 확장시키기 위해 힘쓰셨다고 전해져요."

"어후우..."


11대 용사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뇨, 괜찮으니까 그래서 2대가 또 뭔 정책을 펼쳤나 들어보죠."

"크게 3가지인데

첫째로 식용을 포함한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했어요.

둘째로 동물의 고기, 알 등 부산물을 먹거나 사고 파는 것을 금지 시켰고요.

셋째로는 동물과 인간의 혼인을 허락하는 법안을 발표했어요."

"아주 사심이 그득그득 담겼네."

"다음으로 3대 용사님인데..."

"나 슬슬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남자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여자는 3대 용사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3대 용사. 어딘지 모르게 불그스름한 얼굴이 특징인 귀공자 같은 옷차림의 남성.

3대 용사는 전체적으로 부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퉁퉁 분 그 얼굴에선 어딘가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다만 그림 아래의 문자는 다시 11대 용사는 읽을 수 없는 것이었다.


[Дакимакура]


"이거는 무슨 뜻..."

"이건 자료가 너무 없어서 아직 연구가 덜 됐어요. 일설에선 '다' 뭐라고 하던데.
'다정한' 이나 '박학다식한' 이 아닐까 하고 다들 추측하고 있어요."

"얘는 또 뭔 짓을 했는데요."

"이 분은 발명품으로 유명한데요..."

"발명이요? 뭐, 풍차? 화약?"

"아뇨 위협용 무기인데 음... 직접 보여드릴 게요."


여자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을 타고 반투명한 하늘색 액체 비슷한 것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이윽고 액체는 뚜렷한 하나의 모양이 되었다.

긴 배게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 분은 볏짚을 엮어서 긴 봉 비슷한 것을 만들었어요."

"배게 아니에요 저거?"

"주의할 점은 이 무기는 연약하고 푹신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실용성은 떨어진다는 점이죠.
어디까지나 위협용으로 알맞은 무기였어요."

"배게인데 저거."

"사용법 관련해서 말씀하신 게 있는데..."


여자의 품 안에서 또 다른 두루마리가 나왔다.

이번에도 여자는 남자를 위해 두루마리를 해독해 주었다.


//

303년 9월 25일

3대 용사께서 이르시되


그러니까

이건 안고 자는 용도라 몇번이고 말했는데샤아앗!

와타시는 이게 없으면 잠을 못 자는 데챠앗!


응? 겨우 그딴 용도로 곡물을 낭비해?

와타시의 세레브한 신부짱을 욕하지 말라는 데챠앗! 똥닌겐 뭔데 잘난 척인데스웅?


응? 이거 하나 만들면 백성들이 배를 주려?

그럼 곡물은 안 먹으면 되는 데챠앗! 왜 와타시를 못 살게 괴롭히는 데스웅!

지금 투덜거린 놈 튀어나오는 데스웅!!


...

//


"그만."


여자의 해독을 끊으며 남자가 끼어들었다.

"네? 왜요? 아직 무기에 그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여성의 특징에 대해서도 말 안 했고..."

"더 안 들어도 알 거 같으니까 그만."

"... 알았어요. 그럼 4대 용사님에 대해서 설명할게요."

"아뇨 그것도. 이제 그만 좀 합시다!"


용사가 두 손을 뻗으며 몸부림쳤다.


"그만 하죠. 과거를 보기보단 지금 살 방도를 찾는 게 나을 거 같네요."

"? 용사님이 그러시다면야..."


두 남녀는 함께 유적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만 해도 어두컴컴했던 하늘은 어느새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붉게 물들고 있는 하늘은 퍽 감성적이었다.


"그 뭐냐."


용사가 새벽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 한층 깊어진 눈이었다.


"대단들 하네요 역대 용사들."

"그렇죠?"

"아니요, 그... 여러 의미로."


새벽녘 어스름한 햇빛이 두 남녀를 비추고 있었다.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