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는 기도하지 않는다.





1.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마을에는 술집이 따로 없었다, 대신 밀주를 만드는 존슨의 집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테이블과 의자, 거기에 술만 있으면 거기가 어디든 술집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 장소에, 노인들은 각자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이번엔 뭘 줘야 할까?”


“흠, 그러게. 셋은 줘야 할 텐데.”


“존슨! 여기 두 병만 더! 그보다 아직 소식 없어?”


“없어. 근데 정말 그것들로 되는 거야?”


“괜찮다니까. 저번에도 잘만 받던데?”

쿵.

그 순간, 사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까맣고 까만, 새까만 까마귀 같은 여자였다.

전신을 감싸는 검은 수도자의 옷, 가슴에는 삽을 상징하는 두 개의 삼각형이 걸려있었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더 어릴지도 몰랐다.

긴 생머리도, 눈동자도 검다. 그러면서도 피부만은 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밝았다.

어딜 가나 환영받겠군, 어느 사내가 소녀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조그마한 입과 코, 그에 대비되는 커다란 눈은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웃으면 뭇 사내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예뻤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심드렁하고 귀찮아 보였다. 어쩌면 조금 지친 걸지도 몰랐다.

그녀가 어디에 쓰는지 모를 커다란 금속재질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예상한 것보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사내들 중에서 한 명이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 피아스에 온 걸 환영해! 혼자 왔어?”

“혼자입니다. 혹시 마차를 수리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말을 꺼낸 사내, 렙톤이 여자를 위부터 아래까지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수도자 같은데, 분위기를 보아 평민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마차? 마차라……흠, 젠킨슨이 마부였지. 아마 고쳐줄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길에 마차가 부서져서…….”


“거기 길목은 항상 그렇지. 뭐, 금방 고칠 수 있을 거야.”


렙톤이 사내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보다 외지인이 온 건 오랜만이라……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에르테입니다. 성국의 사제이며, 이번 일에 대한 보수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진 안 물어봤는데. 렙톤은 생각했다.

“보수는 괜찮아, 모처럼 온 손님에게 어찌 돈을 받겠어?”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이 친절함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르테가 우아하게 치마를 살짝 올리며 인사했다.

보통 귀족 아가씨라 함은 예의범절을 밥 말아 먹은 경우가 잦았는데, 이번엔 예외인 듯했다.

“하지만 음, 마차 수리는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아마 며칠 정도?”


“예상한 바입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주거지를 빌려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아가씨.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왔는데 방 정도야 빌려줄 수 있지.”


“감사합니다. 그럼, 속히 이동하고 싶습니다만.”


렙톤은 자진해서 그녀의 길잡이가 되어줬다.

확실히 작고 외진 마을이다, 에르테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몇 가구나 살고 있을까. 30 가구쯤 될까? 마을이라 부르기도 뭣한 수준이었다.

마을의 경계에는 높다란 나무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고, 망루도 꽤 많았다.

처음 마을로 들어올 때 입구에서도 경계가 꽤 삼엄한 듯 했다.

그걸 제외하면, 특징이랄 건 없는 마을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외진 곳에 마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그렇긴 해. 사실 대부분은 여기 마을이 있다는 것도 모르지.”

그녀도 그랬다. 에르테는 여기 마을이 있다는 걸 방금 처음 알았다.

“하지만 봐, 생각보다 살기 좋은 곳이야. 농사도 잘되고, 큰 사고도 없고…….”


“그런데 저 울타리는 뭡니까?”


“아, 저거?”


렙톤이 울타리를 슥 보며 말했다.

“드물게 늑대 무리가 와서 가축을 물어가거든. 꽤 큰 공사였지, 하하.”


“그렇군요. 하기야 늑대는 어딜 가나 문제니까요.”

특히 이런 작은 마을에선 늑대 떼는 그냥 골칫거리가 아니라 진정 위협이 됐다.

늑대 열 마리가 무장하지 않은 사람 서른 명도 물어 죽일 수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약하다. 무기를 들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랬다.

“응?”

그때, 에르테가 멈춰 섰다.

누군가가 오두막 옆에 숨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 아이가 있었다.

“저 아이는?”


“……아. 저 아이 말이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렙톤의 말에도, 에르테가 아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이 뭐니?”

“…….”


“저기…….”

그녀가 아이를 위부터 아래까지 슥 훑어보았다.

피부는 거무죽죽하고, 뼈가 앙상했다. 나이는 6살이 채 안 된 것 같았다.

그때, 그녀가 잠깐 멈칫했다.


동시에 아이가 에르테에게 고개를 저은 뒤, 후다닥 도망쳤다.

“신경 안 써도 돼, 저 아이는 벙어리거든. 거기다 외지인을 싫어해.”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에 도착했다.

“자, 여기 머물면 돼. 별로 좋은 곳은 아니지만…….”


“괜찮습니다. 어릴 적에 쓰던 곳에 비하면 궁전이나 다름없죠.”


에르테가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고 안은 비좁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악취도 났다.

가구는 허름한 침대 하나와 낡은 나무 테이블이 전부였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군요.”

“비꼬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침대와 테이블이면 필요한 건 전부 있는 셈입니다.”


흠, 꽤 소박한 여자로군. 렙톤이 생각했다.

“식사는 다 함께 모여서 먹거든, 저녁 시간이 되면 말해줄게.”


“저는 혼자 먹고 싶습니다만…….”


“아냐, 아냐! 그러지 마, 다들 널 보고 싶어 할 거야. 특히 촌장님은 더더욱.”


하긴, 신세를 지게 됐으니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에르테가 그리 생각하고선, 렙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편히 쉬어.”

그가  문을 닫고 떠났다.

“……흠.”


에르테는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침대로 가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2.

쿵, 쿵, 쿵.

에르테는 곧바로 눈을 떴다.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벌써 저녁이 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피곤했던 모양이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아까 낮에 봤던 얼굴. 렙톤이었다.

“자고 있었어? 이런, 미안하게 됐네.”


“괜찮습니다. 식사 시간입니까?”


“응,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그래도 꽤 맛있을 거야, 기대해도 돼.”


에르테가 그의 뒤를 따라,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향했다.

사실, 광장이라고 해봤자 모닥불 몇 개에 테이블 서너 개가 있을 뿐이었다.

“아, 참으로 아리따운 분이시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백발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몸집은 작고, 주름살은 그 나이만큼 깊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 마을의 촌장, 레더릭입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성국의 수도자 에르테입니다.”

“손님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저희가 결례를 범할까 걱정이군요.”

“괜찮습니다. 친절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모닥불에 끓인 스튜와, 보리 섞인 빵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에르테가 마을 주민을 슥 훑어보다가, 빵을 베어 물었다.

평범한 빵이었다. 보리 맛이 나고, 좀 푸석푸석한 빵.

“대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허허……마음껏 드시길.”

그녀가 빵을 먹으며 한 번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내들이 있었다. 대부분 노인이거나, 혹은 노인이라 볼 수 있는 나이였다.

“다들 나이가 많아 보이시는군요.”


“아, 그렇지요. 이 마을 젊은이들은 벌써 도시로 떠난 지 오래입니다.”

흔한 일이었다. 하기야 이런 마을에서 썩을 바엔 도시로 가는 게 나았다.

제국으로 간다고 인생이 확 피진 않겠지만, 기회는 잡을 수 있으리라.

“그보다 성국에서-”


“레더릭 씨.”

에르테가 빵을 마저 삼키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묘지에 가고 싶습니다만.”


“묘지……말입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저희 마을에는 묘지가 없습니다.”


촌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희 마을은 보다시피 그리 넓지 않아, 시체는 모두 화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묘지에는 어인 일로……?”

“저는 사제이면서 의사, 또한 장의사입니다. 환영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그런 거군요. 촌장이 껄껄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희야 손님이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네…….”


식사가 끝난 뒤, 에르테는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묘지가 없다, 라.”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잠시 명상했다.

시간이 흘러 새벽, 에르테는 명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달빛도 없이 깜깜했다. 에르테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 발자국도 못 나아갈 어둠이건만, 그녀는 태연하게 걸어갔다.

향하는 곳은 언덕 위. 마을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향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황무지 같은 곳이었다.

“…….”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거라곤 흙먼지뿐.

그러나 에르테는 바닥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이윽고, 흙 속에서 그녀가 꺼낸 것은 조그마한 뼈였다.

“과연,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오는군.”

그녀가 손을 털어내고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묘지가 없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3.

“여러분, 오늘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에르테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냈다.

그녀는 테이블과 의자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 위에는 커다란 가방이 놓여있었다.

“저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의사입니다.”

“아, 그렇다고 하셨죠.”

“그래서 여러분께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무료로 진찰하고자 합니다.”

에르테의 선언에 마을 사람들은 당황한 듯 눈치를 봤다.

“괜찮습니다. 어디까지나 간단한 진찰입니다.”


“그렇다면……괜찮죠, 촌장님?”


“……괜찮겠지.”

마을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섰다.

주민들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그나마 제일 젊은 사람이 70살은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 병에 걸리거나 아픈 사람은 없는 듯 했다.

“흠, 모두 건강하시군요.”


“다들 열심히 일하니 아플 틈이 없지요. 허허, 이제 다 되셨습니까?”


“네,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보다 에르테 님……피곤하실 텐데, 무리하지 마시고 쉬시지요.”

촌장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네?”


“……마차 수리는 아직 안 끝났습니까?”


아아, 그 마차 말이군요. 촌장이 허허 웃었다.

“마차라는 게 그리 빨리 고칠 수 있는 게 아닌지라……젠킨슨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 부득이하게 재촉하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 있지요, 허허……너무 괘념치 마시길.”

“참, 밤에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촌장이 눈을 껌뻑였다. 왜 굳이 밤에 만나자고 하는 것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


“별건 아닙니다. 그냥 대화를 좀 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촌장이 대답했다.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에르테가 그리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렙톤을 비롯한 몇 명의 사내들이 촌장에게 다가왔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테니 신경 쓰지 마.”


“미리 준비할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게 좋겠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말이지…….”

이 마을을 지킨다, 그것이 촌장의 일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밤.

약속대로 두 사람은 만났다. 촌장의 오두막에 두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촌장의 오두막도 그리 대단할 건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창문이 있다는 정도였다.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에르테 님께선……사제라고 하셨지요?”


“네, 성국의 사제입니다.”


“아직 어려 보이시는데, 대단하십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던 터라.”

그 사정이 대체 뭘까, 촌장이 식은땀을 바지에 닦으며 생각했다.

“혹 에르테 님께선 귀족 출신이신지요?”


“아뇨. 전 제국 빈민가 출신입니다.”


의외였다. 제국 빈민가라니? 거기 주민이 사회로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성국의 사제라니.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참 신기하군요. 보통 힘든 생활이 아니셨을 텐데요.”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차라리 그 시절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에르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참 좋은 마을입니다, 마음에 드는군요.”


“아아, 참으로 그렇지요. 저희 마을 주민들은 다들 건강하고 부지런하고요.”

촌장이 다시 손에 묻은 식은땀을 바지에 닦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뭐, 사실……마을보단…….”


“마을보단?”


“……도축장에 더 가깝지. 안 그래?”


에르테가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으면 정말 몰랐을 거야, 적어도 이틀 정도는 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피차 눈치챘잖아? 아니면 그래, 내 추리를 한 번 읊어볼까?”


완전히 달라진 태도, 더해 정반대로 바뀐 분위기.

이제 촌장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최근 이 주위에서 사람이 실종된다는 보고가 있었지.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


“여기 들린 것도 반쯤은 우연이었어. 그보다 마차 말인데, 아직도 못 고쳤어?”


“그건 시간이-”


“못 고쳤겠지. 왜냐하면, 마차는 처음부터 타고 온 적도 없으니까.”


촌장의 몸이 움찔 떨렸다.

“길가에 함정을 설치해서, 마차가 지나가면 부수고 여행자가 여기로 오도록 유도했지.”

“그럴 리가…….”


“맞잖아? 넌 마차를 확인해보지도 않았어. 어차피 고칠 생각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마차가 부서져 수리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었다.

여행자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도록.

“물론 더 거친 수단을 쓸 수도 있었겠지, 내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진작 그랬을 테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사제님.”


“무슨 오해? 씨발아, 손 올리는 순간 뒈진다.”


촌장의 손이 도로 내려갔다.

“사제인 내가 왔으니, 넌 참 곤란했을 거야. 죽이거나, 보내거나. 어느 쪽이건 말이지.”

“…….”


“죽였다간 성국에서 눈치를 챌 수도 있고, 보냈다간 내가 지원군을 데리고 올지도 모르니까.”

에르테가 한숨을 내뱉었다.

“더 말해볼까? 이상한 점은 더 있었어. 울타리는 그럴 수 있다고 쳐. 근데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는 건 이상하지. 

거기에 노인들뿐인데 병자가 없는 건 더더욱 이상하고.”

“…….”


촌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 아이. 이 마을 사람이 아니지? 상처는 잘 가렸지만, 안타깝네.”


그녀는 의사였다. 그렇기에 상처를 보면 생긴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의 발목에는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 아킬레스건을 자른 상처가.

“마지막으로……무덤이 없다고 했던가?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주위에선 화장을 하지 않아. 

나무가 많지 않고, 관습에도 어긋나거든. 하긴, 내신교도가 아니라서 몰랐나?

 인간이면서 외신(外神)을 섬기다니, 보통 또라이가 아니네. 너.”

“……후.”


“그 무덤에 있던 뼈, 꽤 많더라. 이 짓거리도 제법 오래 한 모양이야?”


“하, 하……후하, 후하하하하……으하하하하…….”

촌장이 웃었다.

얼굴의 일그러짐은 공포나 고통이 아닌.

기쁨과 희열, 조롱의 미소였다.

“뭘 쪼개? 기분 더럽게. 자수할래, 아님 내가 끌고 갈까?”


“끌고 가? 나를? 네가 감히 나를 끌고 간다고?”


온화하고 다정한 노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웃고 있는 악귀였다.

“어린 것이 건방지구나. 지금 네 상황이 어떤지 모르고 혀를 놀리는 게 참으로 재미있어.”

에르테가 창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십 개의 눈알이 보였다.

마을 주민들이다. 그들이 오두막을 포위하고 있었다.

“누굴 섬기지? 인신공양이면……흠, 이함브리스? 아카엘?”

“속삭이는 유혹의 주인, 퀴헬라 님이시다.”

“아, 퀴헬라. 그 좆같이 생긴 더러운 촉수 새끼? 참 어울리네.”

“감히 내신의 종놈이 가장 깊은 계곡의 주인을 모욕하는구나.”


쿠당탕!

촌장이 테이블을 옆으로 치워버린 뒤, 에르테에게 말했다.

“자, 이제 어쩔 테냐? 또 추리해볼 테냐? 네 운명이 어찌 될지?”


“흠, 그거 재미있네.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먼저 네 육신을 탐할 것이다. 구멍이랑 구멍은 모조리 써주마, 그리고 네 안에
우리의 씨앗이 자리 잡으면, 그때 퀴헬라 님께 널 바칠 것이다.”

“아하, 이게 그 1+1이라는 건가? 제물도 하나보단 둘이 낫지.”

촌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울고불고 애원해야 할 텐데, 이 여자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난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음, 거짓말보단 진실을 말하지 않은 쪽인가?”


“뭐라?”


“사제도 맞고, 장의사도 맞고, 의사도 맞아. 하지만 내 직책이 그뿐만은 아니거든.”


척.

어느새 그녀의 손에, 삽이 쥐어져 있었다.

날 부분이 새까만 흑요석인 삽이었다.

“정식 직함은 요하네스 성국의 성녀, 죽음과 삶의 신 세르케의 대리인 겸 대주교.”

“성녀라고……!?”


“겸, 오늘은 임시 이단 심판관이지.”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바깥에서 기괴한 울부짖음이 들렸다.

“고작해야 외신의 권능을 빌린, 늙어빠진 너구리야.”

“도, 도망쳐! 언데드다!”


“흐아아아아악!!”


이어서 주민들의 비명이 들렸다.

“어디, 신을 대리하는 자와 맞서 보아라.”

촌장이 창문 밖을 보았다.

시체를 묻어둔 구덩이에서, 뼈와 썩은 살을 두른 망자들이 기어 나왔다.

삶의 권능. 죽은 자를 현세에 불러내 조종하는 사령술.

그러나 사령술사들이 고작해야 10명, 20명을 부리는 것과 달리 구덩이에 있던

모든 망자들이 기어 나왔다. 그 수는 100, 혹은 200명을 넘겼다.

마을 주민들은 맞서 싸우다가, 곧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전략적 후퇴를 했다.

……그러니까 무기를 버리고 부리나케 도망친 것이다.

“살려, 살려줘! 문을 열어!”


“문이 안 열려! 으아아악!”


촌장의 몸이 떨렸다.

고작해야 이단 심판관, 아니면 일개 사제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녀라니? 내신들의 선택을 받은 신의 대리인을, 어찌 이기란 말인가.

“너!!”


촌장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이다니……!”


“감히? 외신 따까리 주제에 감히라,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거야? 아님 노망이라도 들었나?”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는가.

이 마을을 세우고, 유지하고,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

그런데 눈앞의 이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한테, 그 모든 노력이 짓밟혔다.

영원한 삶과 힘이 눈앞에 있었는데. 앞으로 조금만 더 모았더라면.

“퀴헬라시여!!”


촌장이 숨겨둔 단검을 꺼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저를 바치나이다, 저 내신의 계집에게 저주를!! 제게 힘을 주소서!!”


“별 지랄을 다 한다, 그냥 순순히……아, 씨발.”


그 순간, 촌장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퀴헬라다. 그 계곡에 처박혀서 화냥질이나 하는 촉수 덩어리가 온 것이다.

“오오……오오오오오……! 감사합니다, 그어어억…….”


“좆같은 외신 새끼들. 니미 씨팔.”

콰아앙-!!


오두막이 무너졌다, 에르테는 뒤로 물러나 가방을 챙겼다.

촌장은 어느새 몸집이 5배는 커졌고, 온몸에는 음경을 닮은 새까만 촉수가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외신의 권능으로 그들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내가 이래서 신이 싫다는 거야. 병신 같은 새끼들.”


“그하하하……! 이 힘! 이 권능! 보아라, 절규해라! 내신의 계집년아!”


“좋냐? 좆같은 좆대가리 새끼야. 씨발, 추가 수당도 못 받는데.”

파캉-!


그녀가 스위치를 누르자, 가방이 스스로 조립됐다.

“가변 무기, 성자의 고난.”

새까만 금속으로 만든 석궁. 그러나 화살 대신 날카로운 뼈가 장전되어 있었다.

“덤벼, 틀딱 새끼야.”


“그아아아아악-!!”


콰아앙-!


촌장이 팔을 내리치자, 땅이 갈라졌다.

어마어마한 힘.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게 뻔했다.

“두려워해라! 경배해라! 나는 무적이고 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아니지. 그래 뭐, 신의 따까리 정도는 됐네.”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에르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 촌장이 팔을 휘둘렀다. 에르테는 옆으로 굴러 피한 뒤, 석궁을 쐈다.

푹! 뼈로 만든 화살이 다리에 박혔다. 그러자 촌장이 웃었다.

“히히히……이게 다냐? 고작 화살 쏘는 게 네 권능의 전부더냐?”


“아참, 말을 안 했는데. 나는 사제지만 힐링을 쓸 수 없어.”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촌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 사제가 힐링을 쓰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신의 권능을 빌리는 자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권능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성녀가, 신의 대리인이 힐링조차 쓰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오해하지 마, 내 격이 낮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녀가 화살을 장전하며 말했다.

“대신 훨씬 쓸모 있는 재주가 있거든.”


“윽!?”

촌장이 다리를 붙잡고 웅크렸다, 갑자기 다리가 굳어버린 탓이다.

뼈로 만든 화살엔 부적이 감겨있었다……그제야 촌장은 이해했다.

“저주인가!”


“정답, 생각보다 대가리가 빨리 굴러가네?”


성녀가 저주라니! 듣도 보도 못한,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저주는 사령술사들이나 쓰는 것이다. 사제들은 절대 쓰지 않을 기술이다.

“으그윽……! 네 년, 정체가 뭐냐!?”


“말했잖아. 의사 겸 장의사 겸 사제 겸 이단 심판관 겸 성녀라고.”


“닥쳐라!!”


대답해줬는데도 지랄이야. 에르테가 공격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다리는 못 쓰게 해뒀다. 그럼에도 저 촉수의 사거리가 너무 길다.

너무 물러나면 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래서 외신이 싫었다. 그것들은 대체 뭘 생각하는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파앙-!

다시 화살이 날아가, 촌장의 어깨를 꿰뚫었다.

이번 저주는 탈력. 촉수가 흐느적흐느적 늘어졌다.

“잔재주를……!”


펑, 펑, 펑!

연달아 촉수에서 검은 액체가 포탄처럼 뿜어져 나왔다.

에르테가 몸을 숙여 부서진 테이블 뒤로 숨었다.

“윽…….”


그러나 액체의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이 녹아내렸다.

“나이도 지긋하신 씹새끼가, 예의 없이 침을 뱉고 지랄이야.”

“그하하하! 도망쳐라! 숨어라! 이 내신의 벌레야!”

또 독기의 포탄. 그녀가 석궁을 내리고 메고 있던 삽을 휘둘렀다.

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독기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어떻게!?”


“이거, 의외로 성유물이거든.”


깡, 까앙-! 촌장이 발사한 독기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이럴 리 없다. 지금쯤 진작 바닥에 누워서 목숨 구걸을 해야 할 텐데.

팡! 다시 또 다른 화살이 배에 박혔다. 이번엔 부패였다.

촉수와 살점이 썩어 줄줄이 흘러내린다.

“크으으……! 이 년, 내신의 계집 주제에, 감히, 감히, 감히!!”


촌장이 팔을 땅에 박았다.

뭐지? 그 순간, 촉수가 땅에서 솟아나 에르테를 덮쳤다.

“큭!?”


피하지 못했다. 에르테의 옷과 살점이 찢겨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오오, 퀴헬라시여! 당신께 바치나이다, 당신께 저 여자를 바치겠나이다!”

이어지는 공격. 에르테가 바닥을 기어 독기를 피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삽으로 튕겨내고, 피해도, 끝나질 않는다.

“씨발! 적당히 해, 늙은이!”


“그하하! 으하하하!!”


앞으로 한 방이면 되는데.

그 순간이었다.

“엉?”

툭, 투욱-

누군가가 촌장의 머리에 돌멩이를 마구 던졌다.

“넌!”


그 아이였다. 아까 마을에 있었던 아이, 외신의 제물이 될 그 소년이.

“으, 으으! 우으으!”


“시건방진 꼬마가 또 있었군.”


촌장이 손을 뻗어 공격하려던 순간-

파앙-!!


화살이 손을 꿰뚫었다, 그러나 촌장은 비웃었다.

“저주도 적응하니 별거 아니군. 그래, 다 했나?”


“다 했지. 4발, 맞지?”


다리, 어깨, 배, 손. 정확히 4발이었다.

“내가 아까 보여준 권능은 삶의 권능이었어. 무슨 뜻인지 알아?”


“뭐라……?”


“그럼 반대로, 죽음의 권능은 뭐라고 생각해?”


에르테가 씩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한 번 뒤져봐, 씻팔 좆같은 대머리 새끼야.”

쿠구구구구구-

촌장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았다.

거대하고도 거대한, 산보다도 거대한 백골이 나타났다.

죽음과 삶의 신, 장의사와 병자의 신 세르케.

그가 직접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이건!?”


이윽고 거대한 손이- 촌장 위로 떨어졌다.

쿵-!!

마치 파리를 잡듯이, 신의 축복을 받은 육신은 한순간에 뭉개졌다.

세르케는 더럽다는 듯 손을 털었다. 그리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끝났네. 흥, 쓸데없이 애먹이긴.”


그녀가 하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에르테 나름의 감사인사였다.

……아니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욕이거나.

“망할, 난 늙은이들이 싫어.”


새벽이 온다.

에르테는 또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신을 저주했다.





4.

보고.

마을의 일은 처리했습니다, 촌장이 외신과 결탁하여 수명과 권능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을 유인하여 때가 되면 제물로 바쳤던 것 같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즉결 처형하였고, 촌장은 전투 끝에 사살하였습니다.

마을은 불태워 정화하였고, 살아남은 소년은 성국으로 보냈습니다.

거기서 이단 심판을 한 뒤, 문제가 없으면 고아원에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추가로, 이번 일은 심부름 삼아 한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가 안 맞습니다.

추가 수당을 요구합니다. 묵살하지 마시길, 뭐 같으면 성녀 때려치우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 심부름도 끝냈으니 요구하신 대로, 아카데미로 향하겠습니다.

제가 왜 거기서 잡일이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에르테 올림.

에르테가 편지를 다 쓴 뒤, 편지 봉투에 담아 하늘로 던졌다.

그러나 편지 봉투가 스스로 날아올라 떠났다. 아마 일주일 뒤에는 도착하리라.

“빌어먹을 내 팔자야.”


믿지도 않는 신이 권능과 성흔을 내려주고 십 년째.

성국에 가서 출세한 건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너무 많았다.

외신들은 호시탐탐 인간의 땅을 노리고, 병자와 망자는 끝도 없이 많았다.

차라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빈민가에서 살던 시절이 낫지 않았나, 싶었다.

“왜 무신론자인 나한테 성흔을 내린 거야……망할 해골바가지 영감 같으니.”


그녀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의 존재는 믿어도, 신의 전능함이나 그딴 건 조금도 믿지 않는다.

신이 유능했다면 자신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다며.

“그나저나 아카데미인가…….”

“……뭐, 나름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지금 쓰는 소설 완결내고 쓸 예정인 소설의 히로인 시점으로 단편을 써봤음
네크로맨서 욕데레 성녀가 히로인인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럼 이제 자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