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서!”

 

 뒤를 돌아봤다.

 못마땅한 표정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넌 왜 매번 사람을 소리 지르게 만들어?”

 

 “아.”

 

 머리를 긁적인다.

 방금까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던 참이었다.

 골똘히 생각에 몰두하면 주변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곤 했다.

 

 “미안.”

 

 그가 짧게 사과하자, 여자아이는 한숨을 쉬었다.

 

 “됐어. 내가 참아야지.”

 

 그녀의 어깨에 메어있는 가방끈이 보였다.

 

 “벌써 가게?”

 

 “벌써라니. 3시 30분이야. 학원 4시까지라고.”

 

 학원을 간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끝까지 남아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고개를 돌려 방송실 벽에 걸린 달력을 살폈다.

 

 “너 금요일에 학원 없잖아.”

 

 의아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갑자기 오늘 보충수업 있다고 문자가 와버려서... 미안해.”

 

 그녀는 억울한지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보여줬다.

 나는 문자를 읽는 대신, 팔짱을 끼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는 가야 하니까 편집 열심히 하고...”

 

 그녀는 일부러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항상 장난을 치곤 할 때 짓던 표정이었다.

 눈을 일부러 감아 그녀의 시선을 피해 작게나마 불만을 표출했다.

 

 “맞다. 은채 불러와서 나레이션 재녹음 시키는 거 잊지 말고.”

 

 “뭐?!”

 

 평정심을 잃고 눈을 벌떡 떴다.

 저번 주부터 재녹음한단 소리가 나왔던 거 같은데 왜 지금까지 안 했단 말인가!

 벌써 축제가 다음 주 목요일인데.

 

 “은채가 계속 미루고 미뤄서 어쩔 수 없었어.”

 

 나는 툴툴대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문자로 들어가 은채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입력했다.

 방송실로 빨리 오라는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에, 문고리를 잡은 그녀가 말했다.

 

 “소용없어. 휴대폰 압수당했어 걔.”

 

 “왜?”

 

 “수학 시간에 미니게임천국 하다가 걸렸다더라.”

 

 끼익-

 

 육중한 방음문이 열렸다.

 가방을 멘 그녀는 반쯤 몸을 밖에 걸치고, 얼굴만 내밀어 말을 이었다.

 

 “빨리 가는 게 좋을걸. 집에 가버릴지도 몰라.”

 

 “1학년 반은 1층에 있잖아. 네가 가면서 불러!”

 

 “학원 늦었어- 내일 봐-”

 

쿵!

 

 문이 닫히고 방송실 안은 조용해졌다.

 

 “하...”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괜스레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다 녹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 밖 우중충한 하늘에선 힘없는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

 

 한숨을 한 번 더 쉬었다.

 중앙계단으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걸어, 1학년 3반으로 가면 된다.

 간단했다.

 뒷문에서 은채 좀 불러달라 하고, 방송실로 오라고 전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녹음실 문 옆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와이셔츠와 조끼를 정돈하고,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대충 만졌다.

 괜스레 입술을 활짝 열어 이를 확인한다.

 고춧가루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방송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아무도 없어 조용했다.

 수업이 끝나 대부분 집에 갔기도 했고, 방송실의 위치가 교무실 바로 옆인 덕이었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소문난 학생주임에게 걸려 귀가 늘어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심장 소리가 커졌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손바닥이 조금 축축해졌다.

 

 오른손을 들어 조끼 위로 왼쪽 가슴에 얹었다.

 

쿵- 쿵- 쿵-

 

 다급히 1층 남자 화장실로 후퇴한다.

 거울을 보니, 다행히 얼굴까지 벌게지진 않았다.

 심호흡하며 심장 소리가 줄어들길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1학년 3반으로 향했다.

 

 ‘은채 좀 불러줄래?’

 

 뭔가 널 좋아하는 선배가 왔다는 소문이 나지 않을까.

 

 ‘방송실 선배인데 은채 있어?’

 

 으스대는 것처럼 들릴까?

 

 ‘이은채 어디 있는 줄 알아?’

 

 성을 붙여 부르니 너무 딱딱한 것 같은데.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린 것은 결론적으로 소용없었다.

 

 복도에 그녀가 있었다.

 하얀 실내화 위로 늘씬하고 긴 다리는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무릎 위까지 살짝 올라간 교복 스커트.

 헐렁한 듯 보였던 와이셔츠는 위로 올라갈수록 반전처럼 오히려 작아 보였다.

 

 그녀는 오늘도 역시 답답했는지 교복 조끼는 입지 않았다.

 와이셔츠의 맨 윗단추가 풀어졌음에도, 그녀의 가슴께는 제법 답답해 보였다.

 

 천연 갈색의 생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그녀의 갸름하고 뾰족한 턱이 보였다.

 화사한 우윳빛의 피부 위로 또렷하게 분홍빛의 입술, 오뚝한 코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은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청순한 매력을 뿜어냈다.

 이은채였다.

 

 웃고 있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애써 다스렸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라, 해서 선배!”

 

 그녀가 손을 흔들어 아는 척을 했다.

 은채의 목에는 팔이 둘려 있었다.

 그녀보다 머리통이 두 개는 큰 남자가 은채에게 뒤에 매달리듯이 서 있었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저 녀석이 누군지는 알았다.

 옆 반의 송민준.

 소위 논다고 하는 녀석이었다.

 너무 줄여 터질 것 같은 바짓단이 안쓰러워 보였다.

 

 은채의 옆엔 다른 남자와 여자들이 많았다.

 전부 송민준과 같은 부류의 녀석들이었다.

 은채가 인사했기에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은 내게 쏠렸다.

 부담스러웠다.

 은채의 반에 오기 싫었던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은채가 거대한 목도리처럼 송민준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송민준이 아니꼬운 얼굴로 소위 ‘야려’ 보는 것이 느껴졌다.

 제 여자친구에게 접근하는 남자에게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문제는 이 녀석이 은채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은채는 남자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축젯날에 같이 놀 거야 말 거야? 우리 반 떡볶이 만드는데 놀러 와.”

 

 민준은 보란 듯이 날 무시하고 은채에게 다정하게 제안했다.

 솔직히 놀라웠다.

 민준은 평소 문장의 80%는 욕으로 채워져 있었다.

 저렇게 멀쩡한 말도 할 수 있었군.

 

 “너 나레이션 재녹음 아직 안 했다며.”

 

 나도 민준을 무시하고 은채에게 말했다.

 은채는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아, 맞아요. 바빠서 잊고 있었어요.”

 

 “끝나고 뒤풀이 노래방도 가자. 내가 쏠게.”

 

 “오늘까지는 녹음 끝내줘야 내가 편집할 수 있어. 방송실에 오늘 꼭 들려.”

 

 “네, 알았어요.”

 

 은채가 미소지으며 대답했고, 민준은 더욱 몸에 힘을 빼고 은채에게 매달렸다.

 그의 손이 어깨를 넘어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우주 노래방이 서비스를 거의 2시간 주니까...”

 

 “오늘 꼭 와야 해. 나도 저녁까지 영상 편집하느라 방송실에 있을 거니까 빨리 와서-”

 

퍽!

 

 느닷없이 민준의 커다란 발이 날아들었다.

 

 “시발, 방송반 새끼가 계속 말을 끊고 지랄...”

 

 나는 재빨리 팔짱을 풀고, 그의 다리를 붙잡아 막았다.

 충격이 크진 않았다.

 그래도 그의 더러운 실내화 바닥이 조끼에 자국을 남겼다.

 미친 새끼가 느닷없이 선빵을 갈겨?

 

 “뭘 꼴아봐, 씹새야.”

 

 민준이 살벌하게 으르렁댔다.

 

 “민준 오빠!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

 

 그때 은채가 눈살을 찌푸리며 민준에게 말했다.

 

 “애도 아니고, 말 끊었다고 화를 내고!”

 

 “아, 그... 그런 게 아니고.”

 

 민준이 순식간에 표정을 풀고 머리를 긁었다.

 흡사 암컷에게 잘 보이려는 고릴라와 같아 보였다.

 은채는 민준에겐 보이지 않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이따 봐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무리 사이로 들어간 은채를 보고, 뒤돌아 방송실로 돌아갔다.

 조끼에 선명히 찍힌 발자국은 손으로 세게 털어내니, 겨우 사라졌다.

 

 “양아치 새끼...”

 

 홀로 투덜대곤 소파에 앉아 힘을 풀었다.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쿠션이었다.

 물론 딱딱한 교실 의자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문 옆의 시계를 보니, 시간은 4시를 막 넘긴 뒤였다.

 

 영상 편집을 해야 했지만, 귀찮았다.

 사실, 1학년 3반에 다녀온 것만으로 매우 피곤했다.

 한숨 자고 할까.

 

 힘없이 탁자에 얼굴만 올려 엎드렸다.

 팔을 베면 잠에서 깼을 때 팔이 저렸다.

 차가운 탁자에 상기됐던 볼이 시원하게 식혀졌다.

 눈을 감고 어둠이 내려오자, 은채의 얼굴이 괜스레 떠올랐다.

 눈꺼풀 안에서 눈을 이리저리 돌려 그녀의 모습을 애써 지워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이 쏟아져 내렸다.

 

 

 “방송반을 어떻게 알게 됐나요?”

 

 동료들이 면접 질문을 던졌다.

 형식적이었다.

 질문은 정해져 있었어도, 채점의 기준은 없었다.

 전문성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방송반에서 뭘 바라겠는가.

 사실상 분위기 잡기에 가까웠다.

 

 불도 끄고, 방송용 조명만 켠 상태로 면접을 진행했다.

 그 분위기는 취조실 같다고 생각했다.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면접에 나도 형식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선배 중에 남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 걸 알아야 남자 지원자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짐짓 진지한 척 종이를 들여다보며 나는 공상에 빠졌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다음 사람 들어오세요.”

 

 동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문이 5번째 열렸을 때였다.

 코끝으로 싱그러운 향기가 스며들어왔다.

 미소를 절로 짓게 만드는 향기였다.

 나는 면접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1학년 3반 이은채입니다. 아나운서 지원입니다. 장래희망도 아나운서예요!”

 

 명랑한 목소리가 방송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면접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장기자랑 할 수 있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녀는 낯부끄러운 섹시 댄스를 췄다.

 그의 동급생들은 뒤집히며 웃어댔다.

 나는 일부러 은채 쪽을 보지 않았다.

 대놓고 보면 실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유명하던 ‘트러블 메이커’란 춤이었다.

 

 “잠깐, 은채 너 키가 몇이야?”

 

 한바탕 장기자랑이 끝났을 때, 동료 방송반 여자애 한 명이 은채에게 물었다.

 

 “저 173...이던가? 그래요.”

 

 “어? 해서 네가 172 아니야?”

 

 느닷없는 말의 화살이 나에게 돌아왔다.

 

 “맞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느닷없이 둘이 키를 재보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녀와 서로 엉덩이와 허리를 맞댈 때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허리와 목을 꼿꼿이 폈었다.

 

 “진짜 해서가 1cm 작다!”

 

 모두가 박장대소했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은채도 나를 보며 쑥스러운지 입을 가리고 키득댔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싱그러운 향기는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그것이 은채와의 첫 만남이었다.

 

 

 “음...”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잤는지는 몰라도 몸이 개운했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꺼풀 안에서 눈을 천천히 굴려 눈 운동을 한다.

 남아있는 잠기운을 빨리 쫓아내는 나만의 비법이었다.

 

 “큽...”

 

 웃음소리와 함께 싱그러운 딸기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리고 은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소파의 끝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엇...”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그녀가 똑같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언제부터 그녀가 날 지켜봤는지 궁금했다.

 아니 언제 방송실에 들어온 건지부터 궁금했다.

 

 “선배, 잘 잤어요?”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어?... 어...”

 

 얼버무리듯 대답하자, 은채는 입을 가리며 또 웃었다.

 그녀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선배, 얼굴 빨개졌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을 듣자, 얼굴에 열이 후끈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