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은채는 탁자에 팔을 올리고, 갸름한 턱을 제 손으로 괴면서 나를 바라봤다.

 

 “왜 얼굴 빨개졌어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다리를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붉은 입술을 따라가면 살짝 들어가 있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응?”

 

 장난기가 넘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몸이 절로 굳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에 가슴이 답답했고,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처럼 깨끗해졌다.

 

 애써 은채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항상 내 눈을 바라봤다.

 지기 싫은 마음에 나도 은채의 눈을 마주 본 적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3초도 안 돼 고개를 돌렸지만.

 그때부터, 일부러 놀리려는지 은채는 장난스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섯 시네... 편집해야겠다.”

 

 애써 말을 돌리고 기지개를 켰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파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었다.

 

 “나와줄래?”

 

 넌지시 묻는다.

 소파와 탁자는 바닥에 고정돼있었다.

 누군가 앉아있다면 지나갈 공간이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지나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비집고 가려면 신체접촉이 필연이었다.

 

 “흠...음...”

 

 은채는 느닷없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연신 타자를 두들겼다.

 

토독...독...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휴대폰은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

 지나가라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녀를 마주 본 자세로 간다면, 내 다리 사이가 그녀의 눈높이를 지나야 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엉덩이를 그녀에게 씰룩이며 지나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앓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짧게 은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휴대폰을 바라봤다.

 왠지 나만 부끄러워하는 거 같아 오기가 솟아났다.

 천천히 게걸음을 걸었다.

 그녀에게 엉덩이를 내민 채, 다리를 최대한 앞으로 내밀며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걸었다.

 

 그녀의 다리가 내 종아리에 닿았다.

 옷과 옷이 닿은 것뿐이다.

 교복 바지와, 검은 스타킹.

 지극히 평범한 접촉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때 엉덩이 쪽에 다른 접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푹신한 감촉이 그의 엉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지만 본능이 말해줬다.

 가슴.

 온몸으로 피가 빠르게 요동쳤고,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퍽!

 

 평정심을 잃고 놀라 무릎을 폈다가 탁자에 허벅지를 부딪치고 말았다.

 

 “윽...”

 

 가까스로 옆으로 빠져나와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문질러댔다.

 

 “풉... 하하... 선배 괜찮아요?”

 

 은채가 웃기 시작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분명히 고의였다.

 하지만 긴 속눈썹을 아래로 깔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화사한 얼굴을 보자, 조금이나마 들었던 원망이 눈이 녹듯 사라졌다.

 

 “비켜달라고 하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자, 보조개가 조금 파였다.

 장난기 넘치는 눈빛은 소악마와 같았다.

 그래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했었잖아.”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송 장비와 수많은 티비가 한쪽 벽에 있었다.

 그 앞에 놓인 의자 3개를 지나치면 가장 안쪽의 컴퓨터가 나왔다.

 평소엔 점심시간마다 음악 방송을 트는 용도였다.

 엔터키를 누르자, 잠들어있던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화면이 켜지고, 편집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캠코더로 찍었던 영상을 확인하다 보니, 부원들끼리 장난치던 영상도 섞여 있었다.

 

 스피커를 줄이고, 부원의 깜짝 생일 축하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에서 부원들은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환히 웃고 있는 은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감미로웠다.

 가수만큼 잘 부른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새가 즐겁게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했다.

 소리가 없었지만, 은채의 노랫소리는 머릿속에서 절로 울려 퍼졌다.

 

끼익-

 

 녹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alt’와 ‘f4’ 버튼에 올려져 있던 왼손을 재빨리 눌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집 프로그램을 조작했다.

 

 녹음실 바닥은 카펫이었다.

 천천히 걸으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은채가 걸어오고 있는 걸 알았다.

 그녀는,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선배 화난 건 아니죠?”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물론, 그녀도 정말 걱정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레이션 녹음은 했어?”

 

 “선배 잘 동안에 다 했죠.”

 

 마우스와 키보드를 눌러 동영상들을 프로그램 안으로 불러왔다.

 대화, 이어나가야지.

 

 “그럼, 집에 안 가?”

 

 “음...”

 

 타임라인에 인트로로 쓸 동영상을 올렸다.

 등교 시간을 찍은 동영상이었다.

 

 “네, 선배랑 같이 있으려고요.”

 

 손이 멈췄다.

 어쩌면 내 심장까지도.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등을 보는지 모니터를 보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괜스레 손에 땀이 고였다.

 

 “그래라.”

 

 망할.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평소의 음정을 이탈하고 널뛰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편집을 계속했다.

 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우스 클릭 소리.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소리가 삐걱거리면서 화음을 이뤘다.

 

 그리고 배경엔 내 숨소리가 깔렸고,

 은채의 숨소리도 잔잔히 들렸다.

 마음이 들떴다.

 

 방금 그녀의 장난스런 말에 설렜는지 몰랐다.

 아니면 녹음실이란 좁은 공간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현실이 떨리는 걸지도 몰랐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은채가 몸을 조금 돌렸다.

 뒤쪽의 티비를 향한 거겠지.

 손과 눈은 컴퓨터를 향해있지만, 온 신경은 그녀에게 집중했다.

 

 티비의 전원을 누르는 소리.

 오래된 티비에 전기가 돌며 나는 고주파 소리.

 무언가 꺼냈다.

 찰칵하고 들어가는 소리를 보아하니, 비디오였다.

 이내 티비에선 그녀가 튼 만화영화가 흘러나왔다.

 

 소리를 들으니, 무슨 만화영화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할머니의 모습이 돼버린 여주인공.

 저주를 풀기 위해 모험을 떠나다 마법사인 남주인공을 만난다.

 인기가 많았던 만화영화였다.

 

 “선배.”

 

 조금 있다가 은채가 입을 열었다.

 

 “응?”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뒤에는 낡은 티비에서 만화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선배는 하울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냐니.”

 

 “저런 남자가, 갑자기 치근덕대면 받아줘요?”

 

 “난 남잔데.”

 

 “그럼 하울 같은 여자라면?”

 

 그걸 왜 묻는 거야.

 팔짱을 꼈다.

 그래도 그녀가 던진 질문이니, 진지하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찰칵-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은채의 휴대폰이 날 향했다.

 그녀는 뭐가 즐거운지 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걸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선배 모습을 찍었어요. 완전 웃기다고요. 고민하는 선배 얼굴.”

 

 결국, 장난이었나.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편집 프로그램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문득, 마음속에서 궁금증 하나가 싹을 틔웠다.

 

 “그럼 너는?”

 

 넌지시 말을 꺼낸다.

 

 “너는, 하울 같은 남자가 좋아?”

 

 “네.”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본인이 관심이 있으니, 장난이라도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하울.

 쾌활하고, 신사답고, 유머 감각도 좋다.

 나와 닮은 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하나도 없었다.

 열어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큽...”

 

 가까이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놀라며 옆을 보니, 얼굴을 가까이한 은채가 입을 틀어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하하!”

 

 그리곤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또 속았다는 걸 알자, 부끄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그렇게 비에 쫄딱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 지으면... 큽... 어떡해요...”

 

 화가 날 법도 했다.

 하지만 환히 웃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고 싶을 만큼 설렜다.

 물론 그녀에게 웃는 모습을 찍어도 되냐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안 좋아해요. 하울, 바람둥이로 유명하잖아요. 난 한 사람만 봐주는 사람이랑 사귈 거야.”

 

 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녀가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다는 소리로 들렸으니까.

 

 “선배는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에요?”

 

 느닷없는 질문.

 방금 은채도 은연중에 이상형을 말했으니 예상할만한 질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상형’이란 글자를 듣자마자, 은채가 떠오른 탓이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면 돼.”

 

 “헐- 눈 되게 낮다. 게다가 바보 같아요.”

 

 은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낭만 있네요.”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흠... 그럼 선배 여자친구 없겠네요.”

 

 “없어.”

 

 “설마 모쏠?”

 

 “아니야.”

 

 “어 화낸다.”

 

 “화난 거 아니야.”

 

 은채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랑 사귀어봤는데요?”

 

 말한다고 은채가 알 리가 없었다.

 처음으로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녀에게 연애담을 말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선배 막 초등학생 때 사귄 거로 모쏠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죠?”

 

 이젠 말할 수 없어졌다.

 입을 꾹 다물자, 은채가 다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약이 올라 은채를 바라보고 반박했다.

 

 “그러는 넌, 남자친구 없어?”

 

 “없어요.”

 

 내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은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똑같다는 말하려는 건 아니죠? 나는 안 사귀는 거예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처럼 매력 있는 여자가 좋다고 달려드는 남자들은 차고 넘칠 테니까.

 이를테면, 송민준처럼.

 

 “송민준은? 너 졸졸 쫓아다니는 거 같던데.”

 

 물어보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괜스레 그 고릴라 자식을 의식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은채가 잠시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 게슴츠레 나를 흘겨보았다.

 

 “민준 오빠가 신경 쓰여요?”

 

 “아니.”

 

 난 필사적으로 거짓말했다.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듯한 은채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안 통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 절대 싫어요. 머릿속에 허세만 가득해서. 그러고 건들건들하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줄 알잖아요. 없어 보일 뿐인데.”

 

 왠지 시원하면서 안심이 됐다.

 난 속으로 송민준에게 애도를 보냈다.

 네가 백날 매달려봐야 은채는 관심이 없단다.

 

 “그리고.”

 

 은채가 다리를 천천히 꼬고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충격 발언에 멍하니 은채를 바라봤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의 볼에 홍조가 들었다.

 그녀는 의자를 옆으로 빙글 돌려 티비를 바라봤다.

 

 만화영화에선 하늘에서 추락하는 주인공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 마음도 그랬다.

 

 누굴 좋아하는 거지?

 역시 어울리는 무리 중 한 명인가?

 아니 어쩌면, 나는 전혀 모르는 어딘가의 번듯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은채에게 대시했던 사람이라던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다시 눈이 모니터를 바라보곤 있었지만, 집중은 되지 않았다.

 

 “선배, 지갑 좀 보여줄래요?”

 

 주머니에서 멍하니 지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하얀 도화지에 스며든 은채의 말을 지워 내려 애를 썼다.

 

 “와... 선배...”

 

 그때 은채의 부름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더니, 은채는 작은 포장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정사각형.

 찢기 쉽게 지그재그로 나 있는 모서리.

 둥그런 가장자리가 포장지 밖으로도 도드라져,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콘돔이었다.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다 편의점에서 콘돔 사 오는 내기를 했던 기억.

 당당히 콘돔을 구매하고 웃어댔던 기억.

 콘돔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니면,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을 친구가 말한 기억.

 그 자리에서 하나씩 콘돔을 나눠 가져 지갑 속에 넣었던 기억까지.

 

 “선배... 변태예요?”

 

 은채의 목소리 끝이 내 마음처럼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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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도 처음 야스씬도 처음이라 3화 언제 나올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