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는 석조 건물의 사이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쳐 들었다. 제법 운치있는 광경이다.

무너져 내린 게 내 집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또냐?"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용사라는 놈들은 앞뒤 분간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든다. 저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은 철저히 챙기면서 내 재산권은 존중을 안한다.


환생자, 남궁형은 억울했다. 벌써 이게 3번째 환생이었다. 지구의 첫번째 생, 전재산 박은 도지코인이 나락간 나머지, 마포대교 난간에 서서 자살할 용기를 충전하던 중 어떤 급식새끼가 낄낄거리며 장난이랍시고 진짜로 밀어버렸다.


두번째 생, 검마의 아들로 태어나 차기 천마의 신분에서 경합을 벌이다. 사형이 안부 삼아 보낸 화산파의 살수의 손에 당했다.


'화경의 고수를 어떻게 이기라고...'


그것도 서러운데 그 미친새끼는 죽기 직전 제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


점점 사라져가는 의식 사이에 울컥울컥 역류하는 피맛, 그리고 매화향이 느껴졌다면 기분 탓이었겠지...

거기에 이번엔 마족이라고 불리는 미움받는 종족으로 환생까지 하다니.


공명심을 품고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작자들. 차라리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내가 뭘 잘못했나 따져 보아도 크게 잘못한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지들이 내 영토에 쳐들어와선 약탈해가려 하길래, 머리에 열이 뻗쳐 격살했을 뿐인데.

그래놓고는 작자들의 교단에선 사악하고 잔혹한 존재라며 내 탓을 하다니, 형편이 너무 좋지 않은가.


지금도 그렇다.


"크흐읏...... 죽여라."


언뜻 보아도 신성한 아우라를 풍기는 백색의 갑주, 빛나는 금발과 짙푸른 청안.

척 보기에도 고귀해보이는 여자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사라고 불리는 교단의 정예병력. 마기와는 상극인 신성력이라는 기이한 힘을 쓰는 살수들이었다.


"아니, 안 죽인다."

"하! 그러면 날 어쩔 셈이지? 미개한 마족놈, 이 몸을 능욕이라도 할 셈이냐?"

"미개한 마족한테 제압 당한 용사님 이라니, 알 만하군."


이죽이는 자신의 말에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전해온 주제에 굴복 시킨 것도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


'마왕...'


교단에서 절대 악으로 규정한 자였다. 마계 정벌 방해의 일등 공신, 수 많은 자들을 도륙한 마족 남성. 저자의 목에만 2천만 골드가 걸려있었다.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 살아야 가문을 일으킨다.


실비아 에슈타인. 여자의 이름이었다. 가문이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 상심에 젖은 아버지는 술만 줄창 퍼 마시고 있다. 어머니도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듯 아직도 몽상에 살고 계신다.


이천만 골드면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도 남는다. 하지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크흑, 죽여 버릴 거다."

"오호. 그것 참 기대되는데."


악에 받친 실비아의 말에 마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 봤자 힘이 빠져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자가 두려울 리가. 


'어차피 죽는다면 자존심이라도 챙긴다.'


결사적인 저항 의지를 표현하려 애써 고개를 들어 그의 발치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하, 이년이 선을 넘네."


그녀의 도발이 성공했다. 다른 방향으로.


"넌 살려서 두고두고 조진다."



남궁형은 절친한 친우 색마가 쓰던 미약의 제조법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