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설화


신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장붕이라면 대부분 내용 정도는 꿰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돌고 돌아, 결국 오이디푸스라는 무고한 청년을 파멸시킨 이야기인데


우리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자


정말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필연적이었을까?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 내에서 '예언'이 지닌 위력을 논하며 당연히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할 장붕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예언이 정말 "오이디푸스는 파멸한다"고 선을 긋던가?


아니다. 예언이 가리키는 사실은 오직 하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는 전제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이 때문에 파멸할 거라던지, 패륜아로 욕 먹으며 비참한 말로를 맞을 거라는 내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가 파멸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 예언이 진실로 이루어졌다는 걸 자기 손으로 입증하고 말았기 때문



이해가 안 된다면, 우선 이야기를 과거로 한번 돌려보자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혼인한 이후,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어진 왕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심지어 친부모로 알고 있던 코린토스의 국왕 부부가 서거한 후, 예언에서 벗어났다고 안심하며 마음도 놓았다


그런 그가 예언의 진상을 파헤치도록 몰고 간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테베에 갑자기 돌기 시작한 역병이었다. 근친상간에 대한 징벌로 내린 끔찍한 재앙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재앙이 내렸는지 조사하다가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처벌하면 재앙이 물러간다"는 신탁을 받았고


그래서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역추적하다 보니 그만 오이디푸스의 정체와 기원이 낱낱이 밝혀진 것



사실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는 어렴풋이 그의 정체를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갓난아기 때 버려진 친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다"는 예언을 받은 걸 알았던 데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수상한 증거와 물증이 속속들이 나왔기 때문


하지만 오이디푸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오카스테는 진상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았고


남편을 설득해 이를 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절망감과 수치심에 그만 자결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놀랍게도 이오카스테에게는 이 모든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어느 한 존재에게 기도를 올려 부디 기발한 해결책을 내려달라고 간청할 수도 있었던 것


그게 누구일까?



바로 제우스의 아내이자 가정의 여신인 '헤라'다


이오카스테의 전남편인 라이오스가 테베를 통치하던 시절, 헤라는 테베에 스핑크스(Sphinx)라는 괴물을 보내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게 한다


난폭하고 방탕한 난봉꾼 라이오스는 매일 바람을 피며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이에 가정의 여신이었던 헤라가 분노하여 테베를 아예 말려죽이고자 스핑크스를 파견한 것


이 스핑크스를 물리칠 수 있는 신탁을 받으러 가다가 청년 오이디푸스와 시비가 걸려서 라이오스가 살해를 당하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


라이오스를 죽인 후,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와 수수께끼 대결을 벌여 승리했고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세 발, 저녁에는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스핑크스를 물리친 영웅으로 대접 받으며 과부가 된 이오카스테와 혼인해서 테베의 왕으로 즉위한다



한데 오이디푸스가 과연 혼자만의 힘으로 수수께끼 대결에서 승리했을까?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와 맞붙기 전, 늙은 노파로 변장하여 그의 인성 테스트를 실시한 여신이 있다


그게 바로 헤라 본인이었던 것


다시 말해 헤라는 오이디푸스라는 젊은 영웅을 꽤나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고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스핑크스를 물리친 후, 테베를 향한 저주를 풀었던 것이다


그럼 헤라는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걸 몰랐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당장 이오카스테 본인이 스핑크스를 죽이는 자와 재혼하겠다고 방방곳곳에 광고를 내건 상황이었고


오이디푸스 본인도 "스핑크스 죽이고 왕비와 결혼하러 간다"라고 진작에 실토했으니 말이다


물론 근친상간 자체가 가정 윤리를 끔찍하게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지만


생각 외로 근친이 꽤나 흔하게 벌어지던 시절이기도 하고(제우스는 엄마인 레아, 할머니인 가이아랑도 했다)


무엇보다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와는 달리 지극히 가정적이고 상냥했던 1티어 남편감이었다


화목한 가정을 수호하는 헤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100점짜리 신도였던 셈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와 자신의 혈연 관계를 깨닫은 이오카스테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헤라의 신전으로 달려가 제발 이 역병을 멈춰 달라고, 그래서 계속 화목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비는 것이다


라이오스와는 달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는 중인 아들의 행복을 제발 지켜달라고 말이다


역병만 끝나면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조사할 이유도 사라지고


그럼 당연히 자신과 남편 간의 끔찍한 근친상간 관계가 드러날 이유도 사라질 테니까


즉 예언 자체는 이루어졌으되, 이를 불문에 부치고 오이디푸스와 계속 금단의 관계를 지속할 수도 있었던 것


물론 이오카스테의 정체를 모르는 오이디푸스를 기만하는 꼴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가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랑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보다는 덜 비참한 운명일 터


그럼 오이디푸스는 최소한 생전에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행복한 삶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이 가능성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가 아는 비극 설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가능성을 논하다 보면 오히려 더 씁쓸해지는 게 사실이기는 하다


"불행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묻는 행위 자체가 설화의 비극성을 한층 돋보이게 하니까


그래도 어떤 것이 되었든 해피엔딩을 망상하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니겠는가?


오이디푸스를 향해 그저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