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내가 눈을 뜨자 텅 빈 햐안 공간이었다.

둘, 확실치는 않지만 차에 치여 정신을 잃자 이런 공간에 오게 된것 같았다.

셋, 그리고 이곳에서 자칭 여신이라는 자를 만났다.


이게 지금까지의 상황 정리. 나는 나름대로 현 상황에 대해 깔끔한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당황스러웠으나 허둥대지는 않았다. 그야 이 공간이 내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거라는 증거는 어디 있으리요, 이 모든게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으리니.


사실 이 공간과 저 앞의 자칭 여신조차 차에 치여 수용량 이상의 고통을 느낀 내 뇌가 고통을 잊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보증은 어디있는가.


그렇게 침착을 되찾고는 주변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내 앞에 있던 자칭 여신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해왔다.


"어... 이번 사람은 좀 이상한것 같은데..?"

"무엇이?"

"으음.. 뭐 됐나. 우선 말씀드리지요. 저는 데메테르. 자칭이 아닌 농업과 풍요, 다산의 여신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경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자칭 여신-무려 다섯번이나 자기가 신이라는 말을 했다!-의 오만한 발언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기가 신이라니.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자칭 여신이라는 자가 발끈 하며 소리쳐왔다.


"그러니까 자칭이 아니라고 방금-"

"증거는 바라지 않겠다. 신은 증거가 없기에 존재하며, 증명되는것이 아닌 요청되는것이기 때문이다."
"에..?"


정말이지 멍청한 반응.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것을 느꼈다. 이러고도 자기가 신이라고?

하지만 참을 인 세번이면 살인멸구도 면한다 하였으니, 나는 턱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꾹 누르며 그러나- 라고 말하고 말을 시작했다.


"만약 네가 확실히 여신이라 함은, 묻겠다. 그러하다면 당신은 지엄하고 지선하며 전능하고 전지한가?"
"뭐요? 멍청!? 하.. 아니에요 말을 말죠. 네. 저는 여신이 맞아요. 이건 틀림 없어요."
"그렇다면 너는 신이 아니다.

하나, 너는 방금 내가 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이를 벌하지 않았다. 지엄하지 않다.

둘, 또 내가 이럴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했음에도 벌하지 않았다. 전지하지 않다.

셋, 또 내가 이렇게 말하는것을 막지 않는다. 전능하지 않다.

하지만 넷, 이 모든게 선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으니 지선은 확신할 수 없다."
"흥.. 첫번째부터 세번째까지는 전부 틀렸지만 마지막 만큼은 맞는 말을 했으니 이 불신자적인 태도도 제가 특 별 히 용서해드리죠."


그렇게 말한 자칭 여신은 잠깐 질렸다는듯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뭔가 생각났다는듯 다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다신교의 신이 지엄하고 지선하며 전지하고 전능할리 없잖아. 그런건 일신교에서나 찾지 왜 나한테 난리람?"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태도. 하지만 나는 친히 내 신앙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신이 아니다. 신이 지엄하지도 지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다면, 그것은 그저 능력좋은 인간일 뿐이요.

그러니 너. 신을 자처하여 인간에게 요청되는 신의 위상을 더럽히지 말지어니, 신앙의 존재를 의심케 하지 말아라. 이는 분명한 신성모독의 행위이며 이단이고, 배교에 해당하는 행위임을 잊지말라."

(그거 너 존나 능력 없다는 뜻이잖아. 니가 그러고도 신이냐?)


이단, 배교, 신성 모독. 신을 자처하는 자이라면 절대 참지 말아야 하는것 세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자 자칭 여신의 얼굴이 단번에 흉신악살처럼 구겨졌다. 하하. 그러셔야지. 신을 자처했다면, 응당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을 받아야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이런 내 생각조차 읽고 있을 자칭 여신이라는 존재여. 내 신앙에 대한 그대의 대답은 무엇이지?


나는 생각으로 물었다. 그러자 자칭 여신이 답했다. 이제까지의 가벼운 태도에 비해 조금 무거운 태도로 말이다.


"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신은 인간의 믿음과 관계 없이 오롯이 존재하는 자이니.


헌데 한가지 의문이라면 어찌하여 너는 사물을 보고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닌, 정의를 내리고 사물을 바라보는가?


예를 들어 너는 엘프가 채식을 안한다던가 고블린이 키가 크다던가 하는 이유로 그들을 엘프나 고블린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냐?"
(니가 무슨 신을 믿던 걔는 내가 아니니까 멋대로 니 잣대 들이밀지 마라.


그리고 니가 뭔데 내 존재를 정의해? 뭐? 지엄 지선 전지 전능하지 않으면 신이 아니야?? 


하! 어이 없어서 정말. 니 말대로라면 키 크면 고블린 아니고 채식 안하면 엘프 아니겠네!?)


자칭 여신이 답했으나, 내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은은한 노끼가 느껴지는 자칭 여신의 모습에 나는 씨익 하고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러자 내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여신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내가 빨랐다.


나는 여신에 말에 대한 반박을 내놓았다.


"신은 이미 요청되어있다. 재단되어있다. 정의되어있다. 이는 인간들이 '바라는' 신의 모습이며 이상향과도 같다. 나는 신이 실존한다고도 실존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며, 한낱 인간인 내가 신의 존재를 확증,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내 배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을 보면 물이라고 한다. 이것에 이유가 있는가? 있다. 사회적으로 그렇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흙탕물을 보든, 녹조에 가득한 물을 보든, 바닷물을 보든 한가지로 묶어 물이라 부른다. 오랜 시간 전부터 그렇게 불려왔고 약속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약속'되어온 '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이제까지 약속되어온 신이란 전지하고 전능하며 지엄하고 지선하다. 이는 다신교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으나 분명히 이 사실만은 공유하고 있다.


아니라고?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지. 여기서 신들은 자신의 관할영역에서 만큼은 전능하며 전지하며 지엄하고 지선하다. 그 모든 신들을 하나로 묶어 합치면 무엇이 되는가? 그래. 전지 전능 지엄 지선. 유일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신앙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해야지만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신이여, 그대의 신앙을 내게 요청하지 말지어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의 법을 따라야하지만 그리스에서 그리스의 신을 따라야한다면 많은 종교인들이 순교하리, 내게 그리스의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오롯이 인간이며, 그렇기에 신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 한다. 설령 그대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인간은 멍청하고 이기적이며 자기가 믿고싶은것만 믿는 생물이니, 내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으리요. 설령 내가 믿는것이 거짓된 신이더라도 어둠으로 가득찬 고행의 길을 지나 이 목숨 바쳐 믿을 준비가 되어있느니라.


그러니 자칭 여신이여, 그대가 태초부터 인간의 믿음과 상관없이 존재해온 자이더라도 그것은 신의 증명이 되지 않음을 알아라. 그대는 여전히 이단이며, 신성 모독을 하고 있고, 배교하고 있음을. 당신은 비록 초월자는 될 수 있을지라도 절대로 신이 될 수는 없을지어니."
(일단 하나 확실하게 말하고 가는데 나도 신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나도 멍청하거든. 그러니까 내 상식선에서 말할게?


아까 고블린이 키 크면 고블린 아니고 채식 안하면 엘프 아니라고 했던가? 전혀 아니거든? 바닷물이든 흙탕물이든 썩은 물이든 다 물이라고 부르지? 그야 물처럼 생긴걸 보면 그렇게 부르기로 다들 했으니까 그렇게 부르는거야. 조금 특이하더라도 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으면 같은거라고 취급해준다고.


근데 넌 아니잖아. 넌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지선하지도 지엄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신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아 뭐 그래, 여기는 이세계고 넌 이세계에서는 신일지도 모르지. 근데 그게 어쨋다고. 인간이 인간에게 법은 강제할 수 있어도 신앙을 강제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나는 좆까고 내가 믿던 신을 진짜라고 믿을거다.


한마디로 너는 가짜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어디서 신인척 행세야?)


부들부들 자칭 여신이 어깨를 떨었다. 아마도 분노하고 있는것 같은데. 아.. 조금 아쉽다.

토론(을 가장한 말싸움)은 언제나 즐거워서 계속 하고 싶었으니까. 사실 내 입장에선 자칭 여신이 내 말에 또 반박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여신은 그런 내 바람을 이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바램과는 정 반대로 뿔이 잔뜩 나서는 내게 소리쳐왔다.


"그래 이 씨발 인간놈아! 꺼져! 아 진짜 웬 좆같은 새끼가 걸려서.. 너는 평생 저주다! 메롱이다 개새끼야!"


띠링!


[농업과 풍요, 다산의 여신이 당신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땅이 분노합니다! 모든 대지모를 섬기는 신도들은 당신에게 적의를 가지게 됩니다!]


[어머니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수가 동조합니다! 모든 엘프가 당신에게 적의를 가지게 됩니다!]


[작은 산의 분노가 맥동합니다! 땅에서 태어나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드워프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가지게 됩니다!]


[여신의 충실한 종인 땅의 정령들이 명령을 받듭니다! 땅의정령은 이제 당신을 보면 바로 공격할 것입니다!]


[땅의 축복 아래 자라난 아이가 눈을 뜹니다! 수인들은 당신에게 적의를 가지게 됩니다!]


[분노한 여신의 저주가 영혼 깊숙히 깃듭니다! 기근의 저주(EX), 역병의 저주(EX), 전쟁의 저주(EX)가 당신에게 내립니다!]

[이름 : 기근의 저주(EX)

설명 : 당신에게 분노한 여신이 내린 저주. 그 원한이 깊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효과 : 당신의 근처의 식물은 모두 즉시 썩어버린다. 이는 이미 수확되었거나 조리된 식물도 포함이며 그렇게 썩은 식물은 땅에 스며들어 그 땅을 병들게 한다.]

[이름 : 역병의 저주(EX)

설명 : 당신에게 분노한 여신이 내린 저주. 그 원한이 깊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효과 : 당신의 손에 닿은 모든 생명이 병들고 썩어가게 된다. 이는 남녀노소 육상, 창공, 바다를 가리지 않고 포함한다.]


[이름 : 전쟁의 저주(EX)

설명 : 당신에게 분노한 여신이 내린 저주. 그 원한이 깊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효과 : 당신은 불임한다. 당신은 전쟁을 멈출 수 없다. 일생을 치열한 투쟁 속에서 보내야 하며 사랑은 꿈꿀 수 없다. 살육은 당신의 친구이며 당신에게 평화란 장군 없는 전쟁과 같을것이다.]


"어?"


"어휴 좆같은 새끼! 어디 한번 죽어봐라! 너는 내가 특 별 히 출세조차 할 수 없도록 여자로 바꿔줄게."


자칭 여신을 놀리려던것은 맞다. 하지만 그게 이러려던건 아니었는데..?

일단 머리를 식힌다. 자칭 여신의 말에서 정보를 축출해낸다.


특 별 히 출세하지 못하게 여자로.. 일단 TS는 확정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자가 출세하지 못 하는 세기인데..


여자가 출세하지 못 하는 세기는 분명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좆세계물이 그렇듯, 아마 이 곳 또한 중세 시대일 확률이 높을터.

만약 아니라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 일단 중세 시대라고 가정하면 나는 자칭 여신의 말에서 아래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중세시대, TS, 게다가 여신의 흉악한 저주 세가지, 거의 모든 종족에게 적대적.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찌보아도 흉악한 조건. 아무리 봐도 그냥 죽으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보를 침착하게 정리하던 나는 느꼈다.


'할만한데?' 라고.


그렇게 생각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니 대체 언제 끌려가는- 까지 생각했을때 나는 정신을 잃었고, 이후 내가 정신을 차리자 숲속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주변 모든게 죽어버린 숲 속이라고 해야하나? 정확히 나를 중심으로 반경 약 10m정도의 모든 식물이 죽어 있었다.

아마 확실하게 [기근의 저주(EX)] 때문인것 같은데.. 이야. 저주 이거 성능이 굉장하구만?


나는 죽여주는 여신의 저주의 위력을 바스라진 잔디들로 체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몸을 내려다보니, 변한 몸은 분명한 여성의 것. 역시나 TS는 확정이구나. 작가 집필 동기가 TS 였을까? 하던 생각도 잠시.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 있는 내 모습에 나는 괜히 혀를 쯧 차며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저주까지 내리면서 쫓아내듯이 여기로 보낸 여신이 친절하게 옷까지 챙겨주는게 이상한가.


괜히 멋쩍은 시선으로 하늘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옆쪽에서 다 죽어가는 수풀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웬 동물가죽으로 만든 거적대기를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우, 이 주변은 뭔데 풀이 다 죽어있냐 무섭게.. 대장은 또 왜 나한테만 이런걸 시키고 지랄이야!"


생김새를 보아하니, 아마도 산적.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찍 이쪽을 눈치 못 챈 것일터.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 행동의 목적 자체는 분명 은엄폐를 위한 행동이었으나. 바스락- 하고 말라 비틀어진 풀이 밟히는 소리가 허공에 울린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생각했다. 이런 빌어먹을 풀때기가. 이 빌어먹을 풀때기 덕에 나는 은엄폐를 위해 숙이던 자세 그대로 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완전히 죽어버려 바싹 말라버린 풀이 내 생각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덕에 다른 곳이나 보고 있던 산적의 이목을 단번에 끌어버렸기 때문이다.


"응? 뭐야?"


산적은 그렇게 말하며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시선은 쭈우욱 늘어나 이내 반쯤 수구린 자세로 이도저도 못 하고 있던 나에게까지 닿았다.


"·····."

"·····."


이어진 것은 어색한 시선 맞춤. 순간 당황해서 눈이 마주진 도적의 몸이 굳었을 때.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는  비효율적이게 다시 자세를 다잡는 대신 어정쩡하게 자세를 숙이던 자세 그대로 아래로 파고들듯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지금은 분명한 전투 상황. 자세를 다잡는 그런 시간조차 사치인 황금의 시간이다. 아까 확인한 바 저 도적은 허리춤에 도끼같은것을 차고 있었고, 이쪽은 완전히 맨몸이었으며, 심지어 단련이 안된 여성의 몸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내 행동은 빨랐고, 도적은 내 빠른 행동에 놀란 것인지 눈동자가 한껏 커지고 흉통이 부풀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판단했다. 아니, 놀란게 아니었군. 무언가를 직감한 나는 혀를 쯧 찼다.


동공이 확장되고 흉통이 부푼다. 보통 이 모든것이 가르키는것은 단 하나. 저 도적은 아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소리쳐 다른 일행에게 알리려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안되지. 그렇게 되면 하나도 천운이 따라야 물리칠 수 있을 무장 도적을 단체로 상대해야 될 터.

그것은 절대로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아니, 오히려 속도를 더 올렸다.


타탁 타닥 탁-! 도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약 2미터 정도 남았을 때 나는 앞으로 뛰었다. 달리기가 아니고 점프 말이다.

이에 깜짝 놀란 도적이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미 늦었어."


타탓- 팟, 뻐억! 아마 도적이 보고 들은 것은 이 소리와 함께 찾아온 갑작스러운 고통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야 약 1.2초였으니까.

이 도적이 나와 마주치고 전투를 시작했다가 그대로 명치를 맞고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말이다.


나는 도적의 쇠사슬 갑옷을 전력으로 들이 받아 얼얼한 어깨를 대충 주물렀다. 그제야 비 정상적으로 가속되었던 사고가 원래의 속도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것으로 확신했다. 자칭 여신이 내게 저주랍시고 주었던 축복, [전쟁의 저주(EX)]는 방금 전까지 일반인이었던 내가 살인도 폭력도 두려워 하지 않게 해주며 전투의 스페셜 리스트가 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럼 다음은 [역병의 저주(EX)]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쓰러진 도적의 팔에 손을 대어 보려던 그때.


"뭐지? 네녀석은 누구냐. 우리 막내를 무슨 속셈으로 때려눕힌거지."


딱 봐도 '나 대장이요-' 하는 놈이 휙 나타나 목 옆에 창을 들이댔다. 어떻게? 따위의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목숨줄이 저 대장에게 잡힌 상황이니 이대로 행동 한번 잘 못하면 목이 날아갈 터.


나는 즉시 손을 대려던 행동을 파기하고 목 위로 양손을 올리며 천천히 물러났다. 상황 불문 국적 불문 분명한 항복의 표식.

도적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말을 이끌고 나를 천천히 압박하며 다가왔다.


도르르, 내 눈이 굴렀다. 이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말을 타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기동성이 특출나게 빠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쓰러뜨린 이 녀석. 막내라고 했던가? 이 녀석은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

말은, 중세 시대엔 특히나 비싸다. 어디서 훔치는 거면 몰라도 그리 수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장 포함, 수뇌부 정도로 당장 지원 올 수 있는 녀석의 수를 간추릴 수 있을터.


적어도 당장 대량으로 둘러쌓일 일은 없으며 시간을 끌 수록 불리해지는건 이쪽이라는 뜻이다.


그럼 우선 이 말을 어떻게 해야한다.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말은 기동성이 빠르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인간 대 인간 싸움에서 말도 안되는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의 역할 또한 한다.


당장 말을 탄것과 안 탄것의 차이는 무기의 길이 약 1.2m 차이다.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르는 것과 내려서 휘두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나는 목 바로 앞까지 들어온 창을 보고서 생각했다.


저 대장이라는 녀석이 내가 쓰러뜨린 막내 녀석을 확인하려고 시야를 돌리는 순간, 그 짧은 틈에 말에 다리를 걸 것이다.


미친 짓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인간이 말 다리를 걷어 찬다는건 역으로 차여서 죽고 싶다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기이할 정도로 이 무식한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전쟁의 저주(EX)]가 내게 죽음을 종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불안 때문에 여기서 순순히 투항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100% 노예, 아니면 노리개다. 최악의 경우, 끝까지 강간당하다가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차라리 반항하다가 죽는것이 나은 것이다.


판단은 끝났다. 내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해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대장의 시선이 천천히 막내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속으로 카운트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지금!


대장의 시선이 돌아가자마자 나는 내 몸을 회전시키듯 움직여 내 목을 창날에서 멀어지게 했다. 내 움직임을 느낀 창날이 뒤늦게 쐬액- 허공을 가르지만, 이미 늦었다. 내 몸은 창날의 궤도에서는 벗어났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몸을 원심력에 맞기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피식 웃었다. 그야, 이제 미친짓을 할 시간이지!

나는 미소를 숨기지 못 한채로 그 회전력을 그대로를 전부 이용하여 말의 다리를 걷어 찼다.


"흡!"


한껏 힘을 주기 위해 숨을 참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빠각! 발 끝에 걸린 말의 뼈가 완전히 부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반응은 그 즉시 왔다.


"히이이이잉!"

"뭣?! 발차기로 말을 쓰러-"


내 전력 킥에 다리가 반으로 죽은 말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쓰러졌고 그 덕분에 그 위에 타고 있던 대장이라는 작자는 당황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낙마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낙마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낙마 이후 낙법으로 충격을 줄였다거나, 말에 깔리지 않았다는 모든 운적인 요소를 고려하면 저 대장이라는 작자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6.8초.


나는 씨익 하고 화끈한 미소를 지었다.

6.8초. 무기를 챙기기엔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타다닥, 아주 얼큰하게 욱신거리는 오른 다리를 아드레날린으로 억지로 움직여가며 나는 쓰러진 막내라는 녀석에게서 미리 보아둔 작은 손 도끼를 강탈했다.


여기까지 약 2.3초.


이제 남은 시간은, 4.5초.


다시 달린다. 바스라진 풀을 지나친다. 넘어진 말을 넘어선다. 여기까지 3.4초.


남은 시간은 1.1초.


나는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며 도적 대장에 목에 도끼를 가져다 대었다.


"체크 메이트."


이때 나의 모습은 알 수 없을 테지만 나는 분명 입이 찢어질듯 웃고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후는 속전 속결이었다. 그저 매복, 살해. 매복, 살해의 반복이었다. 특히 나는 이 과정에서 [역병의 저주(EX)]의 위력까지 확인 할 수 있었다.


"끄르르르륵!"

"오..."


생명체라면, 내 맨손이 자신의 맨살에 닿는 순간 거품을 물며 발작하다가 죽어버렸다. 그냥 즉사기. 닿는 순간 게임 오버였다.

이게 여신의 분노(진)의 위력인가.. 나는 감탄하며 자칭 여신에게 삼삼한 감사의 말을 보내며 내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어디가냐?"


그런 내 말에 시체인척 하며 숨죽이고 있던 막내라는 녀석이 크게 움찔거렸다.

정말 모를 줄 알았던건가? 거의 10초마다 손 위치가 달라져 있는 시체가 세상에 어디있다고.


뭐 일부러 살려두기까지 했으니까. 나는 도적들에게서 약탈한 가죽 장갑을 손 끝까지 당겨 쓰며 끝까지 쓰러져 죽은 척 하려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히이이이이익! 히익 히이익!!!"

"아이, 안죽어 임마."

"손! 그 손!!"

"아니 장갑 꼈다니까?"

"아.. 장갑끼면 멀쩡한..?"


푸흐흐, 하고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본건 있어가지고, 내 손에 닿으면 게거품을 물며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근데 나도 나름 실험을 해봤다고. 우선, [역병의 저주(EX)]는 무조건 맨살과 맨살이 맞닿아야만 발동한다.


일단 닿기만 하면 즉사.. 인것 같지만. 풀 플레이트 철갑을 입은 녀석들은 어찌해야할지.. 나름대로 걱정거리도 생겼다.

뭐, 그냥 손이 닿을 때마다 죽지 않는다는건 어찌 보면 장점이려나? 친구랑 악수했다가 그 녀석이 죽어버리면 엄청나게 곤란할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이제는 도망치려는 생각도 안하는 막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야 가까운 마을로 안내. 오키?"

"네, 네!"


주인공들 보면 꼭 뒷골목 같은데 가서 건달들 때려눕히고 꼬봉 구하던데, 왜 그러는지 알 것같다.

이야, 자동 네비게이션 편하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