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등장인물끼리도 호칭을 나, 그 와 같은 대명사로만 부릅니다.

이는 작품에서 의도된 것이니 읽는 도중에 불편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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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심장판막질환으로 인한 심근 기능저하.


이것이 내가 지금 학교가 아닌 병원에 있는 이유이다.


보편적인 수술로는 이미 해결이 불가능한 수준이어서 심장이식을 해야한다고 의사는 얘기했지만 내 몸에 맞는 심장을 구할수도 없었다.


심장이식은 다른 장기와는 다르게 오직 뇌사자에게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밤새워 기증자를 수소문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들려오는 소식은 없다.


나날이 숨통을 죄여오는 고통과 불안속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며칠이었을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인지, 나만 괴로워야 하는 현실에 대한 반항인지는 나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있었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병원의 옥상 난간은 한창 스릴을 즐길 시기인 17세의 여고생조차도 다리의 떨림을 감출 수 없는 곳이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아찔할 정도의 높이가 더욱 체감됐다.


그때였다.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걸어온 것은.


"당신, 자살하려고?"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흰 색 가운을 걸친 남자가 서있었다.


보아하니 의사인 것 같았다.


나이는 많아봐야 20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저 나이라면 아마 레지던트일 것이다.


어떻게 의사가 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입원한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의사들을 봐와서 대충은 알고 있다.


호주머니에 무언가 뭉툭하게 담긴 것을 보아하니 담배를 피우러 올라온 모양이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이미 반응한 뒤였다.


"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한 대답이었다. 어째서 부정하지 않았을까.


난간 위에 서있거나 걸터앉아 있던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바람을 쐬고 있었다는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것 쯤 쉬운 일이었을텐데.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도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놀란건 내 쪽이었다. 내 대답을 듣고 남자가 한 말 때문이었다.


"그럼 나한테 하루만 빌려줄 수 있나?"


그렇게 나와 그의 하루가 시작됐다.


* * *

아침 8시부터 병원 앞 정원에 나와있는 이유는 전날 한 레지던트 남자와 했던 약속 때문이다.


하루를 빌려달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한 그가 내건 조건은 세가지였다.


1. 하루동안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것.

2. 하루동안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

3. 하루동안 보고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을 것.


위 세가지를 지키지 않을 경우 내 자살시도를 즉각 부모님께 알리고 정신과 전문의와 연결하겠다고 말했다.


남들이 보면 오해할만한 조건들이지만 그는 나에게도 조건 3가지를 걸 수 있게 해주었다.


1. 어떠한 신체 접촉도 금지할 것.

2. 법을 어기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금지할 것.

3. 단 둘이 있는 공간에 가는 것을 금지할 것.


셋중에 하나라도 어긴다면 그 즉시 동행을 멈추고 경찰과 부모님께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생각보다 흔쾌히 수락했다.


정말 나쁜 생각이 없는 것인지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던 사람이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도 웃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최소한의 방책은 마련해야 했다.


약속 시간인 8시가 조금 지나자 어제와 같이 흰 가운을 걸친 그가 병원쪽에서 나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초췌한 얼굴과 짙은 다크서클.


레지던트 일이 고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남자의 얼굴은 조금 심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나보다 먼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조금이나마 내 긴장을 풀어준 것일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나쁜 상황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윽고 그가 내 옆으로 다가오자 확 풍기는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담배 냄새..."

"미안하게 됐군. 끊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병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가요?"

"의사가 병원에서 어딜가겠어? 일하러 가야지."

"일?"


평범하게 일을 할거라면 나한테 하루를 빌려달라고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보아하니 나보고 자기 대신 일하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을 돕게 하려는 걸까? 그렇지만 나는 의학적 지식은 커녕 힘도 없고 몸도 병들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뒤로하고 남자를 따라갔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는 응급의학과이며 근무하는 곳은 응급실이고, 앞으로 어떤 아수라장이 펼쳐질지 말이다.


응급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그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 역시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갑작스런 상황에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 말했다.


"첫번째 조건. 잊지 않았겠지?"

"...하루동안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것."

"지금부터 집중하고 잘 따라와."


그리고는 다시 다급하게 움직였다.


첫번째 환자는 교통사고 환자였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피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전문의가 아니었기에 수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환자를 지혈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첫번째 환자를 시작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환자가 응급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믹서기에 손가락이 잘린 사람, 눈이 찢어진 사람, 개중에는 자살시도를 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수십인지 수백인지 모를 환자들을 치료했다.


정신없이 따라다니기를 몇시간일까.


어느새 교대시간이었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가운을 벗고 지친 몸을 이끌어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도착하자 그는 나에게 코코아를 한 잔 뽑아주더니 본인은 커피를 뽑아 마셨다.


나는 코코아를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줄곧 품고있던 의문에 대해서 물었다.


"나에게 하루를 빌려달라는 이유가 뭐였죠? 그저 당신의 일을 구경하게 하려고 한 건가요?"


그는 뜨겁지도 않은지 방금 뽑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오늘 하루동안 내가 맡았던 환자가 몇명인지 기억하나?"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당신은 전부 기억 하나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나도 기억하지 못하지. 그럼 질문을 바꿔서 오늘 내가 맡았던 환자중에 몇명이 사망했는지 알고있어?"

"그건... 몰라요."

"5명이다. 내 타임이었던 그 몇시간만에 5명이나 죽었어."


환자중 몇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장 처음 왔던 교통사고 환자가 응급처치 도중 사망한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나에게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한테 이런걸 보여줘서... 내가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자살하지 못하게 만드려는 건가요?"

"죽음에 대한 공포? 그런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게 각인되어 있는거야. 그렇기 때문에 그때 너도 떨고 있던 거 아닌가?"


그때 내 다리가 떨리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죠?"

"어째서 내가 그때 네가 자살할 거라는걸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그저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었다.


ㅡ당신, 자살하려고?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을 상대하다보면 알기 싫어도 알게되지.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살고싶다는 눈을 하게 되거든."

"내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죠? 나는 매일매일 가슴이 죄여오고 내 심장이 아직 두근거리는지 확인해요! 잠에 들때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지 불안해서 수면제 없이는 잠도 못잔다고! 이렇게 사느니..."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낫다고? 그럼 이건 뭐지?"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서 보여주었다.


"당신이 왜 그걸..."


남자의 손에는 수첩이 들려있었다. 약간 화려해보이는 커버는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좋아할법한 디자인이었다.


저건 내 수첩이었다. 그것도 내 버킷리스트가 적혀있는 수첩.


"그때 너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네 눈을 볼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렇다. 이 남자는 내 눈이 아니라 내 수첩을 본 것이다.


나는 하루에 하나씩 그 날의 날짜와 함께 버킷리스트를 수첩에 적었었다. 하지만 자살을 결심한 그 날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남의 수첩을 멋대로 봐도 되는건가요?"


내 말을 듣기나 한건지 남자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내가 예전에 담당했던 환자중에는 말기암 환자도 있었어. 상태가 위독해져서 하루를 넘기기 힘들거라고 판단했지.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연락했는데 하필 아들이 해외에 있었던거야. 최대한 빠른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해도 14시간 이상은 걸렸어. 그런데 놀랍게도 환자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도 20시간을 넘게 버텼지."

"그렇다면 아들을 볼 수 있었겠네요."

"아니. 안타깝게도 기상이 악화되어서 비행기가 제때 출발하지 못했고, 환자가 사망한지 2시간 뒤에야 도착했지."

"......"

"그 환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간절히 바랬을거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시간이 주어지기를 말이지. 네가 포기해버리려던 시간들은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기도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야."


당신이 뭘 아냐고, 나도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너 역시 사실은 누구보다 하루라도 더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고 있잖아."


틀린 것 하나 없는 남자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대신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긍정의 표시였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네가 걸었던 첫번째 조건."


ㅡ어떠한 신체 접촉도 금지할 것.


그것이 내가 걸었던 첫번째 조건이었다.


"내가 조건을 어겼으니 동행은 여기서 종료다."


그렇게 말하고는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휴게실 밖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훌쩍이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코코아를 집어들었다.


종이컵 너머로 아직 남아있는 코코아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제는 코코아 한 잔이라면 초가을의 쌀쌀한 바람도 제법 견딜만 할 것 같았다.


그것이 코코아의 온기 때문인지 내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의 온기 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 *


다음날, 심장 기증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뇌사 상태의 환자가 나왔고 사전에 장기기증에 대한 동의도 해둔 상태여서 바로 이식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동안 회복에 집중한 뒤 기증자에 대해 수소문했다.


기증자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일하던 레지던트로 근무 도중 쓰러져서 검사해본 결과 뇌종양이 심해져서 뇌사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늦가을이 되어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지만 내 손에 전해지는 코코아의 온기는 어째서인지 더욱 따듯해진 것 같았다.


지금 내 가슴에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다.


당신의 하루가 나의 하루가 되었듯이, 앞으로는 나의 하루가 당신의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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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후 소설을 쓰는 건 처음입니다! 개인정비 시간을 쪼개서 쓴거라 맞춤법은 물론이고 글의 완성도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한 번쯤 써보고싶은 소재였기에 즐겁게 쓴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다들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