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오가 주인공이었으면 키리토는 정말 괜찮은 캐릭터였을 지도 모름.

유지오 입장에서 본 키리토 대강 정리


어린 시절 짝사랑을 무력하게 잃은 후 패배감만 곱씹는 하루하루.
살아는 있을까. 밥은 잘 먹고 있을까.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근심걱정이 가실 날이 없는 유지오.
하나 어쩌겠는가. 그는 한낱 나무꾼인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농사를 할 걸 그랬나."
오늘도 유지오는 나무를 하러 산을 오른다.



그런 그의 앞에, 어딘가 익숙한 외모의 검은 머리 소년이 다가왔다.

숲에서 나가는 게 목적이라던 이소년은 이후 유지오의 삶을 크게 바꿔버린다.

마침 도끼질에 현타가 오던 참이던 유지오는 잘됐다며 길 안내를 해주기로 한다.



는 저녁에 할 거임ㅋ
거기서 손가락 빨고 기다리삼



열 받은 검은 머리 소년.
도끼를 뺏어들고 나무에 박는다.
물론 요령도 없는 소년이 제대로 해낼 리가 없다.

손만 벌겋게 올라올 뿐이다.



해가 질 때쯤 마을로 내려가니 신통한 기술을 선보이는 소년.
신성술도 없이 맨몸으로 저런 일을 해내다니 실력이 범상치 않다.
검사라고 자칭한 게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협지였다면 귀중한 기연을 얻은 셈이다.
물론 진짜 기연이더라도 이때의 유지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의 천직인 '나무꾼'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을지 걱정인 짝사랑을 구하는 것도, 옆동네 삼도류 검사 같은 세계제일의 검사를 노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주름살이 마구 늘어나는 걸 체감하는 유지오.
일단은 낯선 소년을 교회에 맡긴다.
교회엔 마침 저 좋다며 헤헤거리는 아이가 있지 않은가.
잘 받아줄 것이다.



아침부터 또 도끼질이다.
저 검은 애는 내 도움이 급하다면서 무슨 도인마냥 앉아서 폼만 잡고 있다.
진짜 내 도움이 필요하긴 한 걸까.
어릴 적 짝사랑녀가 그립다. 저렇게 매정하지 않았는데.



눈치 좀 줬더니 그럼 자기에게도 연장을 주란다.
엿 먹어봐라 라는 심정으로 집에서 먼지만 쌓고 있던 칼을 한자루 가져다 주었다.
한데 이게 웬 걸.
저 수상한 소년이 칼을 휘두르더니 나무에 상처를 냈다.
그 단단하던 나무에.
나는 따라해봤지만 택도 없었다.
도대체 쟤는 정체가 뭘까.
애초에 수도는 왜 간다는 걸까.
밤 동안 고민 좀 해봐야겠다.



답 없는 밤은 지났다.
아침은 비극과 함께 찾아왔다.
수녀 하나가 고블린에게 납치됐단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그 아이다.
내가 좋다고 따라다니던 아이의 여동생이었다.
언니에 이어서 이젠 여동생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보내는 건가.
유지오는 미쳐버릴 것만 같다.



어두운 동굴 속.
여길 그 작은 애가 지나갔단 말인가.
혹여 다크테리토리라도 들어갔으면 큰일이다.
또 정합기사들에게 끌려갈 거다.
나는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이여. 제발 그것만은 아니라 해 다오 제발.
눈치 없는 검은 머리는 만일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자신이 책임을 덮어쓰겠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하는 걸까.
아니면 그 신묘한 기술로 정합기사와 한판 뜨기라도 하겠단 걸까.
그때, 전방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수녀복, 노란 머리, 첫사랑을 닮은 흰 얼굴.
그 애다.
고블린에게 납치돼 있었다.
그러나 고블린이 너무 많다.
두렵다.
너무나 두렵다.
어릴 적 일이 떠오른다.
호흡이 벅차다.
서 있는 게 힘들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또 그때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는 건가.
정녕 그리 해버리고 만다는 건가.



과호흡의 응급처지는 호흡 방해이다.
검은 소년은 그걸 알았던 걸까.
유지오의 호흡은 낯선 소년의 손에 의해 제대로 돌아온다.
유지오의 혼탁해지던 멘탈도, 돌아온다.
검은 머리 소년이 말한다.
"작전이 있어."



"내가 그놈들의 주의를 끌게, 너는 주위의 횃불을 꺼."



"그리곤 혼란해진 고블린들을 주변에 있는 무기를 적당히 들고 때려잡는 거야."
"하지만 난 전투 못해."
"그럼 넌 그 수녀를 챙겨. 전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무나 무모한 플랜. 고블린의 수는 한둘이 아니다.



하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검은 소년의 기술은 정말 대단했다.
고블린 떼의 두목으로 보이는 거한을 상대로도 호각으로 싸움을 벌이다니.
저것이 전집중 호흡의 힘인가.


아니다. 부상이 있었다.
"아... 분명히 쳐맞기 전까진 그럴 듯한 계획처럼 보였는데..."
저 놈 저거, 머릿속으론 지가 무쌍 찍는 시뮬레이션만 돌렸을 게 분명하다.
좀 위험한 상황도 가정을 했어야지 돌아버리겠네.


무섭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무섭다.
다리도 떨린다.
하지만 어쩐지 첫사랑의 때가 연상 된다.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손가락만 빨았다.
이대로 멈춰있는다면 다시 똑같은 장면을 구현시킬 것이다.
이대로 서 있는다면 다시 나는 자괴감에 빠져살 것이다.
두렵다. 두렵지만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유지오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다.
검은 소년을 구하기 위해서. 사흘 전에 처음 만난 기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서.



물론 이기진 못했다.
"당연하지. 난 한낱 나무꾼인 걸..."
자조감이 어지간히 든다.
저 검은 소년은 결국 여기서 죽을 것이다.
나도 여기서 죽을 것이다.
폼나게 달려갔으면 양심껏 쓰러져주지. 뻔뻔한 고블린 놈 각성 버프란 것도 모르나.
유지오의 입안에 쓸씁함이 간돈다.


한데 검은 소년의 상태가 이상하다.
날 보더니 내게서 뭔갈 겹쳐본 것 같다.
발작을 일으키더니 고블린에게 달려들었다.
보아하니 이길 거 같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거 내 각성씬 아녔나.
그래도 검술이 강하긴 한 모양이다.
저 거구를 상대로 압도하는 모양이니.
... 머리가 아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걸까.
잠시 눈을 감아야겠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 녀석, 수녀 생활하면서 신성술 공부 빡세게 했나보다.
살아났다. 다른 이들도 무사하단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겁쟁이가 아니게 되었다.
나는 그때와 다르다.
나는 이제는 다르다.
그리고 검은 소년의 정체도 기억해냈다.
어린 시절의 친구였다.
개구쟁이에, 놀기 좋아하고... 그때도 자길 먼치킨으로 여기던 중2병이 있던 옛친구.
뭔가가... 새로운 뭔가가 된 느낌이다.

... 하긴 그래봤자 나무꾼인 건 다르지 않나.
한평생 나무나 해야하는 팔자인 건 다르지 않나.
그저 '자괴감에 절어살던 나무꾼' 에서 '뿌듯한 나무꾼' 이 된 거 뿐인가.



착잡하던 와중에 옛친구가 청장미검을 꺼내며 말했다.

이걸로 때려보자고. 위력은 더 높지 않냐고.

저번의 시도가 떠올라 말리려던 것도 잠깐, 왠지 궁금해졌다.
'옛친구의, 키리토의 검술에 청장미검이 더해진다면 어떤 위력을 낼까?'
결과는 상상이상이었다.
나무는, 그 높고 거대하던 내 인생의 벽은 엄청난 데미지를 입었다.
고지가 보일 정도로 엄청난 데미지를.


키리토가 감탄스러워졌다.
그 강함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반대로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약함이 혐오스러워졌다.
어린 적의 아무 것도 못하던 심약한 내가.
수도까지 간대봤자 아무 것도 못할 약한 내가.

"닥터... 나 검사가 되고 싶어 검사가 되는 거 가르쳐줘! 나무꾼도... 될 수 있을까?"
다행히 키리토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교사란 존재는 교육의 기회를 놓치지 않죠."



키리토와 수련을 쌓아가던 어느 날, 드디어 나를 옭아매던 족쇄는 그 수명을 달리 했다.
정말 고맙다 키리토. 넌 내 삶의 은인이야.
어느날 혜성처럼 돌아온 네 덕에
비겁한 겁쟁이 유지오를 버릴 수 있었고 용감한 전사 유지오를 만들수 있었어.
고맙다.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즐거운 전직 시간이 찾아왔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다.
결심은 이미 해 놓은지 오래지만서도 막상 때가 되니까 떨린다.
하지만 할 것이다.
잘 있어라. 정든 고향아.
잘 있어라. 어린 나의 고향아.
나는 검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수도를 향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앨리스.
살아있다면 조금만 기다려다오 앨리스.
네 동생에게도 언질을 미리 해뒀다. 널 구해온다고.


아침이 되었다.
수도로의 길은 멀고 험하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버틸 수 있다.



써놓고보니 길어서 자름
초반만 썼는데도 이미 유지오 입장에서 키리토는 혜성처럼 내려온 은인임.
이후 전개?
학교에선 절친으로 지내다가
끌려가서는 든든한 동료
세뇌 당했을 땐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만 미안한 친구
후반엔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친구
마지막엔 날 대신해 내 의지를 이어줄 벗
사후에는 내 도움을 요청하며 인계를 지키는 영웅

유지오 입장에서 키리토를 보면 호감캐 맞음.
소아온은 유지오가 주인공했어야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