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애는 척 보기에 최소한 고등학교는 졸업했을 듯 성숙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친구한테 들었어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서요."


그가 매우 골치 아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첫째로, 난 모든 걸 다 알지는 않고, 둘째로, 난 사람도 아니야."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 여자애가 그를 요리조리 둘러보고는 말했다.


"당신, 스스로를 비발리스라고 부른다면서요?"


"그래."


"한국인은 아닌 것 같은데...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난 16조개의 언어를 해. 당연히 한국어도 하고."


"아무튼, 저는 지금 산타를 찾고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산타를 찾아줄 수 있어요?"


"산타라?"


잠시 생각하던 비발리스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우리 아가씨는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일까?"


"이나윤이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됐어요."


"음, 근데 산타를 찾고 있다고?"


"네. 분명 산타는 있는데, 자꾸 친구들이 저한테 아직도 산타를 믿느냐고, 산타가 어디 있느냐고 놀려요."


비발리스가 피식 웃고 천천히 어느 상가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나윤이 졸졸 따라가면서 조르듯이 말했다.


"진짜로 산타가 없는 건가요? 그럼 크리스마스 저녁마다 제 양말 밑에 선물을 두고 가던 건 누구에요? 제가 차려놓던 쿠키하고 우유를 먹던 건 누구고요?"


"산타."


"그렇죠? 산타는 있죠?"


비발리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돌아서면서 말했다.


"용을 본 적 있나?"


"용이요?"


그 철없는 기집애 - 아마도 정신연령은 20세가 아니라 2세쯤 되는 모양이었다 - 가 놀라서 물었다.


"용도 진짜 있어요?"


"암. 있지."


그가 미소지으면서 상가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나윤이 방방 뛰면서 말했다.


"역시 산타는 있는 거죠?"


"있어. 진짜로 있어. 너는 산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해?"


"산타는... 하얀 수염이 잔뜩 나고, 빨간 옷을 입고, 선물 주머니를 들고, 루돌프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다니는..."


"아니지, 아니지, 그게 대체 언제적 산타 모습이야."


비발리스가 엘리베이터에 타서는, 이나윤에게 따라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나윤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말했다.


"그럼... 산타 모양은 달라요?"


"중세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한 줄 알았어. 마찬가지로 네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겉모습이 다를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이나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공룡이 아닌 게 아니듯이, 산타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야. 그리고 생각해봐. 세상에 어린애가 얼마나 많은데, 산타 한 명으로 다 커버가 되겠어? 수천, 수만, 아니 수억 명은 있어야 할걸?"


"진짜 그러네요. 그 많은 산타가 다 어디 사는 거지?"


그러자 비발리스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이나윤은 그제서야 고작 4층짜리 버려진 상가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깨끗하고 또 버튼은 수십 개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뭐에요?"


"다 왔다. 내리자."


비발리스가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놀랍게도 엘리베이터 밖은 장난감 마트였다. 이나윤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이게 뭐에요?"


"여기 어딘지 알지?"


비발리스가 묻자 이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많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제가 어릴 떄 자주 오던 장난감 마트에요. 근데 분명 5년쯤 전에 폐업한 걸로 알고 있는데..."


"15년 전에는 멀쩡했지."


비발리스가 뚜벅뚜벅 오른쪽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는 레고 코너가 있었고, 화려한 궁전과 마차가 들어 있는 30만원짜리 레고 세트가 맨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레고 코너 앞에는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애가 서서 그 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나윤이 깜짝 놀라서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제가 왜 저기 있어요?"


"15년 전이라니까. 너 타임머신 탄 거야. 정신 차려."


비발리스가 이나윤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저때 기억나?"


"...네. 저 레고 세트를 정말 갖고 싶어했어요. 근데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저걸 주고 갔어요."


"그렇겠지."


비발리스가 미소지으면서, 그 어린 이나윤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리고 어린 이나윤을 툭툭 치고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이거 갖고 싶어?"


그러자 어린 이나윤이 매우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물러서면서 쏘아붙였다.


"아저씨 누구에요?"


"그냥 궁금해서. 이거 갖고 싶어?"


"...네."


그 때 누군가 다가와서 비발리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누구요?"


비발리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가 물었다.


"우리 딸한테 볼일 있으십니까?"


"아, 아뇨."


비발리스가 황급히 활짝 웃으며 급히 20세의 이나윤에게 확 달라붙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여, 여, 여자친구랑 데이트하다가 애가 혼자 있길래 혹시 부모님을 잃어버렸나 해서요."


"...그렇군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어린 이나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린 이나윤은 아버지와 함께 가면서도 궁전 레고 세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남자가 잠시 돌아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으로 홱 돌아서서 걸어와 20세의 이나윤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깜짝 놀란 이나윤이 버벅거리는데 비발리스가 대답했다.


"이나윤이라고 합니다."


"이나윤."


남자가 싱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하고 얼굴도 비슷한데, 이름도 똑같네요. 그럼 안녕히 가십쇼."


"댁 따님은!"


남자가 다시 어린 이나윤을 데리고 떠나려는데, 비발리스가 레고 코너 꼭대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궁전 세트가 갖고 싶다네요!"


남자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비발리스가 20세의 이나윤을 보며 말했다.


"산타를 본 기분이 어때?"


"네?"


"방금 산타를 봤잖아."


"산타라니요?"


이나윤이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뭐, 우리 아버지가 산타라고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많이 들었어요. 안 믿어요."


"아니지. 아니지. 너희 아버지가 어떻게 산타야? 너희 아버지가 어떻게 전 세계 수억 명의 선물을 다 주겠니?"


비발리스가 폴짝폴짝 뛰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나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 뒤, 이나윤을 태우자마자 문을 닫고 버튼 다섯 개를 연타했다.


이어서 문이 열리자, 놀랍게도 엘리베이터는 도시 상공에 떠 있었다. 도시에서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흰 눈이 펄펄 내렸다. 이나윤이 확 움츠리면서 소리쳤다.


"으악, 추워!"


"지금은 크리스마스야."


비발리스가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 보여? 너희 아버지, 밤에 몰래 나와서 네가 갖고 싶다고 한 그 레고 세트 들고 나오시네."


이나윤이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산타 아니라면서요?"


"당연하지. 너희 아버지는 그냥 사람이잖아. 산타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비한 존재고."


비발리스가 그 아버지의 주변을 가리켰다.


"그럼 그 주변을 한번 봐봐. 어때, 보여?"


이나윤이 아래를 쳐다보았다. 많은 부모님들이 밤에 몰래 나와서 마트에 들어가 장난감을 상자로 들고 나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사주지도 않았을 비싼 장난감들을 다들 한아름 안고 말이다. 비발리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네 기억을 되짚어 봐. 부모님은 항상 저렇게 비싼 장난감을 한아름씩 사다 주셨니?"


"...아니요."


"그건 다른 집도 마찬가지야. 어지간한 집은 장난감에 그렇게 큰돈을 안 써.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 이브에만큼은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장난감 매출이 순간적으로 폭증해. 모든 집이 장난감에 갑자기 몇십만 원씩 쓴다고."


이나윤은 아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발리스가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부모들의 '시간제한 있는 낭비'가 일어나는 현상 -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모습이고, 바로 저게 네가 말하는 그 '산타'야. 세상 모든 부모님들이 자기 아들딸을 위해서 밤중에 코트 입고 나와서는 마트에서 비싼 장난감을 한아름 들고 나오는 저 모습. 말도 안 되는 모습."


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윤은 말없이 계속해서 눈이 쏟아지는 밖을 내려다보았다. 저때만 해도 젊은 아버지가, 그 장난감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눈발을 맞으면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비발리스가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버튼을 연타해대며 말했다.


"저 '산타'라는 초자연적인 괴물은 전 세계의 모든 부모를 지배하지. 평상시에는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위장한 채로."


"...이 엘리베이터, 타임머신이라고 했죠?"


"그래."


"어디든 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잠깐 한 곳만 들렀다 갈 수 있을까요?"












이나윤의 아버지가 레고를 옆구리에 끼고 막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문 옆에 이나윤이 서 있었다. 이나윤의 아버지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놀라면서 입을 열었다.


"그때 그 마트에서 봤던..."


"네. 맞아요. 아저씨 딸하고 이름 똑같은 여자애."


"크리스마스에 왜 남자친구하고 안 있고?"


"주차하는 중이에요."


그녀가 빙긋 웃고 잠시 그의 옆구리에 끼어 있는 레고를 보다가, 그 레고를 직접 사오는 거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튀어나온 질문은 그게 아니었다.


"...손 안 시려우세요?"


"아, 손이요? 장갑이 없으니까 뭐 어떡하겠습니까."


"그 레고... 직접 사오시는 거에요?"


"그렇죠. 우리 딸, 어른 되기 전까지는 산타가 있다고 믿었으면 좋겠으니까."


그 말을 들은 이나윤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산타는 있어요."


"에?"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딸아이 양말 밑에 선물을 두실 텐데, 그럼 아저씨가 산타가 아니고 뭐겠어요. 루돌프가 끄는 썰매에 타지도 않고, 빨간 옷을 입고 있지도 않고, 하얀 수염이 잔뜩 나지도 않았지만, 뭐, 모양이 좀 다를 수는 있죠. 중세 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한 줄 알았으니까."


"말을 되게 재밌게 하시네."


"따님은 아버님을 정말 사랑할 거에요."


이나윤이 활짝 웃었다.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나중에 미워하지나 않으면 좋겠네요."


"절대 안 그럴 거에요.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님을 사랑할 거에요."


"그래요. 남자친구하고 메리 크리스마스 하쇼. 난 이제 산타 일 하러 들어가 봐야 하니까."


아버지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윤은 한참 동안 그 뒤를 바라보면서 눈발을 맞고 있었다. 뒤에서 비발리스가 물었다.


"집 안 갈 거야?"


"...아빠는 장갑이 없다고 그랬어요."


이나윤이 아파트 대문 앞에 한참 동안 서서 집 안을 바라보았다.


"왜... 왜 제가 산타가 있다고 믿기를 바라셨을까요?"


"있으니까. 내가 지금 한 4번째 말하는 거 같은데."


비발리스가 이나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가자. 산타에 대해 충분히 알 만큼 알았어."


"잠깐만요."


이나윤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 잠깐 마트 좀 들를래요."

















"웬 장갑?"


주름이 훨씬 많이 늘어나고 눈도 훨씬 피곤해 보이는 현재의 아버지가 장갑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나윤이 행복하게 웃었다.


"나한테는 매년 산타가 있었는데..."


그녀가 아버지의 늙고 흉진 손을 잡으면서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빠한테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서..."











* 원래 12월에 크리스마스 기념 공모전 있을 때를 대비해서 묵히던 건데 그냥 올림